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홍 展

 

생각하는 사람 50M, 116.8x72.7cm, Oil on canvas, 2019

 

 

갤러리담

 

2020. 5. 4(월) ▶ 2020. 5. 19(화)

서울특별시 종로구 윤보선길 72 | T.02-738-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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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사람 30F, 90.9x72.7cm, Oil on canvas, 2020

 

 

삶 한가운데 자리한 죽음

 

박진홍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초상이다. 그의 작품은 일상적 삶과 철저히 단절된 그 거리에 의해 일상적 삶을 되비쳐주는 거울로 작동한다. 이 거울/작품은 때로 주체를 유폐하고 분열시킨다. 물론 그 거울은 투명하지 않지만, 거울이 원래 투명하지 않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거울과의 비유는 여전히 유효하다. 종일 그림을 그리는 이는 그림이라는 거울 안팎을 오가면서 거울의 한 면을 유일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세상을 상대화한다. 거울 이편이 현실이라면 저편은 환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어느 한 면도 온전치 못하다. 거울 저편만이 아니라, 거울 앞 또한 광기와 무관하지 않다. 광기는 이성은 반대편에 놓일 수 있는가. 정신분석학에서 문명은 광기를 낳는다고 말해지며, 철학자들 또한 이성에 잠재된 광기를 지적한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언명을 남긴, 이성의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의 예를 든다.

 

‘나는 하늘과 공기, 땅, 색채, 형태, 음향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외적 사물들이 착각이요 ....나를 속이기 위해 이용한 덫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게 손도 없고 눈도 없으며 살도 없고 피도 없는 것처럼, 아무런 감각도 없는 것처럼...생각할 것이다’(데카르트)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데카르트가 근본적인 회의의 단계 중에 광기를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지의 중심에 광기를 놓았다고 본다. 결국 광기는 사유의 사례라는 것이다. 사고와 존재, 생각과 말을 동일시하는 전제는 회의를 벗어나게 해주지만, 결국은 독단적으로 규정된 공리들에 불과하다. 이성과 광기가 쉽게 뒤집힐 수 있는 한 몸의 실체라면, 광기어린 예술작품에서 우리는 부조리와 무의미만 볼 것이 아니라, 이성과 의미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박진홍의 작품 또한 역설적인 방식으로 의미의 통로를 마련한다. 광기가 이성과 한패로 작동하는 것은 이상(異常)이 아니라, 예술작품에 본질적인 선택의 순간과 관련된다.

대상에 대한 정확한 재현과 거리가 있는 박진홍의 작품에서 광기의 몫은 모호한(무엇을 그린지 알 수 없는) 형태가 아니라, 언제 작품이 완성되었나를 판단하는 ‘결정의 순간’(키에르케고르)에 있다. 예술가에게 광기는 엄밀함과 더 관계가 있다. 이성과 광기처럼 현실과 환상도 짝패를 이룬다. 예술가는 자명해 보이는 현실에 내재된 환상성을 곧잘 들춰내곤 했다. 실재는 거울의 앞과 뒤가 아니라, 이편과 저편의 왕래가 가능한 다차원성을 가진다. 예술은 가상이나 현실이 아니라 그 모두를 포괄한 실재인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가 ‘예술적 탐구는 삶을 잊고 있는 것 같으나 삶의 모든 것을 관통한다’고 말했듯이, 실재로서의 예술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예술가가 천리안을 가진 듯이 세상의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한다. 파열까지 이를 수 있는 자아의 확장을 통해, 그것이 속한 세계 르네상스적인 비유에 의하면 소우주와 대우주의 일치를 볼 수 있다.

 

누군가 말했듯이 예술은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인데, 그 사건을 통해 작가는 나를 초월할 수 있다. 박진홍의 작품은 작업실에서 홀로 분투하는 작가의 삶을 여실히 반영하지만, 그 삶이 자신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이 치열을 넘어서 처절로 옮아 온지도 꽤 된다. 화가에게도 일상이 있다. 대개는 작업에 온전히 바쳐진 하루가 그의 일상이겠지만, 그의 작품은 화가의 일상이 다수의 일상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안전하고 밝고 따스한 일상으로부터 결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엄혹한 삶의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친근한 시공간, 예컨대 끝없는 재잘거림과 웃음으로 가득한 일상은 영원히 계속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대중의 관성을 잘 활용하는 사업은 성공한다. 약간의 기분전환을 포함한 반복적 일상을 지탱해주기 위한 항목(대부분 상품)들은 점점 많아지며,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를 요구한다. 예술과도 다른 방식으로 소비는 의미를 자처한다.

