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경 展

 

사유를 앞질러 Outruns Thought

 

Self-portrait 2025_157x108cm_Monotype on cotton paper

 

 

OMG

 

2026. 6. 19(금) ▶ 2026. 7. 5(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대사관로12길 8 (한남동, 한남힐사이드)

 

www.omg-kr.com/about

 

 

Flower #28 2025_76x57cm_Monotype on cotton paper

 

 

정보경의 개인전 《사유를 앞질러》는 모노타입으로만 구성한 전시다. 모노타입은 유리나 금속, 플라스틱 같은 매끈한 원판에 그림을 그려 찍어내는 방식의 판화를 말한다. 복수 생산 작품인 판화 중에서 유일하게 한 장의 작품만이 나오는 판화이다. 그냥 그리면 되지 왜 굳이 전사를 할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모노타입의 매력은 간접성에 있다. 작가의 손에서 판으로, 판에서 힘으로, 힘이 종이로 옮겨지는 과정을 담아내는 것이 모노타입만이 지닐 수 있는 매력이다. 매끈한 원판에 유성잉크로 그림을 그리면 종이 위에서 그리는 것과는 다르게 잉크가 멍울지거나 번져 나간다. 붓의 갈라짐이나 결도 그대로 나타난다. 판과 매체가 맺는 관계 속에서 생성된 무늬가 남는 것이다. 작가가 오일을 떨어트리거나 겹치면 반응하기도 하고 판 위에 잉크를 긁어내면 아주 깨끗하게 잉크가 밀리기도 한다. 이후 찍는 순간의 상태나 압력을 가하는 힘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반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을 얻기도 한다. 종이의 섬유질에 따라서도 흔적은 크게 달라지는데 이러한 모노타입을 다르게 말하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모노타입이라는 사건을 만드는 건 작가만이 아니다. 인쇄 공정을 이끄는 판화가와 여러 스텝, 작가와 합을 맞추어온 기계 그리고 사건에 기여하는 많은 물질들이 함께 한다. 물질이 곧바로 종이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원판 위에서 관계를 맺고 반응한 뒤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다. 작가의 그리는 행위뿐만 아니라 프레스 기계를 다루는 이의 감각, 기계 자체에 투여되는 기체, 액체, 고체, 종이를 나르고 다루는 여러 손과 발의 협력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국내 처음으로 판화 공방을 열어 한국 판화 발전에 기여한 김구림은 저서에서 ‘판화 제작 과정에서는 인쇄 명장이 작가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미묘하게 지도하고 원화에 생명력을 부여한다’라고 적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노타입에는 원본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모노타입의 원본은 판에서 부유하는 물질이고 판화지 위에는 외부의 힘에 의한 흔적만이 남는다. 모노타입은 복제를 위해 탄생한 판화를 복제 불가능한 매체로 사용하는 역설적인 형식이다. 이 전시는 복수 생산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회화에 비해 저평가되어 온 판화에 대한 통념을 비판적으로 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작가의 예술성과 숙련된 기술 그리고 수많은 협업의 과정이 어떻게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Flower #25 2025_76x57cm_Monotype on cotton paper

 

 

에드가 드가는 모노타입을 즐겼다. 사후 작업실에서 다량의 모노타입이 발견되면서 드가는 19세기 최고의 실험적 판화가 중 한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판화가 루도빅 레픽, 마르슬랭 데부탱, 출판업자 카다르 등과 판화 실험을 반복했다. 모마에서 보수적으로 집계한 드가의 모노타입 작품수만 300여점 이상이다. 드가는 상당히 통제적인 화가였지만 그는 모노타입을 통해 우연성과 즉흥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정보경의 회화는 우연성과 즉흥성이 두드러진다. 그녀는 드가와는 다르게 자신의 스트로크, 아니, 화면이 나오는 과정을 통제하고 싶어 했다. 2년 전 그녀와 함께 태국 레지던시에서 3주간 머물면서 지독하게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자신에 의해 그려지는 타인에 대한 사유, 그리는 대상에 대한 의미, 자기 탐구에 대한 욕구에 목말라했다. 아직도 그녀의 고민은 유효하다. 이후 그녀는 답답할 때마다 판화 공방을 찾았다. 모노타입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작품 크기와 상관없이 40분을 넘기지 않고 붓을 놓아야 한다. 작가는 매끈한 원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붓칠을 하고 나면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정보경과 합을 맞추어 공정을 이끌고 있는 프린트아트 리서치센터 디렉터 남천우의 말을 옮겨 보자면, "정보경 작가는 필치가 워낙 시원시원해서 큰 크기의 모노타입도 그릴 수 있다. 그림 그리는 걸 보면 그날의 컨디션이 그대로 보인다. 산만한 날은 확실히 그림이 안 된다. 붓칠이 끝나면 잉크가 마르기 전에 곧바로 스태프들을 불러 찍어야 한다. 모두 스탠바이하고 있다가 바로 움직이는 거다. 만약 작업이 잘 안 나오면 모델과 작가, 스태프들까지 순식간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팀워크가 중요하다. 작가의 작업이 잘나오는 날은 그날 그려진 작품들을 착착착착 찍어낼 수 있다. 정보경의 그림은 생각으로 되는 게 아니다. 접신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화면이 나오겠는가." 그는 정보경이 피사체에 대한 해석이나 감정보다 먼저 자신의 감각을 화면에 쏟아내는 데 익숙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사유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자유로웠던 순간들은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고스트 판에서 진면모를 드러낸다. 고스트 판은 모노타입의 청소 판이라고도 하는데 두 번째로 찍어낸 흐릿한 인쇄본을 말한다. “판 위의 잉크를 8할 내보내고 2할을 살짝 남긴다. 그러면 남은 걸 파스텔처럼 찍어낼 수 있다.” 남천우는 원판에 남은 잉크를 코튼지로 길어냈다. 정보경의 고스트 판이 유독 인상적인 이유는 사유를 앞질러 접신한 듯 쏟아낸 스트로크와 강렬한 팔레트 이면에 숨겨진 작가의 단련된 손맛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는 오랫동안 작가의 작업을 지켜보며 함께 공정을 수행해 온 판화가의 감각이 더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정보경의 고스트 판은 작가가 통제하기 어려운 관성이나 욕구 이면에 숨겨진 흔적을 속삭이듯 보여준다. 사유를 앞질러 자기와 세계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 고스트 판에 남겨진 잔상은 작가가 오랜 시간 몸으로 축적해온 감각의 증거이다.

 

 

Salt 2023_66x50.5cm_Monotype on cotton paper (BFK Rives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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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60619-정보경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