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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정 展
Weather Becoming

PIPE GALLERY
2026. 1. 20(화) ▶ 2026. 2. 14(토)
서울특별시 용산구 대사관로 21 2F-3F
www.instagram.com/pipe_gallery

Weather Becoming
박가희(큐레이터)
어떤 감정은 형태를 갖지 않은 채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색이 되고, 표면의 얇은 진동이 되며, 다시 생체적 이미지의 흔적으로 스며든다. 박은정의 회화는 바로 그 지점, 감정과 감각이 서로를 가리키며 변이하는 순간들을 담은 시각적 의식(ritual)에 가깝다. 정서가 몸을 움직이고, 몸이 물질을 흔들며, 물질의 변화가 다시 정서의 층위를 만들어내는 순환적 장면들이 캔버스 위에서 느린 호흡으로 드러난다.
작가가 말하듯, 그의 회화는 “정서를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한 감정을 재현하거나 서사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가 가진 불안정한 구조 자체를 겹치기, 흔들림, 번짐, 파편화와 같이 색과 표면의 물질성을 통해 탐구하는 방식이다. 반복적으로 쌓이고 지워진 물감의 피부(layer)는 감정의 리듬이 침전된 지층처럼 보이며,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형태나 기호가 떠오른다. 이러한 우연과 발견의 순간이 화면을 이끌어가는 방식은 박은정 회화의 핵심이다. 형태는 목적지가 아니라 감각적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등장한다.
이 감각의 토대에는 작가의 이동과 이주 경험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2013년 미국으로의 이주는 정서와 신체, 시간과 장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배열했다. 매년 반복되는 장거리 이동과 13시간의 시차는 시간 감각을 흔들고, 빛과 대기의 변화를 극적으로 경험하게 했다. 새벽 두세 시의 불완전한 각성과 그 시간대에만 존재하는 색의 스펙트럼, 시차로 인해 해체되는 내적 리듬, 이 모든 감각적 사건들은 작가의 회화 속 색채로 침전되었다. 이전 작업에서 시차가 하나의 은유적 장치로 있었다면, 최근의 작업에서 그것은 더 추상화된 감정의 조건, 즉 ‘날씨(weather)’라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박은정이 사용하는 ‘날씨(weather)’라는 말은 단순한 기상 현상을 넘어선다. 그것은 신체와 정서, 환경적 요인들이 결합된 상태이며, 변화의 조건으로 작동하는 감정의 기후다. 순간의 공기감이 날씨를 형성하듯, 정서 역시 존재를 둘러싼 감각적 대기를 만들어낸다. 박은정의 회화는 바로 이 “정서적 기후”의 시각적 번역이다. 화면은 하나의 작은 생태계처럼 작동하며, 감정의 흐름이 색과 형태로 침착되었다가 다시 녹아나고, 때로는 생물학적 파편이나 원소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여기에서의 파편화된 신체는 특정한 이야기를 담기보다, 감정이 스스로의 몸을 만들어내고 해체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어떤 이미지는 멀리서 떠오르는 기원적 상징의 잔향(<The Interior Horizon (내부의 지평)>, <Ash Meadow (재의 초원)>, 2025)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형상은 감정의 압력에 밀려 신체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의 미세한 흔들림(<Descent into Light (빛으로의 하강)>, 2025)을 품는다.

작가의 출산 경험은 이러한 세계를 한층 더 확장했다. 출산은 그에게 신체의 경계를 재정의하는 사건이었고, 몸이 존재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흐르는 상태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자각하게 했다. 비슷한 시기에 접한 조선의 무가, 특히 출산무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 숨, 빛은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회화 안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었다. 작가가 쓴 문장, “문이 열리고 새 숨이 이 세상으로 지나오니, 피의 문을 지나 첫 울음이 길을 찾는다”는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열림과 순환, 생성의 감각을 예감하게 한다. 출산 이후 박은정의 회화는 신체가 더욱 조각나고 원소적으로 변하며, 육체적 경험의 순간들이 색과 리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감각적 형식(<Echo in the Mist(안개의 메아리)>, 2025, <Conversation in Water(물속의 대화)>, 2025)으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감각의 변화는 사실 작가의 이전 작업들에서도 다른 조형 언어로 존재해 왔다. 초기 설치작업에서 선반을 한 층 더 올려놓아 사물의 기능을 유예시키던 제스처(<Shelf of Shelves> 연작, 2015)는 지금의 회화에서도 형태가 즉각적으로 의미를 획득하지 않도록 시간을 지연시키는 전략으로 이어진다. 공간 속 오브제의 위치를 흔들며 “정의 내림”을 미루던 태도는, 회화에서 색의 흐름과 형태의 출현을 유예하는 방식으로 변환된다. 발뒷꿈치와 치아의 형태를 결합한 형태 ‘힐투스(Heeltooth)’에서 파생된 일련의 작품들(<Torso and Fire>, <Heeeeeeeeel>, 2016 등)은 결합적·생물학적 형상의 실험 역시, 신체를 단위화하고 재조합하던 조각적 사고가 화면 속에서 색과 기호의 움직임으로 전환된 사례다. 이처럼 과거의 실천들은 박은정 회화의 핵심 원리, 형태가 아닌 ‘상태’, 고정이 아닌 ‘변이’, 명명이 아닌 ‘열림’으로 드러나며, 현재의 감정적 기후를 다루는 회화적 세계에 잔향처럼 남아 있다.
박은정에게 회화는 계획을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변화하는 정서와 감각을 방향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캔버스 앞에 서면 형태보다 색이 먼저 떠오르고, 그 과정 속에서 우연한 얼룩이 발견의 계기가 되며, 드로잉은 일기처럼 무의식의 흐름을 담는 예비적 층위가 된다. 화면 위에서 색이 번지고 스며들어 하나의 상태를 만들고, 그 상태가 형태의 가능성을 열면 그는 그 흐름을 따라가거나 밀어낸다. 화면은 기후처럼 변화하고, 감정은 흐름 속에서 스스로의 몸을 조직하며, 이미지들은 서로의 경계를 넘어가 다른 상태로 변형된다. 이 모든 장면은 서로 다른 작업군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한 정서적 기후 안에서 서로 다른 압력과 온도를 가진 표면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Weather Becoming》은 단순히 추상적 감정의 풍경을 그리는 전시가 아니다. 정서·기억·신체·환경이 서로 얽히고 해체되며 다시 새롭게 결합하는 과정, 즉 ‘상태로서의 존재’를 시각화하는 회화적 사유에 가깝다. 화면은 서사적 재현이라기보다, 존재가 새로운 기후를 통과할 때 발생하는 미세한 감각의 떨림을 드러낸다. 정서가 몸이 되고, 몸이 색이 되고, 색이 다시 풍경으로 번졌다가 감정의 대기로 환원되는 흐름은 그의 회화 전체를 관통하는 순환의 리듬이다. 결국 박은정의 회화는 정서의 기후를 그리는 일이다. 관객이 이 작업들 앞에서 오래된 기억의 어떤 층위가 흔들리거나, 낯선 정서의 기류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느낀다면, 바로 그 감각이 이 회화가 열어 보이고자 하는 세계이자 회화의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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