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환 제주사진展

 

밧디 댕겨왔수다

 

 

 

 

2021. 12. 14(화) ▶ 2021. 12. 30(목)

* 관람시간 | 11:00-18:00 | 일요일 휴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36길 20 | T.02-396-8744

 

 

 

 

2013년, 오래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 맡은 일로 인해 제주도로 이사했다. 2002년부터 이런저런 일로 주말마다 제주공항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2008년에는 혼자 1년을 살아봤으니 '제주살이'가 나름 익숙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이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전입신고를 하고 나니 이른바 제주도민이 된 게 실감났다. 제주에서의 생활이 자리를 잡으니 출·퇴근길에 보이는 풍광과 계절의 변화도 전혀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예전처럼 골프 여행이나 업무 출장 등 잠시 머물면서 받았던 '아름답고 이국적인 제주'라는 인상, 바로 그 뜨내기 여행객의 상투적인 감상(感傷)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도 스쳐가듯 무심히 바라보았던 객(客)으로서의 시선이, 제주도민의 한 사람이라는 주(主)로서의 시선으로 바뀌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주말이면 아내와 제주 이곳저곳을 무작정 돌아다녔다. 흔히 도전하는 올레길을 제쳐두고, 오름과 주변 들판과 마을길을 샅샅이 누볐다. 제주도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섬이라는 걸 실감하면서, 많은 시간을 들판에서 보냈다.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농사가 먼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제주에서 살기 전에는 감귤 농사가 전부인줄 알았다. 돌아다녀 보니 거의 대부분 밭농사인데, '육지'에서는 흔하디흔한 논농사가 제주에서는 서귀포 하논 분화구에서나 볼 수 있었다. 작물은 보리, 콩, 팥, 파, 마늘, 양파, 당근, 무, 땅콩, 양배추, 브로콜리, 콜라비, 취나물, 수수, 옥수수, 수박, 참외, 호박 등 이루 다 헤아리기조차 힘들었다.

 

 

 

 

밭의 경계는 다 밭담인데, 검은 밭담과 작물이 자라며 시시각각 변하며 만들어내는 색상의 강렬한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흙의 색깔도 검은색, 붉은색, 누런색, 밝은 은회색 등 지역마다 달라서 '제주 흙은 모두 검다'는 내 편견은 금방 무너졌다.

흰 모래밭과 검정 흙밭까지 다양한 색과 질감, 철따라 새로운 작물이 자라며 변하는 모습은 한 편의 서사시(敍事詩)와 같았다. 농부는 울 안 작은 텃밭에서부터 너른 들까지 밭 갈고, 씨 뿌리고, 모종하고, 물대고, 김을 맨다. 그 모든 과정에는 농부의 땀이 배어 있다. 햇빛과 비, 바람은 그냥 거들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면서 문득 깨달았다. 돌밭을 뚫고 솟아오르는 연록 떡잎의 에너지는 실로 경이로우며, 인고(忍苦)의 시간을 버티고 자라서 결실로 보답하는 과정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땅과 농작물이 주는 결실과 수확의 약속이 좀처럼 어김이 없으니, 수렵생활을 청산한 인류가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오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하얀 각선미를 섹시하게(?) 드러낸 무가 수없이 널린 밭을 만났다. 얼핏 봐도 이미 출하(出荷) 시기를 한참 넘겨, 버려진 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흔히 대하기 어려운 풍경이고, '버려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짠하기도 하여 휴대폰으로 촬영해 페이스 북에 올렸다.

 

 

 

 

그걸 본 신문사 후배 기자가 “무슨 연유로 그리 된 건지 짧은 글을 써 보내줄 수 있겠느냐”고 연락해 왔다. 그게 계기가 되어 내친김에 '조의환의 제주 스케치'라는 타이틀 아래 조선일보에 격주(隔週)로 시작한 연재가 2014년 5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계속되었다. 사진 촬영하느라 제주도 곳곳을 새삼 훑다 보니, 이 아름다운 섬 전역에 널린 밭이 내 '관찰 대상'이자 '작품 소재'가 되었다. 그렇게 맺어진 제주도 밭과의 인연이 햇수로 8년, 세월이 흐른 자리에 사진이 남았다.

나는 제주도의 가장 큰 경쟁력은 농사에 있다고 늘 생각해 왔다. 천혜의 자연과 공해 없는 환경, 따가운 햇살과 잦은 비바람을 맞고 자란 농산물은 최고 품질을 자랑한다. 이런 농사를 잘 디자인하면 상품 가치를 높일 수 있다. 덩달아 농가의 소득도 높아질 뿐만 아니라 제주 관광의 패턴을 바꿀 수 있으리라 여긴다.

 

 

 

 

내가 제주 농사의 가치를 찬미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밭의 조형미를 해석하면서, 그것을 사진이라는 간결한 시각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오랫동안 시각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방법을 고민해 온 나는, 간결한 메시지가 갖는 전달력과 함의(含意)를 소중하게 생각해 왔다. 그 가치를 디자인이나 사진 작업에서는 물론 일상에서도 실천하고자 애를 쓴다.

간결함과 새로운 시선이 이번 사진전의 출발점(出發點)이고, 제주에 대한 애정과 검고 주름진 얼굴의 농부들에게 드리는 감사와 경배하는 마음이 종점(終點)이다. 사진이라는 프레임 속에 담아 낸 이미지만으로 모든 걸 다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이 작업이 제주 농사의 가치를 알리고, 농부가 흘린 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이번 전시에 '조의환의 제주 스케치'가 함께 전시된다. 이 작업은 작가가 2014년 5월 17일부터 2015년 7월 25일까지 제주도 사진과 짧은 글을 곁들여 조선일보에 30회 연재 했던 것이다. 작가가 제주에 잠시 이주해 살던 시절, 제주의 자연과 제주인의 삶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제주 여행자들이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인 하찮은 현상이다, 구경거리조차 될 수 없는 일상에 대한 관찰이다. 이 연재를 엮어 가벼운 책으로 발행했다(비매품).

 

 

 

 

 

 

 

 

조의환 작가

 
 

조의환 | Cho Euihwan

 

조의환은 197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 전공을 수료했다.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신문잡지출판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 엘지애드 디자이너를 시작으로 홍성사, 월간마당, 멋, 월간멋, 음악동아 등에서 북디자인과 잡지 아트디렉터로 일했다. 198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가정조선, 월간조선, FEEL 등 잡지 아트디렉터를 거쳐 1998년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과 전용서체 개발 책임을 맡았다.

조선일보 출판국 미술부장, 디자인연구소장, 편집국 편집위원으로 편집디자이너, 아트디렉터, 전시기획자로 근무했다. 2007년 신문사를 그만두고 잠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했다. 틈틈이 공부해 온 사진 작업을 시작해 2011년 개인전 FLUX를 시작으로 2021년까지 네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는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 휴먼아시아, 전화기 정의 워킹그룹의 자문, 세계실크로드대학연맹 고문을 맡고 있고, 프리랜서 디자이너이자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E-mail | design54c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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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11214-조의환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