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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展
The Ship of Fools

Butcher Shop (Shadow) 2025_oil on linen_36x28x3.5cm
P21
2025. 11. 15(토) ▶ 2025. 12. 24(수)
서울특별시 용산구 회나무로 66 | T.02-790-5503
https://p21.kr

Me, first! 2025_oil on linen_28x36x3.5cm
P21은 2025년의 마지막 전시로, 11월15일부터 12월24일까지 서안나의 개인전 The Ship of Fools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작가 서안나(Anna Jung Seo)가 지난 수년간 탐구해온 삶의 불확실성과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담은 회화 20점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 The Ship of Fools는 1500년경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가 그린 동명의 작품에서 가져왔지만, 서안나는 보쉬가 전달했던 중세적 도덕 교훈이나 종교적 풍자가 아닌, 현대 사회 속에서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바다를 항해하는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삶의 방향을 확신할 수 없는 시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더 많은 정보를 얻을수록 오히려 불안해지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작가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 ‘바보스러움(Foolishness)’을 응시한다.
서안나는 오래전부터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토록 열심히 살아가려 하는가’, ‘불확실한 삶에 대한 집착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같은 질문을 예술의 언어로 탐구해왔다. 일상에서 마주한 순간의 장면과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주변 환경 속에서 느껴지는 생경함, 그리고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2011)』 속 한 문장에서 다시 일깨워진 어린 시절의 불안한 감각은 작가의 내면을 흔들며 작업의 씨앗이 되었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작가는 자신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존재론적 고독과 생의 질문을 확인했고, 이러한 인식은 작품 속 장면들을 지탱하는 정서적 기반이 되었다.
이는 단지 ‘시장’이라는 구체적 장소의 묘사가 아니라, 생존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능적 에너지인 욕망, 경쟁, 고독, 체념을 은유하는 무대로 작동한다. 'Me, First!', 'Obsession', '"Have a look" Prince' 등의 작품에서 보이듯, 시장의 일상적 행위는 욕망과 결핍이 교차하는 삶의 상징으로 변환된다. 또한 정육점과 생선가게를 관찰하며 시작된 'Butcher shop', 'Fishmonger', 같은 작품들은 생명과 죽음, 소비와 소멸이 공존하는 인간사의 아이러니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작가의 시선은 보다 내밀한 감정의 영역으로 향한다. 'Farewell 2'는 한강의 단편 『작별(2018)』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작품으로, 사랑과 신뢰, 그리고 관계의 마지막 순간을 탐구한다. 소설 속 주인공 여자가 결국 눈사람으로 변해 녹아 내리며 존재와 소멸에 대하여 성찰하는 이야기로, 달빛 아래 침대에 함께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은 인간 사이의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한계를 은밀하게 드러낸다. '사랑한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디 까지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라는 작가의 오래된 질문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The Ship of Fools 2025_oil on paper on board_27.5x22x4cm
이어지는 'Miss Harriet'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소설 『미스 해리엇(Miss Harriet, 1883)』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프랑스 시골 여인숙의 외로운 노처녀가 젊은 화가에게 품은 감정과 그 파국을 그린 이 작품에서, 작가는 사회적 규범 바깥에 존재하는 감정의 진폭과 인간의 고독을 응시한다. 화면 속 석양은 실제 풍경이라기 보다는, 미스 해리엇이 마지막으로 마주한 내면의 바다이자 사랑의 잔광이다. 작가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격렬함을 붉은 빛과 거친 붓 터치로 표현하며, 인간의 감정적 어리석음을 포착한다.
서안나의 회화는 ‘이해’보다 ‘감각’의 영역에 더 가깝다. 그는 예측할 수 없는 붓의 움직임과 우연적 색의 충돌을 통해 감정의 미묘한 울림을 시각화 하며, 화면 위의 흔적들은 생각하고 느끼는 과정 그 자체로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예술의 본질로 받아들인다. 작업을 시작할 때 명확한 계획보다 감정의 순간적 폭발과 직관에 의존하는데, 붓질이 쌓이고 겹쳐지는 과정 속에서 화면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며 작가는 그 변화에 응답한다. 마치 바다 위를 항해하는 선원처럼 끊임없이 방향을 수정하고 균형을 잡으며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간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은 이전보다 한층 내밀하고 사유적이다. 일상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자세나 문학 속 이미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포착한 감정의 순간들이 캔버스 위에 펼쳐진다. 작은 화면 안에 한순간의 기억과 감각을 압축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장면 안의 공기를 느끼게 한다. 인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 존재의 온도와 리듬을 떠올리며, 작가의 회화는 거대한 서사 대신 우리가 놓치고 지나가는 미묘한 찰나, 낯설지만 친숙한 일상을 담아낸다.
작가에게 ‘바보’란 단순히 세상에 뒤처진 존재가 아니라, 계산과 효율의 세계에서 여전히 감정과 사유의 온도를 지켜내려는 자의 다른 이름이다. 예측 불가능한 삶의 파도를 마주하며, 통제 불가능한 감정과 우연의 흐름 속에서 회화가 어떻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완결된 해답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감내하며 스스로를 갱신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그 여정 속에서 두려움과 경이로움, 무력함과 생의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며, 결국 그 모순된 감정의 진동을 통해 ‘살아 있음’의 실감을 새롭게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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