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미영 展

 

조각풍경

 

 

 

갤러리 그림손

 

2020. 7. 1(수) ▶ 2020. 7. 6(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0길 22 | T.02-733-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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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풍경_194x97cm_캔버스에 아크릴, 한지, 바느질 꼴라주_2020

 

 

삶에서 추출된 이질적 요소들의 접합

제미영의 [조각 풍경] 전은 단편(조각)들로 이루어진 전체(풍경)로 이루어진다. 풍경은 이질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한데 모을 수 있는 장이다. 작품에는 선 안에 면이 그 안에 또 다른 무늬가 있고, 이렇게 이루어진 복합적 단편들이 작품의 면면을 이룬다. 최초의 재료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 만들기와 그리기를 병행함으로서 밀도와 분위기를 동시에 잡으려 한다. 바느질과 가위질, 붙이기와 칠하기는 단편들을 잇고 분리시킨다. 거듭되는 뒤섞기 과정에서 구성과 해체는 하나가 된다. 요소들이 조합되는 경우의 수는 많아서, 작가는 자신이 만든 것을 발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삶의 작은 단편들도 허트루 넘어가지 않는 풍경은 최초의 모습을 무색하게 한다. 원근법이 있기는 하지만, 평면적 단편들로 구성된 풍경은 하나의 시선에 포괄되지 않는다. 사방팔방으로 이어지는 단편에는 제각각의 시공간이 내재되어 있다. 단편들은 마치 영화 같은 방식으로 편집된다. 공시(共時)적 매체인 회화이니 만큼 공간적인 영화인 셈이다.

제작 단계에서 중요한 바느질은 단편을 이어준다. 감침질로 이루어진 촘촘한 이음매는 그자체가 또 다른 조형적 요소다. 조형적 꼴라주와 영화적 몽타주는 하나가 된다. 하나는 공간적 병치이고 하나는 시간적 병치지만, 공간과 시간은 연결되어 있다. 기억과 지각은 수시로 자리를 바꿔가며 마주한 상황을 갱신한다. 작은 구슬도 꿰면 보배가 되듯,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풍경들은 강렬한 기념비로 우뚝 선다. 현실에서 추출된 꼴라주의 단위들은 하나의 지배적 원칙이 적용되는 구조가 아니라 그때그때 삶의 굴곡 면에 걸맞게 배치된다. 추상적 원리보다는 융통성이다. 한옥집이나 연립주택이라는 공통적 소재는 비슷한 문제에 비슷한 해결방식을 낳는다. 만약 그것이 아파트같은 보편적 구조였다면, 보다 체계적인 대응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배치는 공리나 영원으로 굳어버린 추상적 구조에 대한 대안적 개념으로 부각된 바 있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창조성은 기호나 코드화 체계가 아니라, 체계를 분절하는 배치에 속한다고 말한다.

가타리에 의하면, 배치는 폐쇄되고 추상적인 구조에의 의존이 아니라, 스스로 고유한 활동에 맞게 인간의 사회생활을 기초 지우는데 있다. [기계적 무의식]은 구조와 배치를 대립시키듯이, 구조와 지도를 대립시킨다. 구조와 달리 지도는 모든 차원으로 개방될 수 있고 또 찢길 수도 있으며 모든 종류의 몽타주에 적용될 수 있다. 체계나 구조가 아닌, 배치와 지도의 방식은 삶의 다양한 국면과 조응하는 개방성을 가진다. 배치는 지도처럼 미지의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제미영의 경우 이접(離接)을 통해 나아간다. 이접은 시대의 보편 및 표준과 거리가 있는 분열적이고 이질적 양상을 보인다. 가타리는 다른 책 [카오스모제]에서 주체성 또한 이질적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이질적 구성’은 주체든 객체든 구조로 환원되거나 우연으로 해체되는 것을 지양한다.

