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Trace 展

 

김현식, 신미경

 

 

 

갤러리 JJ

 

2022. 2. 17(목) ▶ 2022. 4. 16(토)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로 745 | T.02-322-3979

 

https://www.galleryjj.org

 

 

신미경作_Abstract Matter 009_Jesmonite_88x60x6cm_2020

 

 

오늘날 우리는 자연이나 물질적 환경에 놓여있기보다 첨단 기술과 소비문화에 의한 ‘이미지’의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실제적인 감각마저 잠식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갤러리JJ는 어떠한 인위적이고 표면적인 그리기나 만들기보다 물질적 질료와 시공간의 세계로 이행하는 근원적 시도에 주목한다.
갤러리JJ는 2022년 새해 첫 전시로 회화 작가 김현식과 조각가 신미경이 함께하는 전시를 마련하였다. 두 작가는 특히 작업의 근간을 이루는 고유의 질료에 대한 끈질긴 탐구와 수행적 태도를 같이하며 매체적 관습이나 일상과 예술, 동서양, 시공간의 경계 위에서 사유한다. 이번 《흔적 Trace: 김현식, 신미경》 전시는 각기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 작가가 벌이는 다양하고 독창적인 매체 방식이 눈길을 끈다. 김현식의 입체적인 회화 신작, 그리고 신미경이 2021년에 발표했던 최근작 ‘제스모나이트(Jesmonite)’ 매체 작업을 신작이 포함된 ‘비누’ 작업과 함께 재구성하여 소개하면서, 전시는 또한 회화와 조각이라는 오래된 관념적 범주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신작을 중심으로 묵직한 두 작가의 작업이 한 공간에서 빚어내는 색다른 변주는 무척 기대되는 일이다.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영국박물관 등 유럽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하며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신미경은 25년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조각의 재료가 아닌 ‘비누’라는 매체적 특성을 통해 시간성을 가시화하여 시공간적 문화, 재료 간의 ‘번역’에서 오는 간극, 차이를 끄집어낸다. 최근 조각적 재료인 제스모나이트를 매체로 하는 작업으로 다시 한번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2017년부터 세라믹과 유리 분야도 석사학위를 받으면서 동반해왔으며, 현재 네덜란드 프린세스호프국립도자박물관에서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거석 시리즈’는 세라믹을 재료로 한다. 신미경의 작업이 물질로부터 일련의 견고하고 불변할 것 같은 절대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해체한다면, 김현식은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여 변하지 않는 본질, 절대 공간을 추구하면서 명상적이고 시적 세계로 인도한다. 김현식 역시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회화 평면과 에폭시 레진(Epoxy-resin)의 물성을 연구하고 그 투명한 물성을 통해 평면 속에 고요하면서도 빛과 기운이 충만한 깊은 공간을 담아내는 독보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하여 현재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무수한 차이들의 흔적과 정지된 시간 속 침묵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감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빛의 울림과 에너지를 전해준다.

 

 

신미경作_Petrified Time series 003_Soap, Gild with White gold and 24k gold, Varnish_20x9x9cm_2021

 

 

