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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미 展
얼마나 많은 이명미가 필요한가

우손갤러리 서울
2026. 3. 5(목) ▶ 2026. 5. 9(토)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잠로2나길 9
www.woosongallery.com

(하나의 평면을 완결하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명미가 필요한가.
이 기이한 물음은 우리가 이명미의 한없이 명랑하고도 생경한 작업 세계로 진입할 무렵 겪는 현기증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한 나침반이다. 이 질문이 기이한 이유는 그 물음이 근대 미학이 떠받들어 온 유일한 저자라는 신화의 환영을 허물기 때문이다. 작품의 의미를 물을 때 우리는 그 의미를 부여한 주체가 하나임을 가정하고, 작품의 양식을 물을 때 우리는 그 양식을 선택한 의지가 하나임을 가정한다. 그러나 이명미의 화면 앞에서 이 가정은 힘을 잃는다. 한 평면 안에 공존하는 요소를 하나의 의지로 묶어 설명하려는 순간, 이 화면은 곧 자기 부정의 논리로 기울기 때문이다. 화면 위에서는 세우기와 무너뜨리기가 격렬히 공존하고, 가득함과 모자람이 같은 표면 위에 머무르며, 진지함과 가벼움이 서로를 삼키지 않은 채 나란히 놓인다. 이 낯선 조화를 한 사람의 뛰어난 다능으로 봉합하면 편해지지만, 그 편안함은 화면 내부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길항(拮抗)을 은폐하는 편의적 해석에 불과하기에 우리는 이를 경계한다.
물감과 바탕이 맞닿는 표면은 그 분열의 다툼이 벌어지는 가장 생생한 격전장이다. 재현의 의무에서 이탈한 거친 색면이 자유로이 영역을 넓히고, 망막으로 즐기는 감상을 방해하고 기어이 읽기를 갈구하는 일상의 문자와 기호들이 난입한다. 형태의 균형을 정성스럽게 쌓아 올리던 색칠은 무심하게 휘갈겨진 낙서 한 줄에 의해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서로 다른 재료를 이어 붙이거나 포갠 흔적은 화면을 평평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회화의 완고한 규범을 가만히 무너뜨린다. 여기서 조화는 파괴되고 그 자리에 생동하는 불협화음이 들어앉는다. 1970년대 한국 화단이 무채색의 비움과 고요한 수행으로 침잠할 무렵, 그는 그 단정하고 엄숙한 흐름에 머무르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비워냄을 통한 깨달음을 구하는 대신, 시끄러운 원색의 파동과 다듬어지지 않은 일상의 파편들을 화면 한가운데로 기꺼이 끌어안으며 수많은 목소리가 들끓는 과잉의 공간을 캔버스 위에 활짝 열어둔 셈이다.
이 다툼의 틈에서 작가가 온몸으로 통과해 온 짙은 생의 심연이 드러난다. 그가 묵묵히 걸어온 길고 지난한 삶의 궤적은 결코 매끄럽고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화면 이면에는 예고도 기다림도 허락하지 않고 들이닥친 가파른 삶의 굴곡들과, 감당하기 벅찬 서늘한 상실의 감각, 그리고 육신이 지닌 연약함에 대한 아픈 공포가 짙게 배어 있다. 상처받은 기억들은 안료의 두께와 기워 놓은 천의 경계 사이에 무겁게 침전한다. 고통을 묵묵히 이겨낸 과거의 수많은 자아와 현재 물감을 쥐어 짜며 화면을 마주하는 현재의 자아가 시간의 위계를 지우고 단 하나의 평면 위에서 충돌한다. 수많은 이명미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발화하는 화면 앞에서 관람자 역시 단일하게 남을 수 없다. 보는 나. 읽는 나. 해석하는 나. 판단하는 나. 결국 하나의 평면을 완결하기 위해 필요한 이명미의 수를 묻는 행위는, 그 압도적인 복수성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 내부에 얼마나 많은 나를 소환해야 하는지를 묻는 성찰로 회귀한다.

이 많은 이명미들 사이에 위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문자의 이명미가 색면의 이명미보다 똑똑하지 않다. 구축하는 이명미가 교란하는 이명미보다 진정하지 않다. 명랑한 이명미가 상처 입은 이명미보다 가볍지 않다. 대개 예술가는 완성 선언 이전에 내면의 갈등을 해결해 놓는다. 그들은 양립 불가능한 충동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억압하여 화면의 통일을 확보한다. 완성된 작품은 갈등의 산물이되 갈등 자체를 보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명미는 갈등을 해소하지 않는다. 양립 불가능한 충동이 모두 화면에 남는다. 조각난 자아들은 화해를 거부한 채 각자의 야성을 드러낸다. 이 방기가 이명미의 가장 단호한 결단이다.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일.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의 에너지는 사라지지만, 모두를 보존하면 에너지들이 충돌하며 화면의 총량은 각 요소의 합 이상으로 증폭한다. 반세기가 지나도 화면이 고요로 수렴하지 않는 이유는 이 에너지의 초과분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다시 본래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하나의 평면을 완결하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명미가 필요한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명쾌한 수로 수렴하지 않는다. 기법의 차이에서 출현하는 이명미들이 있고, 시간의 분열에서 출현하는 이명미들이 있으며, 감정의 배분에서 출현하는 이명미들이 있다. 캔버스 속 복수 주체들의 경합은 종결되지 않으며 화면은 일시 정지될 뿐 끝나지 않는다. 완결이란 화면 위에서 다투는 모든 이명미가 동시에 만족하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그 상태는 논리상 도래할 수 없다. 전시장에 배열된 작품들은 역시 안온한 결론을 내어주지 않는다. 각각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합이며,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또 하나의 경합이 일어난다. 각각의 화면은 독립된 단위이면서도 서로의 존재 조건을 끊임없이 뒤흔들며 관람자의 단일한 시선이 전시의 공간을 장악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도무지 화해할 수 없는 복수의 힘과 육중한 생의 무게가 위태롭게 공존하는 이 전시장은 치열한 유예가 잠시 굳은 자리이자, 다음 충돌을 예비하며 활짝 열린 역동의 장(場)이다.
작가 자신에게조차 끝내 단일한 해답으로 귀결되지 않을 이 미지의 상태는 오히려 단 하나의 확신만을 남긴다. 이명미가 살아 그림을 그리는 한, 이 평면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이명미의 수는 결코 하나로 닫히지 않을 미결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최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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