지워지고 새겨진 展

 

노채연 신상준

 

 

 

GalleryMEME

M‘cube 4F

 

2026. 9. 16(수) ▶ 2026. 10.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5길 3 | T.02-733-8877

 

www.gallerymeme.com

 

 

노채연 作_그들의 유대 (Their Affinity)_순지에 분채, 백토, 아교, 색연필_20x35cm_2025

 

 

흐린 것 앞에서는 걸음이 느려진다. 눈이 초점을 찾지 못하는 동안 몸은 점점 더 앞으로 기운다. 우리는 생략된 자리를 그냥 두지 못한다. 지어낸 이야기로 그 자리를 메우고, 설명되지 않는 것에 기어이 설명을 붙인다. 《지워지고 새겨진》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두 작가는 완성된 이야기를 보여주기보다 이야기가 만들어질 자리를 마련한다.

노채연의 화면은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 신화와 종교에서 낯익은 형상을 가져오지만, 그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 붙이지 않는다. 여러 도상이 나란히 놓이고 서로 다른 형상이 한자리에 겹쳐진다. 무엇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다음에 보이는 것이 달라지고, 다시 보았을 때는 지나쳤던 형상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정해진 순서가 없기에 화면은 볼 때마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그 관계를 채우지 않고 보는 사람의 개입에 맡긴다. 이러한 얽힘은 작가가 선택한 재료의 물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화면 속 백토를 섞어 불투명해진 물감은 무엇이 먼저 그려지고 나중에 덮였는지 그 인과적인 선후 관계를 모호하게 지워버린다. 이 물리적인 시간의 흔적은 화면 위로 소환된 신화 속 과거의 시간과 뒤섞인다. 결국 그려진 순서도, 이야기의 원인과 결과도 흩어진 화면은 고정된 서사 대신 매번 새롭게 이어지고 파생되는 관계들을 남겨둔다.

 

 

노채연 作_낯선 땅_1 (Strange Land_1)_순지에 분채, 백토, 아교_65x53cm_2026

 

 

신상준은 종이를 이용해 화면을 가린다. 화면을 가린 종이를 반투명하게 만들고, 그 아래 있던 이미지를 다시 따라 그린다. 가려진 이미지는 끝내 사라지지 않고 희미하게 남는다. 따라 그리는 사이 물감이 번지고, 번진 자리를 다시 따라가면 또 다른 흔적이 생긴다. 그러니 처음의 이미지와 마지막에 남은 이미지는 조금씩 어긋난다. 대상을 확인하려는 반복이 오히려 대상을 바꾸어 놓는다. 인물도 사건도 빠져나간 그의 풍경은 멈춰 있는, 레이어별로 반복되는 이미지로 남았다. 대상을 따라 그리고 번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은 납작한 화면 위에 미세한 층위를 만들어낸다. 관람자는 익숙한 풍경 앞에서 무언가 상실된 빈자리를 마주하는 동시에, 켜켜이 쌓인 레이어와 흩어진 물감의 표면 가까이 다가가 레이어들 사이의 어긋난 틈을 찾아내고자 한다.

두 작가의 작업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화면에 남겨둔다. 익숙한 형상은 낯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지워진 장면은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어쩌면 잘못 본 것과 상상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알 수 없는 공백을 마주하면 기억과 경험을 꺼내어 연결하고,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눈앞의 장면을 납득한다. 자신의 기억을 엮어 만든 장면은 그 과정에서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측하고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려 애쓰는 것은, 결국 눈앞의 이미지를 눈에 담고 그 너머의 세계를 마음에 새기기 위함일 것이다.

 

글. 갤러리밈 큐레이터 양수인

 

 

신상준 作_Celadera (3)_캔버스에 종이, 아크릴릭, 아교, 수채물감_72.7x60.6cm_2026

 

 

신상준 作_Caldera_D (2)_나무 판넬에 종이, 아크릴릭, 아교, 수채물감_22.7x15.8cm_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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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60916-지워지고 새겨진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