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호 초대展

 

티끌 같은 문자로 그린 달항아리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옛날의 뜨거웠던 사랑도 세월이 지나고 보면 희미하다. 허정호의 '문자도 달항아리'를 처음 본 순간 1970년대 초 풍미했던 멕시코 출신 그룹 〈로스 트레스 디아만테스Los Tres Diamantes〉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문득 생각났다. 남성 트리오가 부르는 노래는 정열적인 멕시코 음악과는 사뭇 다르게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웠다. 한번 들어보려고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보니 뜻밖에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제목부터가 번안으로, 원래 제목은 스페인어로 '루나 예나Luna Llena', 보름달이었다. 뜻밖의 사실에 놀랐다.

 

"우주의 무한공간에 달이 떠 있는 것 같다.", "달항아리 자체가 명상을 한다." 허정호의 문자도 달항아리 그림에 어울리는 표현들이다.

 

화면에서 달항아리가 점점 적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공空의 화면에서 달항아리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며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현상계의 실체가 차원을 달리하여 보면 공空이요, 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체이다. '색과 공'이 하나라는 것이다.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지양하는 이와 같은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이나 '텅 빈 것이 큰 채워짐'이라는 노장老莊의 사상이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허정호의 달항아리 그림은 이런 동양적인 사고의 본질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것 같다.

 

 

 

 

옛날 아날로그 시대에는 망점網點이라고 하더니 현 디지털시대에는 어느덧 화소Pixel라고 한다. 돋보기로 확대해야 간신히 볼 수 있는 티끌 같은 작은 글자들이 화소가 되어 선과 면을 이룬다. 일종의 점묘화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글자의 밀도를 조절하고 그 작은 글자들을 짙게, 엷게 달리 써 명암을 표현함으로써 그림에 입체감을 주면서 극사실화의 효과를 갖게 한다. 대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존재의 의미', '공간의 의미'를 알게 하려는 것 같다. 동양적 미의식인 '여백餘白의 미美'에 입각해 그림의 주체와 배경이 분리와 합일을 동시에 꾀하고 있다. 무수한 작은 글씨로 이루어진 달항아리 자체가 소우주다. 또 다른 미증유의 예술세계 경험을 선사한다.

 

"달항아리를 보고 있노라면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그저 빠져들어 보게 된다." 프랑스의 석학이자 현대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Guy Sorman이 한 말이다. 또 일본의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는 달항아리를 "너무나 자연스럽고 넉넉한 아름다움의 세계"라 평했다. 흰 바탕색과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았다고 해서 '달항아리'라 이름 붙은 백자는 어느덧 한국적 미학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달항아리는 다른 도자기에 비해 몸집이 큰 편이기에 한 번에 물레로 만들기 어렵다. 따라서 대부분 위와 아래의 몸통을 각각 따로 만들어 붙였다. 그런 까닭에 반듯한 원을 이루기보다는 그때그때 만든 사람의 솜씨에 따라 둥근 형태가 각각 다르다.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이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조형미보다는 부정형 원의 무심한 아름다움이다. 위 입 부분에서 어깨, 몸통을 지나 아래 굽으로 이어지는 곡선도 부정형을 이루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선과 형태가 우아한 기품을 발산하는 것이 달항아리의 매력이다. "매우 훌륭한 솜씨는 서투른 것같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미美'라 할까? 이 백자의 미학은 '불완전함'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게 달항아리의 멋이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고 넉넉한 한국적 아름다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달항아리는 오늘날 수많은 우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도예, 회화, 건축, 공예, 사진 등에서 다양한 현대적 미의 작품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서양화에서 출발한 허정호도 그중 한 사람으로 여러 화력 끝에, 또 여러 형태의 그릇과 항아리를 그린 끝에 달항아리를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 작업이 예사롭지가 않은 것이다.

 

그의 달항아리 그림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고려의 『팔만대장경』 제작이 연상되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 고려는 민심을 모으고 절대자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16년간에 걸쳐 5천2백여만 자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절을 세 번씩 하면서 제작했다고 하지 않는가.

 

신앙인들에 있어서 경전을 사경寫經하는 행위는 최고의 공양이고 자기를 비우는 수행 행위이다. 수행의 기본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선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무념무상, 명상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말의 "비나이다 비나이다"도 "비우나이다 비우나이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비워야 채움이 오는 것이다.

 

그릇은 어찌 보면 인류 최초의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물을, 음식을 채울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릇의 본질은 채움을 위해 비어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채움의 기능을 위한 생필품이 고고한 예술성을 갖게 되면서 비움의 예술품이 되었다. 허정호는 무수한 티끌만한 글자의 채움으로 비움을 빚고 있다.

