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박경률 展
날마다 기쁘고 좋은 날
페리지갤러리
2025. 3. 7(금) ▶ 2025. 4. 26(토)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18 지하1층
생활, 날마다 기쁘고 좋은 날 전시 전경, 2025
그저 그리다
신승오(페리지갤러리 디렉터)
박경률은 회화의 역사를 통해 구축되어 온 방법론을 되짚어보면서 ‘무엇이 회화가 되는가?’ 라는 화두를 바탕으로 작업을 해왔다. 그것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으면서 본인에게 흡수되어 체화된 방식을 하나씩 들추어내어 무의식적으로 대상을 재현하거나 화면을 소위 조화롭게 구성하는 방식, 작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펼쳐지는 서사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려는 태도이다. 여기에 더해 작가의 붓질, 물감이 가진 물성, 이를 지지하는 천에 이르는 재료를 통해 나타나는 회화에서 하나의 사물과 같은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3점의 작품 모두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날마다 기쁘고 좋은 날》은 지금까지 그가 순차적으로 진행해 온 실험을 하나로 모아 ‘그리기’ 그 자체에 집중해 보는 전시로 볼 수 있다.
생활, 날마다 기쁘고 좋은 날 전시 전경, 2025
다른 <생활>의 화면에도 분명한 지향점이 있어 보이나 그것의 결과물은 불명확한 채로 표현된다. 이는 고정된 완성인 그림이 아니라 ‘그리기’라는 행위를 바탕으로 하는 유동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작가에 의하면 작품의 제목인 ‘생활(生活)’에서 ‘생’은 그리기를 통해 무엇인가를 생성하게 하고 ‘활’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집중하고 있는 그리는 행위는 ‘활’이 가진 끊임없는 유동성에 대한 관심이다. 과연 회화는 작가의 의도대로 완성을 계속 유보하는 유동적 상태로 남겨질 수 있을까? 그리고 이를 통해 무엇을 획득할 수 있을까? 다시 그림을 살펴보자. 그림 안에서 그의 움직임은 확장되다 막히고, 다시 우회로를 찾고, 미궁에 빠지다가 어딘가로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빈 화면에 개입하여 그리는 동안 모든 것이 이어져 붓끝에 전달되어 생성되는 것을 어떻게 화면에 최대한 남길 수 있는지이다. 그것은 어떤 고정된 의미도 담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붓질에서 다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는 점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온한 조화이거나 혼란스러운 부조화로 나타날지 예측하기 힘든 개별적인 존재의 모습만을 남기게 된다. 그렇다면 그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회화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펼쳐지는 그리는 행위는 어떤 구체적 서사가 아니라 물질과 감각이 하나 된 혼합체가 아닐까? 물론 누군가는 화면에는 작가의 경험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명확한 형상이 분명 존재한다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상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다시 말해 어떤 삶을 경험한 목격자이자 그것을 기록하여 들려주는 역할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작가는 그리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나타나는 모든 것을 생략하거나 누락시키지 않고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고스란히 남기는 행위자가 되고자 한다. 그렇기에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형태를 가지든 추상적인 움직임으로 남든 혹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작가에게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그에게 그린다는 것의 유동성은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형용할 수 없는 무형의 것을 시각적으로 물질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 날마다 기쁘고 좋은 날 전시 전경, 2025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작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물론 우리는 결과론적으로 그의 그림을 보면서 연상할 수 있는 것을 도구로 사용해 관습적으로 그것을 읽어내려 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마주치는 여러 요소에 직접적으로 접촉하거나, 눈으로 보거나 냄새만 맡거나, 스쳐 지나가거나 어떤 지표가 되는 것에서 기인한 무엇인가가 드러나는 것으로 상상해 보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행위로 나타나는 점, 선, 면 그리고 색은 무의미한 것으로 아무것도 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어디론가 이어져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매개체도 아니고, 우리가 분명 도달해야 할 목적지도 아니다. 그에게 한 개인으로서 경험하는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하다. 작가는 계속되는 변화의 시간을 마주하여 그것을 자신의 회화에 붙잡아 다시 새롭게 복원해 내는 활동만 남기려 한다. 왜 그는 그것을 그토록 붙잡아 놓으려 하는가? 우리에겐 지나간 것과 다가오는 것이 만날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하며, 그 위에 자신의 개별적 삶에 기인하지만, 그것에서 한참 벗어난 별개의 세상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의 작업과 같이 무작위적인 것 같지만, 차곡차곡 쌓여 나가고 있으며, 이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시간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있는 그대로의 것을 억지로 조화롭게 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을 외면하지 않고, 흐름을 따라 고스란히 그 안에 스며들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작가가 사실상 영원히 도달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회화를 온전히 따라가는 것은 모호함이 가득 찬 시공간을 마주하는 혼란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는 것은 그것의 물성, 색, 질감, 움직임, 형태, 맥락, 구성과 같은 나열된 형상의 밖을 둘러싸고 있는 표면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요소들이 연결된 하나의 통합적 대상과 이들과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개별적 대상을 동시에 인식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박경률의 화면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의 그림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한자리에 옮겨지면서 일어나는 접촉과 마찰의 결과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거대한 것에서부터 작은 것, 가느다랗고 얇은 것에서 두꺼운 것, 직선적인 것에서부터 곡선적인 것까지 하나도 지루할 틈 없는 붓질의 시간은 그저 존재의 한 조각으로 남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작가의 의도를 가진 본능적 붓질로 남겨진 존재 하나를 인식하게 되면, 갑자기 선명하게 눈 앞에 펼쳐지게 된다.
생활(부분), 날마다 기쁘고 좋은 날 전시 전경, 2025
|
||
|
||
* 전시메일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은 작가와 필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 vol.20250307-박경률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