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숙 展

 

 

 

 

금보성아트센터

 

2021. 3. 2(화) ▶ 2021. 3. 9(화)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36길 20 | T.02-396-8744

 

https://blog.naver.com/kimboseong66

 

 

용암_(80M) 145.5×89.4cm_Oil on Canvas

 

 

러빙 속초 버닝 속초

 

박인식 작가

 

1.

그(녀라고 해야 옳다. 이 자리의 화가 김종숙은 여자이므로, 하지만 그녀를 줄곧 ‘그’로 지칭하겠다. 내 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므로)의 그림은 꾸덕꾸덕하다. 그렇게 말린 생선 같다.

대구나 명태나 쭈꾸미나 오징어나 가자미 그림만 꾸덕꾸덕한게 아니다. 집들도 꽃들도 골목도 인물도 하늘도 구름도 바다도 꾸덕꾸덕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온 세상을 찢어발긴 냉전의 자신인 독일표현주의 화가들의 그 거친 화폭들을 조선간장의 거무튀튀한 고독 속에 한 백년쯤 절여둬야 이 정도로 꾸덕꾸덕해 지겠다.

이 그림들의 꾸덕꾸덕함에는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쉬 썩지 않게 막아주는 눈물과 소금기가 배어 있다. 그림 저편에서 눈물에 소금기를 더해 간을 맞춘 바닷바람이 불어와 북어 대가리보다도 더 바삭거리는 내 가슴까지 꾸덕꾸덕하게 만든다.

꾸덕꾸덕해진 가슴 속에서 갯내음 풍겨온다.

하릴없이 바닷가를 서성이던 젊은 날의 동경이 되살아 난다.

원래 우리는 갯내음으로 숨을 쉬던 꾸덕꾸덕한 그 무엇이었나?

 

그의 그림은 쿰쿰하다.

쿰쿰하게 삭힌 가자미 식혜 맛이다.

보릿고개 넘던 두메산골 비탈에 선 가파른 삶과 징용 끌려간 지아비를 그리는 지난 시대의 그 오랜 서러움과 기다림이 삭혀낸 맛이다. 첫 맛이 아니라 뒷 맛이다. 보면 볼수록, 씹으면 씹을수록, 삼키면 삼킬수록, 느릿느릿 발걸음 떼는 누렁소 걸음이다. 그 소가 잠자는 외양간 냄새다. 천천히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는 옛날 증기기관차를 탄 맛이다. 느리지만 어느새 기찻길 오막살이 살림들이 서로 섞여 한 몸으로 어울리는 사랑놀이 하도록 칙칙폭폭 땀 흘리며 쉬지 않고 묵직하게 달리는 그 쇳덩어리에 올라탄 느낌이다.

그는 동쪽 바닷가에 살지만, 그의 그림은 북쪽이다. 꾸덕꾸덕하고 쿰쿰한 것들의 고향은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북쪽에 두고 내려온 것은 고향만이 아닐 것이다.

 

 

자갈치_(60P) 130.3×89.4cm_Oil on Canvas

 

 

그는 속초의 실향 아바이 마을인 청호동 태생이다. 평안도 출신인 아버지의 생업이 오징어 덕장이다. 꾸덕꾸덕하고 쿰쿰한 것은 그림이기 이전에 자신의 삶 자체였다.

북쪽에서 내려온 아바이들의 입맛은 한결같이 북쪽에 남겨두고 있다. 북쪽음식만 출창 먹어, 남쪽의 냉면집과 막국수집과 만두집과 촌닭 백숙집 주인들을 먹여살린다.

북쪽은 춥다. 북쪽 삶이 추워서다. 그 추위가 북쪽의 것들을 꾸덕꾸덕하고 쿰쿰하게 만든다. 그 추위를 타고 내린 눈 녹은 눈물이 얼었다 풀리기를 거듭해야 날 것인 삶의 비린내 마저 황태의 그것처럼 꾸덕꾸덕하고 쿰쿰한, 바로 혈육에서 느낄 수 있는 정으로 숙성된다. 그는 그 아바이 마을의 여러 아바이들 곁에서 북쪽의 꾸덕꾸덕한 삶을 아가미 같은 어린 입으로 들이 쉬고 내쉬는 사이, 그 북쪽 삶에 일체화 되었다.

