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빈 展

 

시소 Seesaw

 

 

 

GALLERY2

 

2026. 6. 25(목) ▶ 2026. 8. 1(토)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길 204 | T.02-3448-2112

 

www.gallery2.co.kr

 

 

 

 

《시소》가 다루는 것은 여러모로 이미지의 문제다. 윤영빈의 ‘얼굴’ 연작(2026)은 이미지에 관한 복합적 층위의 질문을 던진다. 집이라는 삶의 공간, 디지털 이미지 속 공동체적 차원의 환상[1], 범 세계적 폭력의 재생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 나서는 헤테로토피아, 그리고 그가 전용하고 생산하며 그린 회화까지. 화면에 켜켜이 적층된 의미망은 결합을 거듭하며 이미지로서 세상에 보여진다. 그뿐인가. 이미지는 말을 건네는 주체의 위치로 뒤바뀌어, 반대로, 세상을 본다.

작업의 발단은 집이라는 불온한 공간이다. 그에게 집은 신체의 외부이자 정신적 내부를 정리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터전이다. ‘오늘’이라는 단어로 박제된 타인의 주거 공간은 도달할 수 없는 규범이 되어 끊임없이 개인을 밀어붙인다. 규격에 부합하지 못하는 실재를 마주할 때 엄습하는 애석함. 그 외적 압박은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었고, 이내 검열받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결여된 사물들을 길어 올리게 했다. 이 전개의 첫번째 소재는, 모든 ‘얼굴’ 연작에 반영된 균열이 생긴 그의 집 벽이다.

그는 벽의 균열을 눈으로 따라가며 일부를 별자리처럼 발췌해 눈과 입이 있는 표정을 읽어 냈다. 이후 모자, 지갑, 비누, 물컵 등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보편적 물건들을 생각하며, 클립아트 오픈 소스 웹사이트에 이름을 검색하고 이미지를 빌렸다. 여기에 균열에서 발견한 표정을 덧씌우며 (그의 말로는 더 나아가 균열을 가리거나 장식하는 식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그가 균열을 표정으로 치환하고 이를 다시 회화적 레이어 삼아 그리기에 반영하는 반복적 행위는, 엄밀히 말해 이미지의 문제에서 제기되는 정치다. 보이지 않아야 할 개인의 결함을 공적 회화의 영역으로 끌고 나와, 그것이 짜증나는 혼잣말이 아니라 엄연한 발언임을 현시하는 것. 누구나 매일 손에 쥐고 가방에 넣고 가끔 잃어버리기도 할 평범한 사물들이 어느덧 우리를 내려다본다. 내가 사물을 본다는 건 대부분 착각이었던 것이고, 사물은 이제 나를 그 자신들의 세상에 기입하며 시선의 자리를 역전시키고야 만다.

완벽한 헤테로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음을 자각하면서도, 그 불가능한 간극을 서로 수정하고 협응하며 지탱하려는, 연약하되 끈질긴 정동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그의 태도는 회화라는 고립된 장르 안에 개인의 감정과 가치 판단을 기어이 개입시켜야 한다는 필연적 요구에 치닫는다. 단순히 아름다운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 이 세계에 얼마나 중대한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세계의 불합리함에 대한 분노와 반발심이 어느샌가 회화라는 공간으로 운반되어 우리에게 들어온다. 윤영빈에게 이 과정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각자의 결함이 어떻게 공동의 언어로 번역되고, 불려지고, 논의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투쟁에 닿아 있다.

 

 

 

 

전시공간 벽에 붙은 일종의 ‘물감 조각’들은 규범의 순진함을 비웃듯 사서롭게 공간을 휘감는다. 클립아트를 추상적 도상으로 전용하고, 균열에서 얼굴을 추출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법론이다. 기성이 지닌 표백된 매끈함에 수공, 개성, 육체와 같은 열악한 것들이 침습한다. 철학 연구자 이솔의 지적처럼, (온라인) 세계에서 고해상도나 빠른 속도감보다도 우리를 강하게 짓누르는 것은 타인이 바라본 풍경이다.[2] 윤영빈에게 회화를 하는 일이란 그 이기적이고 저속한 현실에서 이미지가 자발적으로 말하도록 지지하는 것으로서의 저항이다. 더 깊숙이는, 그리기의 행위를 습관적으로 사장해 온 논점의 헛점을 파고들며 이미지를 불필요한 껍데기에서 건져내어 주체의 자리로 뒤집어 놓는 전복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시소(see/saw)’의 형국이다.

덧붙여. 그가 그린 화면의 저변에는 온 세계가 직면한 부채감이 깔려 있다. 이란과 미국의 종전 협의가 지난 6월 18일에 공표되었다. 역사적으로 전쟁 종식이 선언된 것은 1973년 베트남과 프랑스 협정 이후 무려 53년 만이고, 2023년에 시작된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 2014년부터 이어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동시대를 움켜쥔 세 전쟁의 사망자는 60만 명에 육박한다. 서울 시민 15명 중 1명이 사라진 셈이다. 무차별적 폭력으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자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는가? 종교인이든 현지인이든 아니든, “잘못된 시간과 잘못된 장소에 그들이 거기 있었다는 것만으로 죽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한가?”[3] 지금도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많은 운동과 염원이 세계 곳곳에서 솟구치고 있다. 그 영향력은 참으로 미비하다. 그러나 그 실천에 담긴 믿음만큼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도망치지 않아야 한다.

[1] 이 표현은 다음의 저술에서 빌렸다. 이솔, 『이미지란 무엇인가』, 민음사, 2023. 152.
[2] 앞의 책, 156.
[3] 아쉴 음베베, 『죽음정치』, 김은주, 강서진 옮김, 동녘, 2025.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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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60625-윤영빈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