20대 후반에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작가의 눈을 끌던 장소가 인사동, 북촌, 가회동, 삼청동의 골목길 이곳저곳에 포진한 낡은 집들이었다. 작가는 ‘그곳에 가면 친근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되어 자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를 찾아보니 고향의 향수를 대체한 장소였다’고 말한다. 즉 ‘무의식에 남아있던 기억이 비슷한 이미지를 만나게 되면서 감정전이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오래된 집들은 정물처럼 관객의 눈앞에 끌어당겨진다. 평범한 소재의 변신에는 기법이 크게 작용했다. 평소에 한복 천들을 조각보처럼 감침질을 하여 쟁여 두었다가 배접해서 보다 평탄하게 만든 후, 가는 띠 선으로 오려서 화면에 꼴라주하는 방식인데, 최근 작품에는 한지도 가세했다. 생산 연도나 생산지와 무관하게 고풍스러워 보이는 한복천이나 한지는 오래된 동네/집들의 표현에 어울린다. 서양화로 친다면 여러 층의 결과물인 색채나 질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르게 오려지는 천 조각의 펼침이 물감을 대신한다. 물론 물감도 사용되지만, 물감은 중성적인 배경을 위해 평평하게 칠해진 부분에서 눈에 띌 뿐이다. 제미영의 작품은 인상파 회화처럼 병렬된 색면/띠가 눈에서 직접 섞이기 때문에 매번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품 속 장소/집은 별천지 같지만 기시감이 있다. 색다른 풍경이지만 작가는 멀리 찾아 가지 않는다. 동네 쏘다니기는 작품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목적 없는 이끌림에 의한 것이다. 초현실주의 작품에 도시 산책자의 관점이 나타나듯, 삶과 체험이 먼저였다. 우연히 만난 사물이 낳은 상황은 의미(해석, 해몽)로 이어지는 무의식의 발견이었다. 또한 집은 ‘익숙함 속의 낯섦, 즉 기괴함’(프로이트)의 거처이기도 하다. 집 같은 일상공간에서도 할 수 있는 바느질 또한 조형적 수단 보다는, 자기 치유적 속성이 강했다. 한땀한땀의 감침질은 매번 산산이 흩어질 수도 있는 삶과 예술을 이어주었던 것이다.

인사동 일대가 생존의 압박이 이끄는 대로 진화하여 나름대로 이국적 면모를 갖추었다면, 작가는 생활의 발명품으로 가득한 청기와에 붉은 벽돌집 같은 동네 풍경도 주목한다. 서울 구석구석을 탐험하듯 개척한다기 보다는, 처음 인상 깊었던 곳을 계속 다니면서 유년기와 연결된 잃어버린 시간 찾기에 몰두한다. 그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갱신이다. 새로움이 직선적 시공간을 전제한다면 갱신은 순환하고 회귀한다. 작품 [굴뚝이 있는 집]에서의 붉은 벽돌집은 흔적 기관처럼 남아있는 굴뚝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붉은 계통의 한지를 붙이고 그 위에 얇게 오린 천들을 붙여 벽돌의 단위를 만들었다. 벽돌 뿐 아니라 건물을 이루는 크고 작은 선과 면이 모두 꼴라주로 표현된다. 바느질로 연결된 천 조각들을 또다시 잘라 붙인 띠 선은 여러 겹의 층과 면을 만든다. 집이 생활의 모든 것을 축약해서 다 쓸어안고 있듯이, 집 안팎에는 무한한 세목(細目)이 나온다.

 

 

조각 풍경_91x60.6cm_캔버스에 아크릴, 한지, 바느질 꼴라주_2020

 

 

집을 둘러싼 배경 없이 화면 한가운데 단독으로 서있는 집은 정물화같이 보인다. 19세기에 풍경을 정물처럼 표현했던 세잔은 현실과 화면의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현대미술의 시조로 평가됐다. 모더니즘 초창기에는 (대상의)재현과 (화면의)자기지시성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다. 이후 지시대상을 끊어내고 그림 자체의 자족성만을 추구했던 주류 미술사의 흐름에 모든 화가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입체파를 대표적으로, 현대미술에서 정물화는 여러 분석적 시점을 실험할 수 있는 장이 되었다. 제미영의 정물적 풍경은 큰 화면으로 제작돼도 밀도를 잃지 않는다. 화려하고 거대한 것만 주목받는 스펙터클의 시대에 보잘 것 없는 낡은 집을 구성하는 빼곡한 조형적 장치들은 신기함만큼이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친숙함 속에서 낯섦, 일상성 속의 이질성을 끌어내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에 걸맞는 일련의 언어를 이끌어낸다. 제미영의 구사하는 언어는 이질적이다.