이번 전시는 이러한 두 작가의 작업으로부터 질료와 형상 사이,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빚어지는 예술적 창조성과 생명력을 경험하고 이를 관통하는 시간성에 집중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물성이 일어나는 장소, 현전과 부재 사이에 걸쳐진 모호한 흔적들,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사유를 만나고 경험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전시의 구성은 김현식의 대표적인 작품 ‘Who likes Colors?’ 연작(2022)과 <현을 보다> 연작(2022), <거울> 연작(2021), 그리고 신미경의 제스모나이트 작업 <앱스트랙트 매터 Abstract Matter> 시리즈(2021)를 중심으로 신작인 비누 조각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2021)와 비누 평면 <비누에 쓰다> 시리즈(2007, 2012), <회화> 시리즈(2014)로 이루어진다. <앱스트랙트 매터> 시리즈는 비누 대신 새로운 동시대 조각적 재료로 제작된 ‘회화의 형태를 띤 납작한 조각’(작가에 의하면)으로, 과거로부터 오랜 시간 축적된 흔적과 풍화자국에 주목하여, 고대 벽화나 오래된 건축물의 일부 혹은 추상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비정형의 조각들이다. 이들은 작가가 형태의 근원으로 회귀하여 조각적 물질로부터 형태가 이루어지는 사건이며, 질료 자체가 스스로의 물성으로 드러나는 추상적 형태이자 새로운 조각적 형태이다.
전시장에서 삼차원 입체조각은 물론, 전통적인 회화 방식으로 벽에 걸리면서 복합적인 성격을 띠어 보이는 평면적 조각과 입체적 구성물로써의 회화 작품은 각기 저만의 방식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관객은 뚜렷한 형상 조각부터 질료의 흔적 같은 작품들을 대면하고 현상 너머, 그리고 형태와 그 형태를 벗어난 물질까지 연결하여 살펴본다면 비누 향이 폴폴 날 것만 같은 이번 전시의 스펙트럼은 더욱더 넓어질 수밖에 없다.

각각 ‘비누’와 ‘레진’이라는 재료를 오랫동안 다루어 온 신미경과 김현식에게 재료의 물성은 보다 특별하게 작업의 근간을 이루면서, ‘조각’에의 사유로, ‘회화’에의 사유로 각기 향한다. 신미경은 지금껏 시간성에 있어서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긴밀하게 엮어나갔다. 그는 1998년부터 특정 문화를 대표하는 비너스를 비롯한 서양 고전 조각상, 불상, 도자기 등을 비누로 그야말로 정교하게(또는 불완전하게) 빚어내면서 ‘비누 작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작업은 흐르는 시간에 따라 마모되고 소멸될 위협에 있는 역사적 유물 및 예술품과 연결하여, 주위 환경에 의해 변형되고 사라지는 ‘비누’라는 매체를 선택함으로써 그 질료적 특성이 강조되었다. 모각에 따르는 재현과 원본성의 문제는 물론이고, 한갓 조각 재료의 대체제로 쓰인 일상 소모품인 비누의 물성은 엄격한 권위의 조각적 형상과 충돌하면서 유물이 지닌 상징적 가치나 절대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작업은 시간성과 문명 등 수많은 질문과 동시에 ‘조각’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전시의 신작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의 도자기와 조각상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비누 위에 금박과 은박을 정성껏 올리거나 세밀화를 그리는 등 지속할 수 없는 것 위에 공을 들임으로써 사라지는 물질 위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물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한편 <앱스트랙트 매터> 시리즈에는 어느덧 이러한 형상으로부터 해방된 질료가 그 추상적 물성을 드러내며 주인공이 되어있다.

 

 

김현식作_Who likes yellow color_Acrylic on epoxy resin, Wooden frame_80x80x7cm_2022

 

 