 

그의 작업 원형은 이 북쪽 삶에 있다. 복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삶은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려진 물고기를 닮았다. 그 물고기들처러 꾸덕꾸덕 말라가야 한다.

하지만 그는 안다. 신선할 때보다 어느 정도 말랐을 때 맛이 더 짙어지는 물고기도 있다는 것을. 멸치나 새우나 대구나 명태 같은 것은 바짝 말릴수록 우러난 다시 물 맛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도.

그는 떠나온 것들, 그리하여 고향에서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과 외로움에 대해 기이한 감수성을 지닌 것 같다. 그 쓸쓸함과 외로움을 감싸 안아 체온을 실어줄 때, 그 북쪽 삶은 이 세상에서 달리 찾아볼 수 없는 맛으로 발효되고 숙성된다는 것도 깨달은 것 같다.

화가로서의 그의 시선은 갓난애를 보듬는 엄마의 손처럼 북쪽 삶의 얼굴에 놓여있다. 그 얼굴들 내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말라가고 있는 물고기들, 여장차림의 사내광대, 멍게를 닮은 어물전 할머니, 사람 흔적 없는 뒷골목들, 허물어진 담벼락, 작가 혼자 바라본 야생화들… … 저들이 제 가슴 속 깊이 감춰놓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는 제 분신의 아픈 배를 쓰다듬듯 붓질해 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만이 말 할 수 있는 ‘김종숙의 조형언어’를 찾아냈다.

우리 모두에게는 존재한다는 것의 참을 수 없는 쓸쓸함으로 사람 뿐 아니라 주변 사물들의 슬픔을 쓰다듬고 싶어하는 마음의 손길이 있다는 걸 그의 작품은 알려준다. 이런 작품을 만날 때, 비로소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도 사랑이 생겨난다.

또 이런 작품 앞에 설 때, 사랑은 눈으로 쓰다듬고 만져볼 수 있으며 또 먹을 수 있다. 내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그 사랑의 감촉이 한없이 꾸덕꾸덕하다.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그 식감이 한없이 쿰쿰하다.

 

나는 그 꾸덕꾸덕함과 쿰쿰함에 이미 중독되었다.

 

꾸덕꾸덕하고 쿰쿰한 것에 대한 북쪽 사람들의 멈출 수도 없는 그 지독한 중독이어라.

 

<제1회 개인전 서문>

 

 

손_(15M) 65.1×45.5cm_Oil on Canvas

 

 

2.

속초에서는 사물을 보고 부르는 방식이 남다르다.

‘속초적’이라할만큼 속초만의 시각과 속초만의 표현 언어가 있다.

김종숙은 그 속초의 ‘속초적’ 삶을 조형언어로 쓴다.

 

그(녀라고 해야 옳다. 이 자리의 김종숙은 여자이므로. 하지만 나는 2년 전의 첫 전시 때와 마찬가지로 ‘그’라고 부르겠다. 여전히 내 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므로)는 속초를 그려냄으로써 여느 사람으로는 본적도 느끼지도 못한 속초를 찾아내고 있다. 오직 그의 붓질을 따라 속초는 ‘속초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의 속초는 지금의 속초이면서 지금의 속초가 아니다.

공간적으로는 지금의 속초이지만, 시간적으로는 속초 청호동 아바이 마을 실향민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그는 청호동 아바이마을의 실향민 2세다. 속초에서 태어나 지금껏 온전히 속초를 살아왔다.

청호동 아바이 마을은 분단역사의 최전방 경계에 뿌리를 옮겨심은 소수자들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북에서 가지고 온건 몸뚱아리 하나뿐.

그 몸으로 타지로서의 속초를 자신들의 삶의 영역으로 만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쏟아냈던가. 하지만 속초는 그들에게 ‘설악’산이라는 대지의 심장과 ‘동해’라는 바다의 허파를 주었다.

이 지점에서 김종숙은 화가의 눈을 뜬다.

그의 어버이 세대들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든 소수자라면, 그는 산 너머 서쪽에서 불어온 대량소비시대의 바람이 동쪽 바닷가로 휩쓸어버린 이 시대의 소수자다.

 

거개의 속초땅이 전국 최고 휴양관광리조트로 개발되면서 청호동 아바이들뿐만 아니라 속초의 원주민들은 오랜 삶의 터를 외지인에게 내주고 정신적으로 유랑하는 이방인이나 난민인 디아스포라로 살아간다.