이질성이 혼돈이 아닌 열림이 되기 위해서 최소한의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그 대상이 집이다. 집은 여러 곳에서 기원한 삶의 다양한 요소를 종합한다. 펠릭스 가타리의 [기계적 무의식]에 의하면, 언어는 수학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다. 언어는 어디에나 있지만 자신에게 고유한 어떤 영역도 소유하지 않는다. 언어는 그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활동을 특정화하는 것은, 언어가 그 자신에 준거하지 않고 모든 다른 기호화 양식을 향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구조는 차용, 혼합, 접착, 오해로 이루어져 있는 일종의 헛간(다른 대목에서는 조각 천으로 이어져 알록달록한 아를르껭의 의상의 예를 들기도 한다)이 화석화한 것이다. ‘모든 방향에서 끌어들일 수 있는 배열 체계 혹은 모든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규칙 체계’(가타리)가 중요하다. 작품 [조각 풍경]은 몇 번은 허물어지고도 남았을 낡은 한옥이다. 한옥은 손님의 관심과 선택을 위한 작은 소품들을 담고 있지만, 그자체도 갖고 싶은 소품처럼 나타난다.

배경을 이루는 노랑 평면은 작은 보물을 감싸는 포장지 같이 한 가운데에 자리한 대상을 부각시킨다. 한옥의 지붕 부분은 기와를 받쳐주는 부대 구조물이 켜켜이 쌓여있어 어느 부분보다 띠 선의 밀도가 높다. 삶의 안식처인 집은 많은 것들이 쌓여 있는 곳이다. 집 안팎의 작은 전등도 그냥 천 조각 하나로 처리 할만도 한 데, 제미영은 작은 부분들조차도 대개 2-3개, 또는 그 이상의 다른 천들이 촘촘한 바느질 땀으로 연결했다. 조각보에서 받은 감흥을 그림이라는 또 다른 축소모델의 사물 하나하나에 관철시킨다. 집 안팎에는 화분을 비롯한 식물들이 있는데, 동양화 전공의 작가로서는 거의 손과 일체화한 붓으로 휙 그리는 것이 더 간단할 법한데, 이조차 꼴라주다. 그러나 식물과 사물과는 차이가 있다. 줄기나 잎 새 등을 이루는 조형적 단위들은 더 단순하다. 물론 외곽선은 더 복잡한 가위질이 되어있지만, 식물을 품고 있는 화분에 비하면 바느질 땀 같은 인공적 연결망은 많지 않다.

내용은 형식과 연동되는 것이다. 제미영의 작품에서 식물은 집보다 먼저 였다. 서울에서의 초창기 전시인 [꽃](2005년)이나 [토끼풀의 사랑](2004년) 전에 나타나듯이, 집을 그리기 전에 자주 그렸던 것이 꽃이다. 꽃 또한 집이나 동네처럼 기억과 관계된다. 꽃은 단지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보다는 꽃집 딸이었던 삶의 이력에 닿아있다. 작가에게 꽃은 무의식에 남아있다. [길상(吉祥)-집과 꽃에 깃든 소망](2015)과 [가화(家花)-집과 꽃에 깃든 소망](2016) 전의 작품들은 집과 꽃이 함께 하는 단계이다. 제미영의 작품은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삶의 발명품들이 보여주는 경이로움을 최대한 살리고자 한다. [조각 풍경]의 집 또한 색을 제외하면 실제 형태는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집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과 마찬가지로, 총체적 의미의 설계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필요에 따라 계속 덧붙여지는 식이다. 예술작품처럼 삶도 자유로운 꼴라주로 이루어졌다.