이번 전시에서 신미경의 작품들은 그가 지금까지 진행해왔던 고대 조각상이나 도자기 같은 구체적인 형상에서부터 평면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조각적 질료로 나아가는 일련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번역>시리즈로 대표되는 비누 조각은 현실의 원작을 참조한 형상이며 동시에 ‘풍화 프로젝트’나 ‘화장실 프로젝트’에서 보다시피 사람들이 직접 비누로 사용한 부분들이 닳고 찌그러져 있어 형상 가운데 ‘비누’라는 조각의 질료가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이어 고대 유적지를 연상시키는 비누 설치작업 <폐허 풍경>(2018)에서는 그야말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비누 재료의 물성이 건축적 환경 속에서 완연하게 드러나면서, 작업은 조각의 질료로서 풍화되고 소멸되는 (유물)형태의 흔적을 나타나게 된다. 이전의 비누 조각에서는 서구의 미학에서 늘 그래왔듯이 질료가 이차적인 것으로 단지 형상을 현상시키는 매개 역할이었다면, 역으로 형상이 물질로 환원되어 자신을 이루고 있던 질료의 흔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흐름은 이번 전시에서 비누 평면 시리즈로 보여진다. 비누 평면은 비누의 자연스럽게 갈라진 선들이 만들어내는 ‘드로잉’ 시리즈와 아련한 물질의 흔적 같은 ‘회화’ 시리즈가 있다. 그것은 형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질료의 흔적이다.
이는 좀 더 스펙트럼을 넓혀서 최근의 <앱스트랙트 매터> 시리즈에서는 처음부터 형상이라는 참조 없이 비누가 아닌 조각적 재료 자체가 캐스팅이라는 조각적 방식을 통해 조각의 표면처럼 스스로를 보여준다. 이는 곧 지금까지의 작업이 형태가 시간에 따른 풍화와 변형으로 인해 물질의 흔적과 사라짐을 보였다면, 이제 거꾸로 돌아가 물질로부터 형태의 이루어짐을 근원에서 목도하는 것이다.
찌그러진 비누 병을 브론즈 유물로 번역하였듯이, 작가는 다시 한번 버려지고 사라지는 것을 새롭게 바라본다. 그는 쓸모를 다한 고무판이나 스티로폼, 유리판 등을 주형으로 제스모나이트로 캐스팅을 한다. 제스모나이트는 기존 레진의 대안으로 개발된 무독성 수성아크릴 레진으로, 염료나 각종 재료를 섞어 다양한 질감을 표현할 수 있다. 틀에 물감을 뿌리거나 레진에 안료나 돌가루, 쇳가루, 금박, 은박 등을 섞은 결과 판에서 떨어져 나온 안쪽 표면에는 추상 회화 같은 예기치 못한 효과도 난다. 다시 그라인더로 평평하게 갈아내는 등 수고로운 과정 후 나타나는 표면은 우연히 생긴 주름진 무늬, 구겨지고 뜯어져 오래되어 부식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찍혀 나온 것에는 마치 양피지 위에 겹쳐 쓴 흔적처럼 오래된 것에서 나타나는 압축된 시공간이 보인다. 그것은 폐허 속 유적이나 주춧돌에 남아있는 자국들, 스러지거나 부서진 종교적 건축물에서 남는 것과 사라진 것들 사이의 경계, 시간의 흐름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떤 형태를 의도적으로 그리기보다 마치 과거의 오랜 역사가 담기고 시간이 응축되어 생성된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작가는 이렇게 최소한의 조각적 개입으로 질료가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나가도록 놓아두었다. 재현의 목표나 의도에 따라 제작하던 것과 달리 우연성이 작동하는 가운데 물질은 자체의 추상성으로 형태를 이루어나간다. 이에 대해 작가는 “조각적 표현, 기존의 형상적인 것 등을 빼고 또 빼서 한쪽으로 몰고 가다 보니 결과적으로 추상 회화와 닿았다.”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려는 것보다 기존의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재해석하는 것, 그것이 신미경에게 ‘새로움’이다.

 

 

김현식作_거울 Mirror_Epoxy resin on resin color, Resin frame_19(r)x4(d)cm_2021

 

 