‘속초적’ 삶의 원형은 외지인들의 볼거리로 전락하여 상품화되거나 대규모 휴양관광시설의 보이지 않는 배경이 되고 말았다.

숨어버린 속초의 디아스포라적 삶은 김종숙 같이 진정의 절정으로 올라선 작가가 있어 미학의 한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실향민이라는 경계인과 소수자들의 삶에서 화가의 눈을 뜨면서 모든 생명들은 자신들이 자란 땅과 한몸으로 일체화된 존재임을 밝혀내고 있다.

어버이 세대가 이주한 타향 속초가 자신의 미학적 고향으로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기존의 리얼리즘과는 또 다른 리얼리즘과 만나게 된다.

그의 작업은 경계인 삶의 한 전형인 ‘속초적’ 삶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가열찬 질문이다. 그 가치가 얼마큼의 보편성을 지니는가 묻고 있다. 그것이 영원히 보존되어 이어지고 또 기억되기를 바라는 기도행위다. 그리하여 누구도 가보거나 가닿은 적이 없는 인간미의 가장 깊고 따스한 자궁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꿈을 꾸듯 그 자궁 속을 거닐다 현실로 되돌아 나오면 우리는 이미 ‘속초적’으로 바뀌어 버린다.

‘속초적’미학은, 모든 열정처럼, 전염된다.

 

그가 모색해온 ‘속초적’미학이란 디아스포라로서 청호동 실향민의 운명으로 체화되었던 ‘삶의 진정성’의 또다른 이름이다.

삶의 경계선으로 소외되어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실향민의 삶에서만 풍겨나는 숨결과 체취가 바로 ‘속초적’이다.

 

그는 속초 아바이마을 사람들만이 아니라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인 모두가 잠재적 실향민인 것을 알고 있다.

풀과 나무와 물고기 등 사람살이의 보잘것없는 이웃들까지 그에게는 실향민으로 다가오는것이다.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제 갈길을 가는 그들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 또한 ‘속초적’일 수 밖에 없었다.

 

 

동명항_(60M) 130.3×80.3cm_Oil on Canvas

 

 

이처럼 ‘속초적’이란 삶의 진정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몸으로만 느껴지고 표현될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실향민2세로 반세기가 넘도록 속초에서 살아온 그에게 주어진 축복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표현기법과 주제가 비슷해 보이지만 1980년대 우리 화단에 들불로 번졌던 민중미술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둔 리얼리즘이다.

 

여기 등장하는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어떤 그림이 될 지를, 어떻게 ‘속초적’으로 변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

그는 대상으로 포착한 화재들의 속초적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인생길을 걸어왔다. 실향민 2세로 DNA속에 내재되었고, 또 밥과 그림 도구와 재료를 마련하기 위해 막노동에 다름없는 온갖 잡일에 몸을 던져 그림 대상들과 소수자로 함께 살아오는 동안 저도 모르게 형성된 세계관은 진정성의 끝에 가닿는 꿈을 꾸게 만들었다.

그 끝닿은 진정성에서는 나무든, 골목이든, 인물이든, 꽃이든, 물고기든 그 모두가 작품의 형상과 색채와 질감과 깊이와 두께를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

그들 삶이 스스로 밝히는 미학적 구조를 따라, 문학의 자동기술처럼, 작가는 무의식적 자동기술로 붓질하게 된다.

 

가까이 가면 나뭇가지지만, 조금 떨어지면 집으로 보이는 까치집 같다. 나뭇가지만으로 집을 짓는 까치처럼 그는 자신의 삶과 몸을 화폭 속에 얹어 두기도 하고 밀어넣기도 한다.

밤낮을 잊고 끼니를 건너뛴 작업 끝에 그는 삶의 높은 나뭇가지 끝에 아름다움의 집 한채씩 올려 놓는다.

 

이 집을 제대로 보려면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

까치집이 삭정이로 쌓여있듯, 가까이 다가가면 화재의 형상은 사라지고 붓질과 칼질 그 자체만 남은 추상으로 바뀐다. 각 부분을 확대하면 작품은 셀 수 없는 추상화의 집합이 된다.

그러다가 한발씩 뒷걸음치면 붓질된 색점의 단위들이 보는 사람의 상상력으로 조합되어 작가가 전달하고자하는 주제의 물질적이고도 정신적인 형상을 작품에 등장한 대상들이 스스로 그려 나간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풍경이 품고 있는 서사와 감정이다.

