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진 展

 

The Double

 

 

 

GALLERY SP

 

2026. 6. 11(목) ▶ 2026. 7. 18(토)

서울특별시 용산구 회나무로44가길 30 | T.02-546-3560

 

www.gallerysp.com

 

 

 

 

황용진의 회화는 인간이라는 영원한 주제 속으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이동해왔다. 1980 년대 후반, 국내 미술계가 민중미술과 아방가르드 형식 실험으로 왕성하던 시기에도 그는 인간 내면에 대한 관심을 화면에 아로새겼다. 초기의 인물 작업이 파편화된 형상으로 전개 되었다면, 최근의 회화에서는 인물의 구체성을 보다 분명하게 호출한다. 이러한 변화의 계기 에는 정치·사회적 사건과 그 사건의 중심에 놓인 인물들의 심리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호기심이 자리하며, 명확한 인물 형상을 그리게 된 초석이 되었다. 물론 때때로 그의 붓끝은 목가적 풍경 혹은 문명의 이기로 향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인간사에 대한 유비였기에 그 관심은 항상 인간으로 연결되는 순환적 궤적을 그린다. 그리고 그러한 여정에서 작가가 확인 한 사실은, 인간은 겹으로 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온전히 끌어안을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복잡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The Double》에서 황용진은 분열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그림의 언어로 다시 한 번 불러온다. 인물들의 몸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몸을 휘감고 있는 ‘줄무늬’라 할 수 있다. 녹색과 황색의 상반된 색의 교차는 선과 악, 강인함과 나약함, 진실과 허위 등의 양가성이 내부에서 파문처럼 진동하고 있음을 시각화하며, 인간은 결코 단일한 정체성으로 현시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줄무늬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겹의 거친 붓질로 생성된 울퉁불퉁한 표피를 마주하게 된다. 마치 껍질이 벗겨진 살, 혹은 육화된 신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엽고 한없이 위태로운 몸. 이들을 처음 봤을 땐 당혹과 혐오를 느끼지만 이내 곧 그 연약한 존재에 연민의 감정을 투사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취약한 존 재이며, 그렇기에 반드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존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인간은 언제나 타자에게 노출된 상태, 곧 외존(ex-position)의 양태 속에서만 자신을 이룬다는 점을 함의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아닌 것과의 접촉 속에 놓이는 일이다. 그의 회화는 이러한 외존의 개념을 회화적으로 번역한다. 황용진의 작업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조형적 요소는 '눈빛'이다. 인물들의 눈빛은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하지도, 완전히 외면하지도 않은 채 불안정하게 화면을 배회하고 있다. 그 시선은 형언할 수 없는 힘을 응축한다. 그리고 그것은 캔버스 너머의 감상자와 연동되어 예측할 수 없는 내밀하고 신체적인 반응을 유발한다. 어떻게 보면, 언어를 미끄러지게 하는 다양한 감정들이 눈에서 소용돌이치고, 관자는 우연히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연루된 존재 일지도 모르겠다. 이 감응의 과정에서 눈빛은 서사와 의미의 해독을 방해하며 계속해서 불특정한 에너지를 창발한다. 형상은 늘 잠재적인 이미지들의 안개에 둘러싸여 있고, 이 잠재성은 공존하는 회로들을 따라 계속해서 변이한다. 작가의 회화에서 잠재적 안개 역할을 하는 것이 눈빛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그 시선들은 예측할 수 없는 정동을 이끌어 내고,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가 잠정적 역동의 상태에 놓여있음을 환기한다.

 

 

 

 

한편, 전반적으로 작가의 화면은 선명하게 빛을 발하지 않는다. 몸에 새겨진 고채도의 줄무늬들은 잿물을 뒤집어쓴 듯 한풀 숨이 죽어 있고, 배경 또한 여명과 황혼 사이 어딘가를 포착한 듯 불분명하다. 이는 밝음 위에 어둠을 올리고 다시 닦아낸 후의 화면으로, 에칭 판화에서 판 전체에 잉크를 밀어 넣은 뒤 표면을 닦아내는 와이핑 과정과 유사한 지점이다. 덮는 행위와 지우는 행위가 함께 일어나며, 어둠은 제거됨과 동시에 붓질 사이 홈으로 들어가 흔적을 남긴다. 그리하여 밝음 위에 어둠이 설핏 중첩된 스산한 화면이 완성된다. 아마 이는 오랫동안 판화 작업을 지속해온 작가의 몸에 체화된 감각이 화면으로 스며든 결과일 것이리라. 이러한 그리기 방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양가적 감정 구조와도 닮아 있다. 충만함은 공허로 덮어지기도 하고, 증오는 사랑으로 쇄신되기도 한다. 작가는 끊임없 이 퇴적과 노출을 반복하는 감정의 지층을 표현하기 위해 무언가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방식 보다 어둠 속에서 빛을 길어 올리는 지난한 방식을 고집한다. 그것은 존재가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혹은 어떤 철회와 함께 도래한다는 사실을 은유한다. 전시 제목 ‘The Double’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 소설에서 차용한 것으로, 자기 안의 또 다른 분신, 즉 내 안의 타자와 마주했을 때의 존재론적 불안을 풀어냈다는 점에서 작가의 회화는 해당 소설과 느슨하게 공명한다. 소설에서 주인공 골랴드킨은 자신과 완전히 닮은 또 다른 분신과의 조우 이후, 자아를 회복하지 못한 채 광기로 수렴되는 파국적 결말에 이른다. 다만, 황용진은 인간이 지닌 양면성과 취약함, 그리고 타자와의 불가피한 얽힘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임을 받아들이며, 분열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 다른 자아들의 공존을 그림으로써 형상화한다. 형형한 눈빛으로, 취약한 인물 형상들과 그들 의 뒤엉킴으로. 《The Double》은 원숙기 작가의 인간에 대한 다시 보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분열된 인간의 불안을 판단이나 단죄의 대상으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한 작가의 성숙한 시선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김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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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60611-황용진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