 

 

 

 

한국의 화가로서 21세기 들어 더욱 각광 받는 김환기의 달항아리 사랑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어떤 이는 크고 둥그런 백자 항아리를 달항아리로 명명한 것도 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내 뜰에는 한 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몸이 둥글고 굽이 아가리보다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가 않고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 한 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동한다. 싸늘한 사기로되 따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

 

달항아리를 그토록 사랑한 만큼 김환기는 달항아리를 즐겨 그렸다. 그는 달항아리를 그리되 단순한 선으로 변형의 기법을 발휘하여 그렸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허정호는 티끌 같은 작은 글씨들을 화소로 사용하는 조형언어로써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다. 같은 달항아리를 그리면서도 두 사람의 방법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허정호는 그 자신의 작품과 작업방식을 분석하며 쓴 논문 「쓰기와 그리기의 통합 이미지에 관한 연구-본인의 작품을 중심으로」에서 이미 쓰기와 그리기의 상호연관성을 피력한 바 있다. 우리가 쓰는 '글', 그리는 '그림' 모두가 그 어원은 '그리워하는', '그리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는 글로써 무한대의 그리움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예가는 흙을 물레로 자아 도자기를 성형한다. 어떤 화가들은 붓으로 도자기를 그린다. 하지만 허정호는 촉이 가늘고 가는 뾰족한 펜으로 먼지만한 글씨들을 써 달항아리를 만들고 있다. 가장 날카로운 화구로 가장 부드러운 달항아리를 성형하고 있는 것이다. 패러독스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문자도 달항아리를 그리는 데 들이는 그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그 정성. 그 편집광적인 작업방식은 '티끌 모아 태산', '우공이산愚公移山'이 옛말이 아니라 지금 진행 중임을 느끼게 한다. 어느 예술가에 있어서나 예술 행위는 일종의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티끌만한 수많은 작은 글씨로 문자도 달항아리를 그리는 행위는 수행의 과정을 넘어 고행을 통한 수도 행위이다. 그는 무념무상의 명상으로 수도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문자도 달항아리 그림의 부분을 돋보기로 확대해 보다가 암호 같은 글씨 조합 가운데에서 우연찮게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하는 문구를 발견하고 놀랐다. 그는 마치 간화선看話禪을 하는 수도자처럼 화두를 붙잡고 선禪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림 작업 자체가 선禪일런지도 모른다.

 

이만주 시인

 

 

전시전경

 

 

 

 

허정호 작가

 
 

허정호

 

1998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 2002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 석사학위논문 : 쓰기와 그리기의 통합이미지에 관한 연구 -본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수상 | 2001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중알일보 주최 | 2004 동아미술제 "특선", 동아일보 주최

 

개인전 | 2012 펜으로 그린 달항아리, 숨갤러리, 대전, 8월 | 2012 펜으로 그린 달항아리, 금보성아트센터, 서울, 7월 | 2018 펜으로 그린 세월, 금보성아트센터 초대전, 서울 | 2016 "17년간의 기록" 천안예술의전당 미술관, 천안 | 2012 "마음을 담다" 가나인사아트센터, 서울 | 2007 "시간이야기" 갤러리 눈, 서울 | 2003 "시간이야기" 관훈갤러리, 서울 | 2001 "시간이야기" 관훈갤러리, 서울

 

아트페어 | 2008 골든아이 아트페어, 코엑스, 서울 | 2003 MANIF 서울 국제 아트페어, 예술의 전당, 서울

 

단체전 | 2016 "우리를 지키는 것들"展, 쌀롱 온 기획 초대, 서울 | 2015 "예술혼의 기억들"展, 천안 예술의 전당 | 2012 용의 비늘-중앙대학교 교강사展, 공평갤러리, 서울 | 2011 바람결의 제자展, 인사아트센터, 서울 | 아름다운 물결展, 예술의 전당, 서울 | 하마갤러리 개관展, 하마갤러리, 안성 | 2010 삶-교집합展, 라메르갤러리, 서울 | 2009 용의 비늘展, 예술의 전당, 서울 | revolution-taipei展, 타이페이 무역센터, 대만 | 2008 아트스타 골든게이트展, 오픈갤러리, 서울 | 2007 삶-N.11展,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서울 | 2005 예우전-'With'-중앙대 동문展, 중앙대학교 의료원 | 삶-어제의 내일展, 관훈갤러리, 서울 | 2004 그리기0。C-3인展, 관훈갤러리 기획초대, 서울 | 동아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대한민국 미술대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삶-아홉번째 모험, 아홉번째 상상展, 덕원갤러리, 서울 | 2003 한국 현대미술展, Cascata Gallery, 벤쿠버총영사관 후원, 캐나다 | 삶-내일의 기억展, 관훈갤러리, 서울 | "한국독립운동 기록화" 특별기획전, 광복회 후원, 독립기념관 | 2002 한국미술협회展, 예술의 전당, 서울 | "다름속의 동질"展, 중앙대 아트센터, 서울 | 단원미술제, 단원전시관, 안산 | 2001 "WORK 2001" 인터미디어 아트북&웹, 가나아트센터 기획, 서울 | 중앙미술대전, 호암갤러리, 서울 | 2000 예우전-동질 그 아름다움展, 공평아트센터, 서울 | 광주 비엔날레 '人+間'특별전, 광주 비엔날레 주최 | 1999 21세기를 여는 한국 정예작가 초대전, 서울시립미술관 | 삶-다중적 초상展, 종로갤러리, 서울 | Mirror and I 展, 중앙대아트센터, 서울 | 1998 Here and now 展, 관훈갤러리, 서울 | 뉴-프론티어展, 경인미술관, 서울 | 1997 뉴-폼'97'展, 윤갤러리, 서울 | 소사벌미술대전, 평택 문예회관 | 개체분자1- 공통분모27展, 덕원갤러리, 서울 | 1996 구상전, 예술의전당, 서울 | 미술세계대상전,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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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10703-허정호 초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