이 지점에서 그의 미학은 시간예술의 정수인 음악에 다가간다.

같은 곡이라도 연주자에 따라 지휘자에 따라 또 가수에 따라 달리 표현되듯, 보는 이의 감정상태와 상상력의 크기에 따라 또 보는 때와 그 때의 조명 상태에 따라 그의 그림은 달라진다.

 

그의 작품은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 인생이다. 꽃들도 인생으로 피고 물고기들도 인생을 살다간다. 요즘의 미술사조라든가 유행하는 경향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른 나라 먼 바다에서 잡은 명태라도 대관령 덕장에서 말리면 대관령 황태가 되듯, 서울 연희동 골목풍경도 그의 붓이 닿으면 속초 청호동 골목으로 바뀐다. 세상의 모든 ‘속초적’인 것은 여기까지 오면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버릴 수 있다.

 

속초적인, 너무도 속초적인 실향민의 삶은 그의 화폭에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이야기로 번안된다.

 

물고기는 물고기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바다와 산이 언제 어느때 우리의 고향일 수도 있다고, 또 우리는 그들과 이웃으로 함께 산 적이 있다고 속삭인다.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그의 작업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닌다. 표현기법과 주제도 지난 시대의 낡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를 앞섰다고 봐야한다. 인공지능에 삶을 맡기면 맡길수록, 흙의 심장으로 피돌기하던 고향에의 그리움이 사무칠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그의 미학적 사색은 ‘속초적’향수다.

 

그의 미학적 메커니즘은 ‘속초적’인생이다.

 

그의 ‘속초적’상상력은 기억을 예언으로 바꿔 놓는다.

<제2회 개인전 서문>

 

 

양양장3_(80P) 145.5×97.0cm_Oil on Canvas

 

 

3.

첫 개인전(2015년 2월, 서울 아라아트센터)과 두번째 개인전 (2017년 6월, 서울 갤러리291)을 마치고 2019년 6월로 예정된 세번째 개인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 2년 사이 그는 진정의 절정에 오른 기량으로 자신만의 속초사랑의 모든 것을 불살라 150호 대작 <속초 연작> 네 점을 비롯하여 40여점의 전시작품을 빚어 냈다.

 

그 해 5월말, 나는 중독의 땅-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속초行 / 길가 간판이 막국수 막국수 막국수 막국수 일색이면 홍천 / 그게 황태 황태 황태 황태로 바뀌면 원통 / 미시령 뚫고 지나 동해를 내려다보는 사이 / 물회 물회 물회 물회 세상이 나타나면 / 당신은 속초라는 중독의 땅에 닿는다 / 거기서 당신마저 근원을 알 수 없는 / 법으로도 금하지 못하는 / 마약 같은 / 어떤 끌림에 중독되면 어떡할거나 / 나도 중독 / 너도 중독 / 우리는 이미 속초다

 

새로 마련한 그의 작업실에서 세번째 개인전에 선보일 신작 속에 둘러싸인 나는 이미 근원을 알 수 없는, 마약과 같은, 그의 속초 사랑에 중독되어 ‘우리는 이미 속초다 !’라고 다시 선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운명의 앞날을 알 수 있으랴.

그로부터 불과 닷새 뒤인 2019년 4월 4일 밤, 수백명의 속초인을 이재민으로 내몬 그 속초의 산불이 났다. 태풍급 강풍을 타고 불덩어리들이 발화지점에서 1Km도 떨어지지 않은 그의 작업실로 미사일처럼 날아 왔다.

몸만 간신히 빼내 내 달리는 그의 뒤로 작업실은 불타오르는게 아니라 포탄 맞아 폭파되는 듯 눈 깜박할 새 화염에 휘쌓였다. 불길이 진화되고 잿더미뿐인 현장은 바라보는 그의 허망을 나는 살아 숨쉬는 사람의 말로는 상상할 수 없다. 너무도 억울한 죽음의 원혼이 구천을 떠돌다말고 되돌아와 화장터 잿더미로 변한 제 주검을 바라보는듯 했을 그 심정을. 창문 유리가 녹아 흘러내렸을 정도의 화염에 잿더미가 된 것을 앞서 2년간 제작한 전시작만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림 하나만 보고 걸어온 지난 30년간 외길의 화업에 그간 낳은 수백의 분신이 한 점 남김없이 무의 세계로 되돌아 가버렸다. 그는 스스로 인생작으로 여기는 작품을 절대 다른 손에 넘기지 않았다. 첫 개인전에서 대부분의 전시 작품들을 떠나보낸 허전함을 견뎌내지 못 했던 그는 두번째 개인전 오프닝 전에 여러 수작에 ‘비매품’ 딱지를 붙여 전시 관계자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동명항, 그물을 끌고_(150M) 227.3×145.5cm_Oil on Canvas

