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호 展

 

나의 자리 My Place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2023. 4. 3(월) ▶ 2023. 5. 20(토)

경기도 부천시 조마루로 105번길 8-73 (상동) | T.032-666-5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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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하는 자리의 회화
- 유기호 개인전 《나의 자리》에 부쳐

 

오정은(미술비평)

 

우리가 그림을 볼 때, 그것은 대개가 과거의 것이다. 우주의 어느 공간에서 빅뱅이 출연해 별이 생긴 것이라면, 그림은 빈 화면 어느 곳에서 점이나 선으로 시작된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무수한 명암과 색으로 덥히고 칠해져 마지막에 결정된 회화 작품으로 현전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태초에 이미지가 시작된, 빅뱅의 순간은 볼 수 없다. 그림은 이미 완성된 별이다.

여러 개의 행성이 모여 소우주를 이루듯이, 여러 점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유기호(b.1966)작가의 작업 세계를 본다. 완성된 별의 어느 것은 몇 개의 위성을 가진 것처럼 연작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고, 또 다른 어느 것은 묵직한 질량의 행성처럼 자기 완결성을 갖고 자전하듯 보인다. 그리고 서로를 인력으로 잡아당기듯, 그림과 그림 사이 부여된 유사 질서가 작가의 언어를 보다 구체적인 술어로 만들고 있음을 본다. 파동이랄까, 전기장이랄까 싶은 에너지가 별의 표면을 훑고 허공의 전시장을 지나 유기호라는 작가 성(性)에 부딪힌다. 시간을 역행해 그림의 형상과 두께를 벗겨, 완성 이전에 투명한 분자 상태이거나 기운의 형질로 존재했을 작가의 의도에 말이다.

그것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생산적이고 지속적으로 분출되는 것이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그림을 볼 때 과거에 작가 작업실에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고, 이제는 작품의 물성으로 다 표출된 것이라 추정하는 그것. 작가 자신에게는 지속적인 창작으로 삶을 이뤄나가게 하는 것.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작업 행위의 동시성과 지속성. 유기호의 작업 세계에서는 그것이 무엇보다 월등히 주요한 힘인 듯싶다.

 

 

 

 

“그림이란 아직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내 안의 무서운 적이자 동지다.”
- 유기호 작가노트(1997. 4. 26.)에서 발췌 -


유기호는, 마흔 살 이후부터는 존재하지 않을 사주를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신장 이식과 반복적 투석을 겪고 ‘살아있음’이 기적이라는 운명. 그런 작가가 최근 그린 회화는 세상에 드러나 어느 자리를 차지하며 알려질 것을 예정했었을까. 어쨌든 그 안에는 작가의 사실적 자화상을 비롯해, 표현주의 화법으로 그려진 거친 자아의 이미지, ‘생각하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는 남성, 고개를 푹 숙인 다소 나약해 보이는 인물, 주인 없는 빈 의자가 구획한 공간 등이 자리를 각각 잡고 있다. 질감과 이목구비를 상실한 미()존재에서부터 세부적으로 묘사된 구체성의 인물까지 양쪽 모두를 오가고 반복하면서, 작가는 자기 화풍과 예술가로서의 길을 만들어 간다. 보다 정확하게는, 용해하여 지우는 동시에 새로이 다져 간다. 단번에 확증되기를 부정하고, 거친 상흔이었다가 정제된 표피였다가, 재현 매체로서의 사실성과 환상성을 오간다. 작가 본인이 투석 받는 장면을 그린 유화 <정화>(2022)를 보자. 이런 병치레와 치료 중의 모습은 여타의 다른 그림에서도 나타나기 빈번하지만, 모두 조금씩 다른 재료와 필압으로 묘사돼 있다. 자기 안의 것을 지우고 새것을 다시 받아들이는 순환의 과정은 작가에게 일상인 한편, 그 자체가 하나의 작업적 특징이 된다.

