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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토평 이평규 展

인사아트센터 4층 부산갤러리 | 갤러리인사아트
2026. 3. 11(수) ▶ 2026. 3. 16(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4층 |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6
현대적 산수화의 가능성 토평 이평규의 근작에 부쳐
오광수 미술평론가
토평 이평규의 근작은 직전인 2022년, 2023년의 개인전에서 보여준 변혁의 맥락을 지니면서도 방법에 있어 더욱 대담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성한 실험과 이에 따라 더욱 다져지는 독자의 세계에 대한 자신감이 화면을 채워가고 있다고 할까. 누구라도 그의 작품 앞에 서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화폭과 휘몰아치는 운필의 자재로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부단한 일탈과 환원의 전개는 당혹감과 더불어 신선한 감흥을 자아내게 한다.
토평은 사생을 주로 하는 산수화파에서 출발하였다. 사생을 주로 한다는 것은 우선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자연으로부터란 동기부여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한국화가 오랫동안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사생의 범주는 전국의 산야가 대상이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근교의 산야가 주 모티브로 등장하고 있다. 북한산과 불암산 등 자신이 언제나 마주하는 자연의 경관이다. 이는 작가는 자신이 서 있는 현장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절실한 작화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관념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애초에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그의 자연에의 접근은 극히 평범한 태도에서 이루어진다. 수목이 울창한 산속이나 산으로 오르는 등산의 길목 같은 특별한 시각적 충일 보다는 평범하면서도 친숙한 자연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이는 외관으로서의 자연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스스로 자연이 되어가는 경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이 거기 있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내 속으로 들어와 자신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경지로서 말이다. 그의 작품들에서 내뿜는 열기는 바로 작가와 자연이 일체가 되는 감동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외물은 흥에 겨워 들석”(작가의 말) 이는 경지에 마침내 도달한 것으로서 말이다. 이 자유로운 경지야말로 그가 도달하려는 창조적 진실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작가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 흔히 대담한 실험 일수록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는 태도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의 대담한 실험의 전개가 한국화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지 않음은 다음과 같은 그의 언술이 대변해 준다.
“한국의 미술, 특히 지필묵의 전통 재료도 현대적 표현이 가능하다 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의 언급에는 많은 작가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매재에 속박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자신의 의도는 이른바 전통에 속박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전통의 현대적 의미를 추구하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 같은 의도는 현대적 산수화의 가능성을 내비친 것과 다름없다고 본다. 그의 실험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역시 방법의 새로운 시도에서임을 근작은 말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화에서 주장되어 온 지필묵이 중심이 된 매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지필묵의 새로운 시대적 해석, 새로운 변용의 가능성을 피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일련의 실험적 추이를 두고 이것이 한국화인가 단순한 회화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 이다. 어쩌면 이 같은 의문은 그의 실험이 상식을 벗어나려는 자유의지가 강하게 반영되고 있는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다음 작가의 언술은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내게 허락된 시대가 좀 요란스럽기도 하고 자유분방함이 밑도 끝도 없다.”
그의 필법 가운데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평필(옆이 넓은 붓)의 구사이다. 전통적인 한국화가 주로 봉필(끝이 뽀족하고 둥근 붓)에 의해 그려지는 것에 비해 평필의 사용은 종래의 필선 위주의 묘사와는 전혀 다른 구사의 결과를 가져온다. 봉필의 사용이 선조 위주의 묘법에 적응되는 반면 평필의 구사는 면 위주의 필획으로 인한 구조적인 구사가 지배되기 때문이다. 필선 위주나 종전의 준법과 같은 방법에서 유도되는 그리기(드로잉) 위주가 아닌 면의 중첩에 의해 생겨나는 구조로서의 화면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필법의 도입은 그가 시도하고 있는 자연으로서의 도시경관을 묘출하는데 더없이 잘 어울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대상으로 하는 자연이 단순한 산수 경관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로 서의 자연이다. 당연히 도시로서의 자연에 상응되는 방법의 창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바라보는 자연은 종래의 일반적인 경관이 아니라 첩첩이 쌓이는 입체적인 공간이다. 여기에 작가 특유 공간의 미학이 탄생한다. 이른바 <겹의 미학>이다.
“인생은 하루하루의 겹, 천지자연도 겹, 우리의 마음도 겹, 가르침도 겹, 배움도 겹, 너도 겹, 나도 겹, 겹과 겹이 만나 태어나는 겹”
겹이란 겹침의 경지, 연결에서 일어나는 상황으로서의 특징을 지니면서 거대한 공간을 창출한다. 인간도 모든 사물도 이 거대한 겹침의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겹침은 쌓이면서 깊이를 만들고 퍼져나가면서 넓이를 만든다. 작가가 구현하는 화면은 종내에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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