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선 사진展

 

그 집, 충현(忠峴)

 

 

 

류가헌

 

2020. 7. 21(화) ▶ 2020. 8. 2(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106-4 | T.02-720-2010

 

 

 

 

그 집, 충현(忠峴)

1. 강남의 대형교회는 이제 일반 명사가 된 듯하다. 땅값 비싼 자리에 거대한 건물을 가지고, 사회 저명인사들이 포함된 몇 천 몇 만 명의 신도들이 매주 일요일 예배에 출석한다. 또한 여러 스캔들로 사회적 비난을 받으며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강남]이라는 지리적 위치, 커다란 예배당과 많은 교인 수의 규모로 인해서 붙는 [대형]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교회]라는 본질을 의심받는다. 오늘날 이루어지는 한국의 대형교회를 향한 매서운 비판에 대부분 동의한다. 나는 80년대 강남 교회 중 대표적인 맘모스 건축물이면서 대형교회 1호 세습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역삼동 충현교회에서 자랐다.
교회가 한참 지어지던 1985년에 우리 가족은 그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했고, 우리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인 그곳에 다니기 시작했다. 기독교로 개종한지 얼마 안 되셨던 우리 부모님은 없는 살림에도 한참 지어져 가는 그 교회를 위해 기꺼이 건축헌금을 내셨다. 내 어린 시절 교회 근처에 사는 신앙심 좋은 주일학교 학생으로 지냈다. 그리고 정의감 충만한 대학생이었던 나는 설립자의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97년 공동의회에서 기립으로 반대표를 던졌던 216명 중 한 명이 되었다. 그 일 이후 내 마음은 교회에서 떠났고, 2004 년 독일로 유학을 오면서 몸도 떠났다. 이후 나는 독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생에서 이민자가 되었다.
어느 날 독일 친구들에게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거대한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그 규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200명이 모이는 교회도 제법 큰 교회라고 생각하는 이 독일인들에게 한국 대형교회의 실상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에 지난 2019년 4월 한국을 방문하면서 내가 자라난 역삼동 그 교회를 찾았다. 물론 한국에 같이 온 아홉 살짜리 아들에게 아빠가 어린 시절 살았던 역삼동을 보여줄 마음도 있었다.
빈한했던 어린 시절 여러 번 이사를 다녀서 역삼동 곳곳에 내가 살던 집들이 있었다. 아들과 함께 돌아온 내 고향 동네에는 더 이상 내가 살던 집이 남아있지 않고 모두 하나같이 새로 지어졌다. 내가 드나들었던 문, 내가 살았던 그 반지하 방들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내가 매주 일요일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살던 그 큰 집만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 모습대로 남아 있었다. 역삼동 그 언덕 위에 성과 요새처럼 보이던 그 교회 예배당은 세월의 변화를 견뎌내고 그 단단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들과 함께 그 집 큰 마당으로 들어갔을 때 아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내가 어린 시절 놀던 경사로 옆 난간에서 30년 전 나와 똑같이 미끄럼을 탔다. 그 때부터 내 안에서 지금의 나를 키운 공간인 이 집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2. 이 교회는 원래 충무로에 있던 건물이 좁아 더 큰 집을 짓기 위해 1970년에 역삼동 땅을 샀다. 강남이 어마어마한 경제적 가치를 얻기 전이다. 80년 서울의 봄에 마침내 건축 허가를 받아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엄청난 경제 성장과 더불어 큰 폭의 물가 상승이 있었고, 88올림픽 특수까지 겹쳐진 상황에서 교회 건축은 자금난을 겪으며 예상보다 더디게 이루어졌다. 거의 9년에 걸친 건축 과정으로 87년 이 집은 힘겹게 완공되었다. 이 예배당을 설계한 건축가 최환은 유행에 따르지 않는 모습으로 100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집을 지으려 했고 교회는 그렇게 그려진 네오고딕양식의 설계도를 그대로 승인했다. 충현교회 역삼동 예배당은 예술 후원자인 교회가 건축 예술가에게 최고를 주문하고 최선의 후원을 해서 만들어진 집이다. 몇 세기 전 유럽의 고딕 교회를 80년대 한국인이 번안한 집이라 한계는 명확했지만 처음 이 집이 보여준 서구적 풍채는 세계여행 자유화가 되기 이전 유럽의 대성당이나 교회를 직접 자기 눈으로 본 적이 없는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강력한 시각적 충격이었다. 대 예배당 내부는 전면 강단의 좌우 대칭과 장의자들을 줄지어 놓아 만든 소실점으로 모든 사람의 시선이 강단 위 마이크 끝에 향하게 했다. 개인적 종교 체험보다 로고스, 즉 성서의 원문을 더 중요시했다. 이 교회의 설립자 고 김창인 목사의 정체성은 설교자였다. 이렇게 새로 지은 예배당은 그 엄청난 크기에도 불구하고 실내가 비좁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었다.
그랬던 충현교회는 내외부의 여러 문제들로 힘을 잃었다. 성장은 멈췄고, 많은 사람들은 떠났으며 남은 사람들은 더 경직되어갔다. 새로운 것에 인색했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의 소중함을 잊은 채로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고 자신의 목회 세습은 잘못이었다고 김창인 목사는 돌아가시기 전에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그리고 2016년 교회는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했다.
이 집은 그런 세월의 풍파를 온 몸으로 다 견디고 있었다. 교회 내부의 복잡하고 일그러진 상처 뿐 아니라 건물 자체에 대한 비판도 가볍지 않았다. 몇 년 전 건축가들이 뽑은 한국 최악의 건축물 중 하나라 불리기도 하고, 중세 카톨릭의 아류 건축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미적 평가를 미뤄 두고라도 이 집은 80년대 강력했던 종교 에너지가 역삼동 언덕 위에 위치 에너지로 변환되어 남아있는 그 시대의 흔적이자 기념비이다. 그 시절 고지식했던 기독교인들이 지은 집이면서 다른 한편 80 년대 한국인이 지은 집이다.
이 두 정체성 사이의 긴장이 교회당의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신께 드리는 헌금을 구겨진 돈으로 드릴 수 없다며 은행에서 신권을 받아서 내던 사람들,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일요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절대적인 사람들,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가족들로부터 핍박 받던 사람들, 소위 예수쟁이란 멸칭으로 불리던 이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이 교회를 지은 마음은 불국사를 짓고 석굴암을 파고 에밀레종을 만들던 신라의 불교 신도들의 정성에 못지 않았다. 왜 70-80년대 한국인들은 기독교에 매력을 느꼈는지, 어떻게 해서 그곳에 그만큼 거대한 에너지가 모였는지 질문을 던지며 이 집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곳곳에 집이 스스로 말하는 여러 답을 들을 수 있다. 이런 모습을 한 것도 그 재료를 쓴 것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모두 이 집을 지은 신도들의 정신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곳이 그나마 지금의 모습을 지킨 것은 교회가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는 완고한 신앙의 힘으로 자본의 진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 교회가 가진 강남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떠나라는 요구는 자칫 이 높은 가치의 강남 대형 부동산을 거대 자본에게 넘기라는 말이 될 수 있다.