다양한 계열의 색 면과 재질로 구성된 벽돌들은 무질서로 흩어지지 않는다. 다양함은 흩어지지 않는 여럿이라고 할 수 있다. 분홍색조라는 공통점만 가지는 벽돌은 어떤 면은 칠해진 것으로, 어떤 면은 중간에 바늘땀이 지나가는 꼴라주로 이루어졌다. 바깥의 계단 부분은 이번 전시에 처음 시도해보는 한지 꼴라주가 적용된 면이다. 옷감의 무늬처럼 한지에도 자체의 색감과 질감, 무늬가 있는데, 이 무늬들도 집 여기저기에 요모조모 활용된다. 작품 속 집에는 다양한 기계들이 보인다. 벽면에 붙은 계량기 같은 기계 내부를 가로지르는 바늘땀들은 기계의 선들과 무관한 자신만의 연결망으로 확장된다. 그것은 기계의 기능과 전혀 무관한 선이다. 그것은 창틀이나 손잡이, 화분 같은, 심지어 작은 새들의 해부학적 선과 무관한 자체의 조형적 질서를 가진다. 다른 작품에서 상점 문 앞에 붙은 카드 가맹점 표지들도 작은 조각보로 만들어 놓고야 만다.

근대 건축의 사상에 의하면 건축은 기계이다. 이 기계 안팎에는 또 다른 기계들이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오스모제]는 기계에 대한 구성주의의 정의를 인용한다. 기계는 ‘그 구성요소들 자체와 관계없이 구성요소들 간의 상호 작용들의 집합체’(바렐라) 이다. [카오스모제]는 두 가지 기계를 구별한다. 이 구별을 제미영의 작품에 적용시키면, 기계들을 포함하는 더 큰 기계(집)는 ‘외부 흐름과 단절된 코드화된 관계만을 가지는 닫힌 기계(mecanisme)’가 아니라, ‘접속에 초점이 맞춰진 열린 기계(machinisme)’(들뢰즈와 가타리)에 가깝다. [카오스모제]에 의하면 후자의 원리에 바탕 한 기계적 배치는 자신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통하여 자신의 일관성에 도달한다. 그것은 ‘죽음의 반복과 과정적 열림’의 대조를 반향한다. 삶으로부터 추출된 이질적 요소들의 접합은 현대 정신분석학이 제시하는 탈주의 모델이다.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갇혀 있는 기존의 정신분석학과 비교되는 혁명적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탈주는 끊어내고 연결하는 작업의 연속이다.

오래된 동네를 목적 없이 배회하곤 했던 작가의 무의식적 행위가 닫힌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듯이 말이다. 제미영에게 집은 자연을 포함한 세계의 요소들을 접어 넣는 일종의 틀처럼 작동한다. 형태의 차원에서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배경을 추상적 평면으로 처리한 것은, 작가가 그 대상을 자세히 관찰했듯이 관객 또한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관심에 부응한 관객의 시선을 만족시켜준다. 콘텐츠들이 담긴 화면을 빠르게 내리는 손가락에 의해 무심하게 흘러가는 정보 사회의 관례에 역행하는 셈이다. 그것은 흐름을 멈추게 하거나 방향을 전환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시작이고 사건이다. 대개 시작과 사건은 연결된다. 전시 부제이자 작품명인 [조각 풍경]이란, 천과 한지 같은 다양한 색과 무늬, 질감을 가지는 평면들이 연결된 풍경과 관련된다. 물론 그것들은 픽셀이나 모자이크 같이 단일한 단위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즉 그것들은 코드가 아니며, 코드가 아닌 한 체계적이고 일관적인 규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조각잇기로 만들어진 전체는 복잡한 레고와도 같다. 복잡함이 잡다함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것은 집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단일성과 복합성의 조화에 기대고 있지만, 일종의 팔렛트 기능을 하는, 평소에 미리 만들어 놓은 조각보 자체의 조화에 기인한다. 조각보가 그림이라는 또 다른 조각보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맞대어져도 예정된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은 응집력 있는 작품 소재, 화가로서의 훈련, 기억과 감성 등이다. 이 모두가 한데 버무려져서 순차적으로 펼쳐진다. 이러한 조형적 장치 덕분에 삼청동 가회동 인사동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다른 볼거리에 치여 그냥 지나치는 낡은 집들이 환하게 다가온다. 작가가 최초에 받았던 신선함과 설렘을 간직한 원형적 모습으로 말이다. 이 후 추가되는 조형적 장치들은 최초의 참조대상이 포함되었던 실제적 좌표에서 급격히 멀어진다.

