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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l's Spring 展
BBK(장종완x장준호), 유예림

상히읗
sangheeut
2026. 7. 3(금) ▶ 2026. 8. 1(토)
서울특별시 용산구 신흥로 30
www.sangheeut.net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 성장과 진보에 대한 믿음, 공동체와 역사에 대한 신화는 수없이 반복되고 폐기되어 왔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며 삶을 지속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믿음들이 사실인지 여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고 세계를 조직하는가에 있다. 어떤 상상은 제도가 되고, 어떤 믿음은 더 이상 믿음으로조차 인식되지 않은 채 현실을 구성한다. 달을 둘러싼 수많은 신화와 상상이 끝내 인간을 달에 도달하게 했듯, 신자유주의 역시 성장과 성공이라는 서사를 통해 오랫동안 우리의 삶을 조직해왔다.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신화가 무너질 때마다 또 다른 신화를 발명해온 과정이기도 하다.
BBK는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유토피아적 상상력, '발명된 전통', 그리고 이상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자연을 의인화하는 방식을 탐구하며 집단적 신화의 잔해를 다뤄왔다. 2019년 보안스페이스에서 열린 《노맨스랜드》를 통해 첫 협업을 선보인 장종완과 장준호는 이후 비정기적으로 협업을 이어오며, 서로의 작업을 또 다른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 순환적인 방식을 구축해왔다. 장준호의 조각은 장종완의 회화 속 이미지를 촉발하고, 장종완의 회화는 다시 장준호의 조각적 형태를 위한 토대가 된다. 하나의 작업은 다른 작업의 표면이 되고, 또 다른 작업의 계기가 된다.
이러한 협업은 얼핏 직감적이고 본능적인 방식처럼 보인다. 뇌의 주름 혹은 미로를 연상시키는 원형의 나무판 위에 사이키델릭한 이미지를 그려 넣은 <뇌피셜>(2026)이나, 열매처럼 작은 원형들이 매달린 나무 구조 위에 샤인머스캣을 연상시키는 색감과 눈을 함께 그려 넣은 <당신은 나의 빛>(2026)은 서로의 형상을 자유롭게 오가며 탄생한 결과물이다. 머리가 잘린 동상이 그려진 캔버스 위에 장준호의 나무 조각이 걸린 <먼 계절>(2026)은 하나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장치를 넘어,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공유하는 기념비적 사건과 역사적 장면을 환기시킨다. 개인의 직감에서 출발한 이미지는 협업을 거치며 집단적 기억과 믿음의 층위로 확장된다.

한편, 유예림은 특정한 이야기를 그리기보다 이야기가 발생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왔다. 소설의 한 문장, 일상에서 마주친 풍경, 사소한 기억의 파편은 작가 안에서 뒤섞이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과 낯선 존재들로 재구성된다. 화면 속 장면은 과장될 만큼 구체적이지만 특정한 사건이나 장소를 지시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끝내 특정할 수 없는 풍경은 관람자로 하여금 빈틈을 메우고 관계를 연결하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한다.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장면, 익숙하지만 끝내 귀속되지 않는 공간. 작가가 말하는 '인공적인 중립'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번 전시에서 유예림은 상히읗의 공간을 전제로 한 신작을 선보인다. 식물과 동물이 놓인 실내는 가장 익숙한 소재이지만 특정한 장소나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다. 현실과 허구, 자연과 인공 사이를 유영하며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를 이룰 뿐이다. 여러 작업실을 거치며 완성된 화면에는 수개월에 걸친 붓질과 물감의 층이 축적되어 있으며, 관객이 마주하는 이미지는 그 긴 시간이 남긴 마지막 표면이다. 회화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창이라기보다, 시간이 퇴적되고 물질이 응축되는 장소가 된다.
생태학에서 “Fool's Spring”은 계절을 앞질러 찾아온 온기로 인해 식물들이 너무 일찍 싹을 틔우는 현상을 뜻한다. 뒤이어 찾아올 추위를 알 수 없음에도 생명은 다시 자라나고, 또다시 세계를 시작한다. 이처럼 실패한 미래와 폐기된 약속 이후에도 인간은 또 다른 신화를 만들고,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
처음에는 두 작가가 만들어낸 하나의 세계가 먼저 보인다. 그러나 시선은 곧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한 구조와 시간으로 향한다. 유예림에게 그것은 시간이 켜켜이 퇴적된 회화의 표면이고, BBK에게는 하나의 작업이 다른 작업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협업의 구조이다. 서로 다른 시간과 방식으로 축적된 두 작업은 같은 공간 안에서 비로소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그리고 그 풍경은 아직 완성된 세계라기보다, 무엇인가 다시 시작되기 직전의 계절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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