 

광고가 선전하는 이상적 삶의 이미지와 거리를 줄이려는 현대인의 갈망은 매우 강해서, 또 다른 종류의 인간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세상의 잡다한 의무들을 자연스럽게 수락하고 수행하게 한다. 만약 누군가 그런 방식으로 지배적 질서에 안착했다면, 그것은 잘 살기 위한 정상적이고도 유력한 방편으로 재현되고, 때로는 유일한 현실로 강요될 것이다. 현대의 시스템, 특히 소비와 관련된 시스템은 잘산다는 것의 모델을 재현하는 대표적 체계이다. 상징적 질서에 의해 미리 선취된 삶은 허구적이지만, 허구도 실제적 효과를 낼 수 있다. 생존본능으로 비롯되었을, 확실한 것만을 인정하는 태도가 현실을 지배하지만, 그 또한 영원하지는 않다. 인간은 우주라는 무한한 좌표 속에서 자기의 좌표를 찾아내려 애쓰며, 대개는 당대의 지배적 질서가 설정해놓은 추상적 공간 어디쯤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종종 일어나는 자연적, 인공적 재난뿐 아니라, 현대사회를 주관하는 광란의 소비/생산의 주기 또한 이러한 믿음의 시간을 점차 줄여간다.

 

일상적 세계의 바깥, 또는 안쪽의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작가는 이 근거 없는 확신을 처음부터 자기화 할 수 없는 부류였다. 현대인에게 또 다른 현실이 된, SNS 등을 가득 채우는 행복의 주인공들과 흐들흐들한 박진홍의 초상은 얼마나 다른가. 특히 최근 작품에는 초상이라고 하기에도 무색한 해체적 형상이 특징적이다. 던져져 터져버린 듯한 유기적 형상은 무엇인가를 담는 기관의 취약성을 알려준다. 화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흐름과 얼룩, 흔적들은 작가가 주도적으로 계획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우연에 개방되어 있다. 물론 우연은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필연이라는 맥락이 요구된다. 화가가 마련한, 관객이 마주볼 수 있는 빈 캔버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맥락이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텅 빈 캔버스에도 의미의 자리를 마련해왔다. 에른스트 크리스와 오토 쿠르츠가 쓴 [예술가의 전설]은 우연에 의해서 생겨난 형상이 예술가의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함을 밝힌다.

 

여기에서 상상력은 우연적 현상을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서 자연의 형상을 발견하는 능력을 말한다. 저자들은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를 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수기에서 담벼락의 얼룩을 관찰하면서 그림을 구상했다. [예술가의 전설]은 ‘혼돈의 씨앗에서 질서가 피어난다’(괴테)는 언명도 인용한다. 이러한 ‘얼룩이론’은 이후 로흐샤흐가 수행한 현대의 실험심리학까지 이어진다. 우연적 형상에서 연상되는 형태는 자연모방 보다는 영감을 중시하는 현대적 경향과 조응한다. 박진홍은 튀고 흐르는 물감을 굳이 어떤 형태로 조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작품으로 남겨둘 것인지만 결정한다. 예술작품에서 우연의 몫은 자의성 보다는 불확정성과 관련된다. 앞서 말했듯이 불확정적인 것을 확정해야 하는 단계에서 이성/광기가 작동한다. 기존의 결정론을 거부하는 현대의 물리학도 비슷하게 불확정성을 말한다. 예술은 결정에 대한 주체의 몫을 인정한다. 그래서 예술은 자유롭다고 간주된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예술을 필요, 목표, 수단 등 모든 것을 창조해야 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작품은 지극히 불확정적인 것이 극단적으로 확정된 것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에 의하면, 존재의 미확정성에 몸을 맡기는 것은 예술가의 운명이다. 그러나 그 힘에 절제를 가하는 것도 예술가의 운명이다. 내맡김과 절제 사이에서 움직이는 박진홍의 작품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묶어낼 경계가 얼마나 풀어졌든 간에, 화면 한가운데 자리한 형상을 초상으로 간주하게 한다. (거울을 볼 때 얼굴은 대개 한 가운데 자리한다.) 이번 전시작품에는 배경자체가 없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그 경우에는 얼굴이 화면 가득히 클로즈 업 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때 얼굴은 대지나 풍경이 되며, 유기적 기관을 확정짓지 않는 풀어진 경계들은 바람에 흔들린다. 물론 외부의 바람이 아니라 내부의 바람이다. 공기의 밀도나 온도의 차이가 바람을 만들어내듯, 작품 내부에서 잠재적 운동감을 발생시키는 차이들이 있다.