 

 

잿더미 티끌로 되돌아간 작품들은 그 뿐만이 아니다.

중국 티벳 인도 등지를 오랫동안 방랑하며 드로잉한 일곱권 가량의 스케치북, (그림을 보고 말하고 쓰는 일을 하는 나로서는 이 스케치북이 무엇보다 아깝다. 작가의 필력과 내공을 한눈에 가늠케 했던 그 드로잉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소중한 작가로 자리매김 될 보증서 같았다. 전시 기획자로서 나는 그 드로잉만으로 벽면을 꽉 채우는 전시회를 끊임없이 욕망하고 있었다.) 그 드로잉을 밑그림 삼아 제작한 수십점의 유화들, 박기범의 동화 『미친개』와 『그 꿈들』에 쓴 삽화 50여점 등 화가로서 그가 그림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열정으로 쏟아낸 그 모든 결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미친개』와 『그 꿈들』에 쓴 삽화는 일반적인 의미의 삽화가 아니었다. 각각 2년씩 품을 들인 극한의 붓질이 낳은 작품들이었다. 『그 꿈들』의 원화에 대한 그의 애정은 유난했다. 소장을 원하는 이가 많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때가 되면 그 작품들의 진정한 주인인 이라크 아이들에게 모두 되돌려 주겠다며 물감 살 여력이 없는 형편에서도 끝까지 한 점 빠짐없이 품고 있었었다.

 

이라크 소년들의 꿈을 담은 『그 꿈들』의 어느 원화를 처음 보자마자, 나는 이런 시상을 떠올렸다.

 

지금 나는 / 적을 죽이기 위해 총을 들고 집을 나선다 / 나를 전장으로 떠나보내는 / 아내와 세 살 먹은 딸 아이 하나 / 나를 기다리는 사람 / 열 사람을 죽이더라도 죽지 말고 / 살아서 돌아와야 할 이유를 여기 두고 / 내가 죽여야 할 적을 찾아나선다 /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눈 저들 적에게도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기에 / 먼 포성은 결코 잦아들지 않는다 / 피융 - / 내가 쏜 총탄의 기도소리 / 여보 살아서 돌아와줘 / - 피융 / 나에게로 날아오던 총탄에 실린 이국어의 기도 소리 / 얘야 꼭꼭꼭 살아서 돌아갈게 / 피융 - / 날아가는 기도소리 / - 피융 / 날아오는 기도소리 / 세상에는 죽음의 숫자만큼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 / 삶과 죽음의 합도 / 질량불변의 법칙 안에서 돌고 돈다

 

 

대장간_(10M) 45.5×33.4cm_Oil on Canvas

 

 

4.

2019년 11월 어느날, 나는 다시 속초행에 나섰다.

이재민 구호주택의 옹색한 공간에서 물굴의 그가 지난 6개월 간 제작했다는 22점의 작품을 보려고, 그리고 작년 10월 말, 또 다시 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이번 전시에 출품할 작품들을 마무리 했다는 연락을 받고서.

 

그 1년 반 동안 믿을 수 없는 집중력으로 제작한 43점의 작품을 살펴보는 사이 몇 달 전에 쓴 시 <러빙 고흐 버닝 고흐>를 속으로 읊고 있었다.

