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아나 展

 

부서진 채로 존재하는 법

 

 

 

에이라운지

 

2025. 5. 24(토) ▶ 2025. 6. 14(토)

서울특별시 종로구 백석동1가길 45, 2층

 

https://a-lounge.kr

 

 

 

 

부서진 채로 존재하는 법

 

독립기획자 방예니

 

모든 것이 제 기능을 다하고, 쓸모를 잃었다고 여겨지는 순간 비로소 그것의 본질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김지아나의 이번 작업은 그 소진 이후의 잔광(殘光)과 기능을 잃은 것들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오랜 시간 동안 쓰여진 후 닳아서 바래지고, 버려진 재료에 다시 손을 얹는다. 기억에서 밀려난 사물들과 사라져 버린 구조물의 흔적을 살피고, 만지고, 껴안으며 그 속에 깃든 감정과 결핍의 형상을 하나씩 꺼내어 공간에 배치한다. 그 결과물은 매끄럽지 않고, 완고하지 않으며, 끝을 맺기보단 열린 채 머문다. 오히려 불균형을 수용하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응하는 유기적 조형으로 존재한다.

작품이 전달하려는 의미를 해석하려 하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어떤 속도로 머무는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표면에는 시간을 지나온 감정들이 조용히 스며있고, 때로는 한없이 여린 결합, 때로는 불안한 침묵으로 다가오기에, 관람자는 각자의 리듬으로 바라보고 감각하며 그 앞에 조용히 머문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질적인 재료들이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자아의 균열된 흔적과, 그 위로 조심스럽게 이어지는 섬세한 흐름이다. 이번 작업에 사용된 금속 구조물은, 오랜 시간 에너지를 순환시키며 공간을 데웠던 산업용 열 교환기다. 지금은 기능을 멈추고 닳아있는 그것은 뜨거움과 차가움, 흐름과 멈춤, 작동과 정지의 상반된 상태들이 교차했던 장소이며,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흔적을 간직한 신체이자, 감정과 기억이 흐르던 내면의 구조처럼 작가에게 다가왔다. 거기에 구부리고 두드리는 물리적 개입을 통해, 시간의 자국 위에 감각의 결을 새겼다. 낡은 세월의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금속과 포슬린 조각들이 얽히며, 서로 다른 물성이 마치 한 인물 안에 공존하는 여러 자아처럼 불안하지만 조화롭게 놓인다. 그 경계는 뚜렷하지 않고, 무게는 고르지 않지만, 이 조각들은 단순히 다른 물성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이 교차하며 만들어 낸 유동적인 긴장을 보여준다.

 

 

 

 

부드러운 포슬린은 외부로 드러난 자아의 외피 같고, 무거운 금속은 내면 깊숙이 침전된 억압된 기억, 말해지지 못한 자아의 잔재처럼 서로를 감싼다. 그 결합은 억지로 균형을 이루려 하지 않고, 완결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이 불안정한 조우를 통해 결함이 아닌 생성의 흔적, 전이의 가능성을 제안하고, 끊임없이 흔들리고 재구성되는 존재의 다양한 얼굴을 드러낸다. 이는 새로운 형태를 요구하지 않고 다만 감정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공간, 전이의 시간을 허락할 뿐이다.

<부서진 채로 존재하는 법>은 단순히 재료를 엮고 형태를 구성하는 과정을 넘어서, 분열과 충동, 흔들림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감각과 언어가 생성되는지를 탐구하는 여정이다. 그것은 버려진 것과 깨어진 것, 잊혀진 감각의 잔재를 포용하며, 끝이라고 여겨진 자리에서조차 잠들어 있던 감정이 다시 숨을 쉬게 되는 시간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녀의 작업은 그 여백을 제시할 뿐이다. 그리고 그 여백은, 때로는 가장 사적인 질문을 품은 채, 우리에게로 천천히 돌아온다.

최근 사회는 정체성과 자아에 대해 단선적인 정의를 거두고, 보다 다층적인 존재 방식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나의 캐릭터, 정해진 직업, 단편적인 서사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김지아나의 작업은 이러한 시대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부서지고, 흩어지고, 겹쳐지는 수많은 조각들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다중적인 얼굴을 발견하고, 그 틈 속에서 비로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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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50524-김지아나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