사실 인류의 문명과 함께해온 조각은 고대로부터 조각의 영역이 확립되기 훨씬 전부터 무엇을 새기거나 그리는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고 하니, 관습을 떠나 다시 보면 회화와 조각은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 김현식의 작업은 신미경과 달리 평면의 사유에서 출발하였음에도 굳히고 긁거나 새기는 반복적 행위의 입체적인 작업 과정을 통해 평면을 탐구하며 회화의 경계를 확장한다. 전시장에서 벽에 걸리는 회화의 방식으로 놓고 보았을 때, 신미경의 제스모나이트 작업은 프레임이 공간 밖으로 뛰쳐나갔다면 김현식의 것은 평면 속에 공간을 담는 프레임을 보여주고 있다.
일견 김현식의 작품은 매끈하면서 투명하고 보는 위치에 따라서 빛과 색이 교차한다. 선과 색의 단순한 구성으로 된 단색의 화면은 가까이 갈수록 놀랍게도 끝을 모르는 깊은 공간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표면 속 시선은 마치 바닥없는 심연에 다다를 듯 이어진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현대 회화의 방법론에 있어서 새롭게 평면 속에 공간을 담기 위한 작업을 해왔다. 그것은 회화의 평면성을 전제하는 일이다. 그는 평면에 레진을 평평하게 부어 굳힌 후 그 위에 송곳으로 선을 일렬로 촘촘하게 무수히 그어나간다. 이어 그 위에 안료를 바르고 닦아내면 그어진 홈은 가느다란 색선으로 드러난다. 이를 굳힌 후 다시 같은 과정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서 조용히 수행하듯 반복적인 레이어를 쌓아 나간다. 그 결과 무수한 선과 선 사이, 층과 층 사이에는 미세한 틈새, 사이 공간들이 생긴다.
작가가 의식적으로 그은 선들은 결국 통제할 수 없이 끝도 없는 틈새들의 차이와 무한 반복으로 귀결된다. 타임머신이나 시간여행자에서 보듯이 물체와 시공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투명한 레진 및 안료라는 물질로부터 반사와 통과를 거듭하는 빛의 상호작용을 거쳐 아름답고 깊은 명상적 공간이 만들어진다. 미세한 틈새들이 빛의 운동을 가두고 시간을 붙잡아 두는 사건으로서, 홍가이 평론가는 이러한 김현식의 작업이 곧 빛에 관한 예술적 실천이자 ‘광학 물리학적 미학’이라고도 말한다. 겹겹의 사이 시공간에 내재한 빛의 운동성은 곧 빛 에너지 파장에 의한 우주 생성원리와 비견할 수 있다. 한편 정지된 시간은 흐르는 현실 시간 속 변화하는 대상이 아니라 근원을 향하며 그것은 본질적 형상의 그림자인 동시에 또한 우주를 품은 생명력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현을 보다>의 작품 제목이 가리키듯이, 작가는 회화 속 투명한 미지의 공간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현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玄은 본질과 그 드러나는 현상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운율이고 빛을 담은 무색의 공간이다.” 이러한 현의 공간으로 놓고 볼 때, 이 평면 속 깊은 공간은 무의 흔적이며 끊임없이 현전과 부재 사이로 미끄러지면서 도래할 수 없는 기원의 흔적일 것이다.
작가는 놀랍게도 이를 말 그대로 시각적으로 실현했다. 즉 물질과 작업 방식의 물리학적 현상을 통해 마치 현전할 수 없는 존재의 불가능한 현전인 듯 현상적인 차이의 유희를 정신의 영역으로 이행하여 우리 눈 앞에 훌륭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이나 과학적 이해를 떠나서라도 우리는 김현식의 차이가 빚어내는 무한 공간이 그저 고여있고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고요함 가운데 전달되는 빛의 울림과 그것이 생성하는 운동감, 생명력의 활기를 감각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곧 그가 창조한 것은 몰입과 명상을 불러오는 장소, 세속적 공간과는 다른 시간의 체험이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표면의 재현적 환영을 우회하여 실체 자체의 운동성을 재현한 새로운 방식의 현대 회화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Beyond the Visible> 시리즈에 보이는 건물과 하늘의 조형적 구성에서 문득 머리카락 한올 한올의 공간감을 내보였던 초기의 구상성이 기억난다. 오늘날 현실의 분주한 소음 가운데 이렇게 김현식은 작은 평면 속에서 고요하면서도 기운이 충만한 공간을 찾아냈다. 그것은 회화의 범주를 재인식시키는 가운데 동서양의 미학을 아우르며, 보이는 것 너머를 사유하게 한다.

닳거나 캐스팅하고 떼어내며, 또는 레진을 굳히고 선을 긋는 가운데 무언가에 의해 남겨진 자취가 있고 사건은 자국을 남긴다. 흐르는 시간과 멈춘 시간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것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차이들로서 희미한 기원 아래 완벽한 현전이 될 수 없는 불안정한 흔적일 것이다.

 

글 - 강주연 Gallery JJ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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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20217-흔적 Trace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