 

반 고흐는 <가셰 박사의 초상>을 두 점 그렸다. 한 점은 파리 오르셰 미술관에 걸려 있고 다른 한 점은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고흐 사후 100년째 된 1990년 뉴욕의 어느 경매장에 나왔다. 한 일본인이 천억 원에 가까운 8250만 달러에 낙찰 받았다. 생전 작품 한 점을 한 끼 식사값에 팔았을 뿐인 하늘의 고흐에게 한 점 그림값으로 천억 원을 전해주려는 푸닥거리 제의를 올리고자 했을까. 그는 3년 뒤 숨지면서 소장하던 <가셰 박사의

초상>과 함께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 / 마침내 돈으로 사낸 사랑 / 러빙 고흐 / 돈으로 태울 수 없는 예술혼 / 마침내 돈으로 불타오른 예술혼 / 버닝 고흐 / 사랑이 하는 일은 / 사랑하는 일은 / 예술혼처럼 / 불태우는 일 / 불타오르는 일

 

유화물감이 아니라 잿더미를 절망의 눈물에 이개 덧칠한듯 이 비현실적이면서도 너무도 현실적인 속초의 실존이 고흐의 예술혼과 맥락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김종숙의 화폭은 처음 볼 때부터 그가 쓰는 조형언어의 묵직한 진정성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가볍게 꽃을 피울 때 조차 그의 꽃은 내면 깊숙히 닻을 내려 작가의 생애로 이어졌다.

살아 있는 모든 목숨은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너무도 당연한 이 명제조차 그의 예술혼을 가둘 수 없다.

속초 산불 화염 속에 흔적없이 불타버린 수백 작품들 한 점 한 점이 그의 생애를 살아가고 있었기에 그 산불로 그는 수백번의 죽음을 체험한 것이다.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 속초사랑의 붓들로 완성한 43점의 작품을 품고 이승으로 되돌아 온 이번 전시는 그의 환생 신고다.

이승으로 귀환한 이 작품들은 그가 우리 곁을 떠나기 전, 죽음의 운명을 예감하고 제 주검과 함께 자신의 분신인 모든 작품들을 함께 화장해달라고 쓴 유언에 다름없다.

마치 소장하던 고흐의 <가셰박사의 초상>을 제 주검과 함께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진 어느 사내의 고흐 사랑같이.

 

환생한 자의 불탄 죽음을 증언하는, 잿빛 쓸쓸함으로 오히려 눈부신 이 조형언어를 들어보라.

 

극한의 진정성을 온 몸의 칼로 던져 도려낸, 전생과 내생을 오가는 이 조형 언어의 힘을 견뎌보라.

 

 

양양장4_(150P) 227.3×162.1cm_Oil on Canvas

 

 

어떤 날의 속초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박인식

산의 바닥이

바다의 천장에

수평으로 맞닿고

산의 드높은 곳이

바다의 드깊은 곳에

거꾸로 박힌

어떤 날의 속초는

산을 넘어 남자는 아버지가 되고

바다를 건넌 여자가 어머니 되는 날이었다

또 어떤 날의 속초는

남자와 여자가

높은 곳에서

깊은 곳에서 기른

산과 바다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낳는 날 이었다.

 

 

아야진1_(40P) 100.0×72.7cm_Oil on Canvas

 

 

속초화가 김종숙 그림으로 만난 속초 앞바다 물고기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박인식

 

내 회화적 기억이 틀림없다면

우리는 언젠가 이 물고기들과 헤엄치고 물춤추며

속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를

한백년 산 적이 있다

 

내 회화적 예언이 맞아떨어진다면

우리는 언젠가 이 물고기들과 헤엄치고

물춤추는 이웃사촌으로

다시

한백년 살고 있겠다

속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

그,

속초향에 취해

 

 

아야진2_(156P) 227.3×162.1cm_Oil on Canvas

 

 

 

 

 
 

김종숙 | Kim Jong suk

 

그림 그리는 사람.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림 그리는 것으로 진정의 끝에 닿고자 하며, 붓을 잡으면 고통스러운 대결을 놓지 못한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눈물겨운 것,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 극한의 칼날 위를 걸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러하기에 그의 작업을 지켜보는 일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당신의 붓질 하나하나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알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살라 버릴 것만 같은, 곱절의 일을 씩씩하게 해내며, 식당 설거지도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해 오고 있다.

1965년 속초에서 태어났고, 강원대학교에서 그림공부를 했다.

<글과그림> 동인으로 박기범의 동화 『미친개』 그리고 2012년 부터 2013년까지 2년에 걸쳐 이라크 소년들의 꿈을 담은 박기범의 동화 『그 꿈들』의 삽화를 그렸다.

2015년 이른 봄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첫 개인전, 2017년 이른 여름 서울 갤러리291에서 두전째 개인전을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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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10302-김종숙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