작품은 현실이 이상이 되는 순간이다. 상상력이 중요한 작품은 그 반대, 즉 이상이 현실이 된 순간일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이든, 예술 작품은 원형적 행복의 이미지를 현실에서 발견했을 때의 감각을 보존한다. 차도 들어가지 않는 좁은 골목들에 포진해 있을 그런 집들은 한눈에 온전히 들어오기 힘들지만, 작가는 그것을 한눈에 들어오게 했으며 그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게 했다. 이전 전시의 작품들보다 크지만 배경 없는 한 가운데의 대상은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 제미영의 작품은 무늬, 형태, 색, 질감 등 모든 요소가 총동원되어 만들어진 시각적 오케스트라라고 할만하다. 큰 리듬 안에 또 다른 리듬들이 하모니를 이룬다. 작가가 즐겨 찾는 서울 도심의 오래된 마을에서, 한옥은 상점으로 리모델링된 경우가 많다. 최초에는 주거지라는 사적인 장소가 변용된 것이다. 집은 공적 차원으로 열렸으며, 예술은 또 다른 열림을 가능하게 한다. 거기에는 이전의 살림살이 대신에 상품, 또는 작품이 빼곡이 놓여 있지만, 구매된 후에 다시 누군가의 살림살이 일부가 될 것이다.

작가는 오래된 곳이면서도 새로움을 줄 수 있는 이러한 양가적 측면을 작품을 통해 확장했다. 가정집이든 상점이든 건물이라는 소재는 중력과의 관계 속에서 안정감이 필수다. 단단히 붙이지 않으면 훅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은 건축적 무게감을 휘발시킬 수 있다. 잡다(雜多)와 다양(多樣)을 넘나드는 요소들은 무게감을 헤치는 요소지만, 제미영의 작품에는 물리적 차원과도 다른 안정감이 있다. 어디로부터인가 비롯된 단편들이 우연히 자리한 곳이 원래의 자리인 양 필연화 되면, 물리적 실재감과는 다른 예술적 실재감을 낳을 수 있다. 실제의 그림자가 아니라 실재와 맞먹는 예술의 필연성은 그리기만큼이나 제작하기가 받쳐줘야 가능하다. 제미영의 작품에서 회화와 공예, 현대와 전통, 구상과 추상 등은 상충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한옥 지붕들을 전면에 포착한 [조각풍경]은 다른 색감으로 표현된 짝과 더불어 파도치는 듯한 율동감을 보여준다. 이런 집들은 땅과 보다 가까운, 그래서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던 시공의 산물이다.

 

 

조각 풍경_53x40.9cm_캔버스에 아크릴, 한지, 바느질 꼴라주_2020

 

 

아파트나 고층빌딩이 보편화된 현대는 지상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진보/발전의 목표인 양 나아갔다. 그런데 그것이 오직 한 방향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전통적 삶에서의 항상성과도 다른 획일성의 지배, 그리하여 자극은 많을지언정 그 만큼 풍요롭다고 할 수 없는 현대적 삶을 생산했다. 전통에서 현대로의 과정은 불가역적이어서 다른 방식으로만 양자가 만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예술이다. 이 작품에서 날아갈 듯한 지붕 형태를 이루는 색 띠들은 도시의 네온사인 같은 강렬함이 있다. 다른 작품들과도 다르게, 하루의 시간대를 가늠할 수 있는 배경을 물감으로 칠해서 정물적 요소보다는 풍경적 요소를 강조했다. 제미영의 한옥 은 전통, 아니 그 말이 다소간 구식으로 들린다면 자연에 가까웠던 삶의 회복을 낮지만 선명하게 발언한다. 한옥의 선들에 팝 적인 시각 요소를 가미함으로서, 존재가 아니라 관심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현대적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만든다.

분홍 색조의 팔렛트/조각보가 최대한 활용된 작품의 지붕 부분만 떼어서 보면 완전히 추상화다. 전시회 뿐 아니라 디지털 아카이브 등으로 나타날 ‘정보’로서의 작품은 스크롤 내리기 보다는 엄지와 검지를 이용한 이미지 확대를 유도할 것이다. 세부는 전체보다 더 놀라움을 줄 것이며, 자연적 환영이 아니라 자연적 실재감에 상응하는 층들이 접혀있음을 알려줄 것이다. 분홍색조로 제작된 작품과 짝을 이루는 주황색조의 작품에서 하늘은 해질녘의 시간대로 변화한다. 그곳은 용무 차 잠시 들른 장소가 아니라, 어떤 목적지도 없이 해가 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쏘다닐 만한 발견의 장소였다. 분홍색조의 [조각 풍경_골목]과 짝을 이루는 푸른색조의 골목 풍경은 길의 방향이 살짝 다르다. 산책방향에 따라 매번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풍경은 별천지의 연속이다. 그러나 실제의 도보감각에 의해 펼쳐지는 풍경은 점점 희귀해진다. 작가는 즐겨 다니던 곳들이 많이 변화했다고 말한다.