3. 이 작업은 이 집이 가진 80년대 한국 문화유적의 가치를 탐색하는 일이다. 타향에서 동대문운동장이 허물어지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바뀌는 것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십여 년의 독일살이에서 얻어진 눈, 몇 백 년 된 유럽 교회들을 동네에서 거닐며 봐온 눈, 역사의 풍화를 견뎌내고 있는 건물들을 보는 눈으로 30년 시간을 쌓아온 그 집 충현과 그 집에 있는 물건들을 본다. 몇 백 년에 비하면 길지 않지만, 우리 짧은 생에 비추면 몇 십 년이란 세월 동안 그 장소에 묶여진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은 결코 쉽게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것들은 우리가 물려받은 한국 기독교의 유산이고 한국 현대사의 유산이다. 한가지 예로 본당 강대상 위의 가구들은 당시 이 교회 장로였던 김영삼 대통령이 기증한 유물이고, 당회 회의실 어디엔가 그가 앉았던 자리가 있다. 안타깝게도 가까운 과거에 인색한 한국 사회이다 보니, 벌써 적지 않은 교회 안 내부 공간이 낡았다는 이유로 리모델링되어 원래 모습을 잃어버렸다. 지난 가을 다시 방문해서 촬영하는 내내 교회 어른들께 부디 가능한 이 집을 잘 보존해 달라고 간곡히 당부 드렸다. 혹여 더 잃어버리기 전에 이 집의 남은 옛 모습들과 지금 모습들을 기록으로 만들었다.
후대에 어떤 이름 모를 연구자가 80 년대 한국 교회사나 현대사 자료를 찾을 때 이 사진들이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세상에 꺼내 놓는다. 그들이 쉽게 찾을 수 있게 충현이란 이름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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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00721-양윤선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