1994년 홍익대 미대 졸업 후, 2017년 첫 개인전 개최 때까지 미술계에서 사라져 있었던 시간의 공백을 그는 숱한 드로잉과 메모로 채우고 있었다. 생계를 앞세워 택했었던 일-홍대 앞 주막 ‘검정고무신’ 운영-을 접고 비로소 늦깎이 전업 작가가 된 지금은 누구보다 충실하게 자기 고민에 임하고 있다. 거울에 비친 외피를 모델로 하고, 껍질 벗은 내면의 실존을 모델로도 했다가, 투사된 타자의 고독을 그려 넣기도 하고<화이트 칼라>(2021-2023), 유령처럼 쓸쓸히 사라져간 허망한 사람들의 실루엣을 화면 가득 그려 넣기도 했다<이태원 10.29>(2022). 이젤 앞에서 목이 거의 수직으로 꺾인 채 고뇌하고, 이를 악다물고 뇌리의 무엇과 씨름하는 화가의 모습이 유기호의 드로잉 수첩에서 이따금씩 보인다. 그는 또, 자신의 경험을 재료로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상태를 그려내곤 한다. 술에 취해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반쯤 잠든 것 같이 보이는 중년 남성 <낮술>(2023), <친구의 술버릇>(2020), 이쪽의 응시자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휴대폰을 보는 여인 <현대여성>(2023), 모두 일상에서 쉽게 관찰되는 삶의 한 가지 모습이자 소외된 인간의 심리가 감각되는 초상이다. 신작 <고등어 손질>(2023)과 <미열>(2023)은 특유의 가라앉은 톤을 유지하면서 회화 내부의 알레고리를 만들어 가려는 듯 서사적인 배경과 함께 인물이 하나 혹은 둘 그려져 있다. 거기에 뇌 깔린 우울의 정서, 세잔(Paul Cézanne)의 회화처럼 푸른 색조에 물든 비인간적인 표상은 무의식의 깊이와 죽음의 도상을 연상시킨다. 술판을 벌여 왁자지껄 떠들고 놀고 있는 일곱 명의 인물이 그려진 그림 <위로주>(2021)는 그 활기 있는 장면의 참여자들을 해골로 그려 넣어 삶과 죽음의 혼성 경계를 보다 노골적으로 표시해두고 있다.

 

 

 

 

작가의 그림 중 <손님>(2022)에는 뼈대 없는 실루엣으로 처리된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소진되어 녹아내린 듯 바닥에 웅크려 앉아있는 작가의 자아, 그리고 고개 숙여 그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내면의 그림자. 서로를 감시하고, 동정하고, 자책하며 생성된 듯한 모종의 긴장감이 배경의 낮은 채도 속에 녹진하게 혼합돼 있다. 자괴와 자학으로 물들어있는 그들 사이, 제3의 존재가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등장해 진입하려는 모습도 있다. 제목에서 지칭한 ‘손님’이자, 외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고, 작가 심중에 일고 있는 모종의 책무의식을 기호화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이들 셋의 관계성은 <자가 검열>(2022)에서도 반복되고, <아내는 새를 죽였다>(2022)나 <위로>(2022), <마침내 죽였다>(2022)에서와 같이 죽은 새와 사람의 도상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이들은 민중미술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한 시대가 가고, 홍대를 중심으로 퍼졌던 90년대 대중문화 홍수 이후, 그들 미술의 정신 혹은 잔해가 일부 살아남거나 변형·유지되고 있는 요즘까지 겹겹으로 쌓아 숨겨놓고 유예해왔던 어떤 의식의 잠재된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있음’이 기적이라는 말은 그들 신호에 응답해 십수 년만에 깨어난, 지금 작업에도 해당될 여지가 있다. 유기호는 자신의 껍질에 얽혔던 지난한 시대정신과 내면에 눌러왔던 미술의 욕망을 걸러내 부활시키고, 청산하고, 재정비하는 입장에 있다.

긴 공전 궤도를 돌아 지금에 맞닿은 작업이 회화의 여러 기법을 혼용하며 생존을 도모한다. 이 속도감 있는 이미지 출력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지금은 다만, 재생 후 한창 분출하기 시작한 예술가의 세상을 목도하게 될 뿐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때로는 죽었던 것들을 그림으로 구체화해 유기호라는 이름을 존재하게 한다. 필생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외톨이가 된 다리가 세 개 달린 새는 다른 새는 오르지 못하는 높이의 창공으로 올라가 날개짓을 멈추고 아래로 추락하여 목이 부러지고 날개가 꺽여 피를 쏟고 죽어버렸다.
- 유기호 작가노트(2022. 5. 31.)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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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30403-유기호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