전 세계를 강타한 전염병으로 작은 상점들이 더 큰 타격을 받아 을씨년스럽게 비워진 채 먼지와 쓰레기로 덮여있다. 그러한 안타까움이 커질수록 현재의 폐허는 유토피아적 색채가 강하게 덧씌워진다. 발 빠른 컨텐츠 제작자들은 앞으로 일상화될 비대면 접촉의 시대를 대비하여 사라져 가는 골목길을 가상/증강/복합 현실 등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제미영의 작품에서도 가상적 요소가 있다. 화려하게 빛나는 색감 뿐 아니라, 모든 장소들이 고요와 적막 속에 잠긴 인적 없는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눈을 통한 여행이라는 감각이 그러하다. 눈의 여행은 화가가 보여준 동네나 집만큼이나 그것을 이루는 작은 요소들의 연속을 따라가는 과정에 내재한다. 양쪽으로 끝없이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건물의 중간 정도가 포착된 작품 [조각풍경_ 동네]는 작가가 작심한 듯 구석구석을 분석적으로 뜯어 본 시점이 두드러진다. 건물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강약이 배제된 장면은 관객이 어느 지점을 선택해도 풍부한 세부를 음미할 수 있다.

설계자가 익명일 이 평범한 건물은 기념비적인 위용을 갖추고 화면 가득 펼쳐져 있다. 거기에는 작가가 조각보에 열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과 면, 색의 조화가 발견된다. 건물은 그 아래의 화분들과 같이 있다. 제미영의 작품에서 사람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 흔적을 표시하는 소재가 바로 화분이다. 화분은 세계에 대한 축소모델인 그림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축소모델이다. 집처럼 조각조각 이어진 화분들 위로 자라는 식물들은 한지의 섬유질이 풀려진 모습이 가위자국 선명한 인공구조물과 구별된다. 똑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때로 면과 무늬를 포함한 띠선으로 조합된 화면은 원자론의 세계관과 닿아있다. 작가가 좋아하는 붉은 벽돌 이미지는 마치 원자의 입자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현실을 구성/해체하는 이미지/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원자를 레고 놀이와 비유하는 장 살렘의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레고(lego)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잇다, 선별하다, 그리고 읽다’를 의미한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 같은 고대 원자론자에 따르면, 우리가 지각하는 물체들 사이의 차이는 그것들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형태, 배열, 위치의 차이로 귀결된다. 원자론과의 비유에서 더 유효한 부분은 벽돌이나 레고 블록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허공이다. 동양화가 같으면 여백이라고 말할 것이다. 정물적 풍경을 위해 비워둔 이 빈 공간/허공/여백은 원자들의 이합집산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고, 변화된 양상을 두드러지게 표현해주기도 한다. 아귀를 잘 맞춘 꼴라주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감춰질 수 없는 틈들, 즉 불연속의 지점들 또한 허공의 존재를 암시한다. 장 살렘은 허공을 원자의 운동을 위한 조건으로 본다. 고대 원자론들과 대척점에 섰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전체는 하나이며 영원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운동이 그저 환영에 불과하다. 체계화는 점점 더 여백이 없는 세계를 만든다. 이러한 경향은 생산력을 높일 수 있지만, 동시에 착취도 억압도 위험도 커진다. 무엇보다 변화가 억제된다. 작가에게도 여백은 삶의 변화를 위한 조건이다.

 

이선영(미술평론가)

 

 

굴뚝이 있는 집_53x40.9cm_캔버스에 아크릴, 한지, 바느질 꼴라주_2020

 

 

조각 풍경_72.7x53cm_캔버스에 아크릴, 한지, 바느질 꼴라주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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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00701-제미영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