 

 

얼굴 100F, 162.2x130.3cm, 2020, Oil on canvas

 

 

그의 작품에서 얼굴/풍경은 사건 없는 사건의 장이 되어 수시로 변주된다. 박진홍이 작가로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육화된 언어의 특징인 침묵이 깔려있다. 자크 데리다가 [글쓰기와 차이]에서 예로 든 예술가 아르토의 방식처럼, 문자의 육화, 즉 ‘어떤 말로도 요약될 수 없고 포괄할 수 없는 공간의 창출’이 특징적이다. 육화된 언어는 대상의 외관이 아니라 대상에 내재한 힘을 표현한다. 데리다는 ‘나를 점령하는 정형화되지 않은 이 힘들을 어느 날엔가 내 이성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내 생각을 내 생명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는 아르토의 말을 인용하면서, 아르토가 추구한 잔혹극이 힘과 형태 사이의 차이를 좁혔다고 평가한다. 박진홍의 작품에도 ‘잔혹예술론’(아르토)의 논지처럼, 생명에 내재한 잔혹함이 깔려있다. 작품이라기 보다는 에너지의 분출과 흐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르토가 하고 싶었던 ‘생명예술’에 가깝다.

 

반면 우리 일상에서 생명은 경제적으로 파악된다.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생명의 경제는 의미에 대해 그러하듯, 오직 자아의 보존, 순환, 재생산에 한해 힘을 쏟는다’고 비판한다. 거의 24시간 접속 상태인 현대인은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순간 고정되어 순환하는 얼굴들과 대면한다. 실제적 이미지라기보다는 거의 이모티콘화된 가상세계의 얼굴들은 현실과는 물론, 현대 화가들이 그리는 얼굴과도 매우 다르다. 현실이 매끈한 사이버스페이스로 환원될수록 화가의 초상은 더욱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변주된 얼굴은 천상은 물론, 더 이상 추락할 지옥도 생략한 채 화면 중간에 매달려 있다. 화면 중심에 있는 대상이 뭔지 불확실하게 처리했지만, 위와 아래의 감각은 남아있다. 즉 중력감은 있다. 모든 지상적 존재들이 초월할 수 없는 힘의 반영이다. 그것은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에서도 확인된다. 인간적 삶과 가장 멀기에 가장 인간적일 수도 있는 이 형체들은 역설을 통해서만 이해 가능하다.

 

이 어정쩡한 상황이 주는 난감함에 비한다면, 인간사에 흔히 발견되는 상승과 하강의 드라마는 원래의 자리로 복귀를 약속 받은 자작극에 불과하다. 자기파괴까지 치닫는 자기연민이나 나르시시즘이 어느 정도이든 간에, 자기중심적 세계는 변치 않는 것이다.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은 작가들은 예술 밖의 현실에서 자아를 수호하고 주장할만한 여력이 없다. 작품은 자기의 극복이지 자기 확인이 아니다. 막장의 상황을 남발하는 연속극이 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드라마 시청자들은 되돌아온 중심이라는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박진홍의 작품에는 그러한 중심이 발견되지 않는다. 수많은 힘의 작용을 받아 이리저리 변형된 형상들은 나아갈 곳도 돌아갈 곳도 모호하다. 이 정체불명의 것들은 실험실의 검체처럼 공중에 떠 있다. 초상, 특히 자화상에 내재한 강한 자의식은 해체되어 있다. 자아로 간주되는 중심에 혼돈과 우연, 또는 그 흔적이 대신한다.

이미 깨져있기에 더 깨질 염려가 없는 형상들이다. 그것들은 바깥에 있다. 만약 그런 것들이 안에 있다면 밖으로 내보내져야 한다. 체계의 질서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모호한 것들은 경계 밖에 있어야 한다. 사회는 이러한 경계(금기)를 통해 유지되고 작동된다. 작가도 인간인 이상, 어둡고 춥고 고독한 바깥을 원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예술은 안에서의 자족감이 아닌 경계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필요조건을 통해서만 충족된다.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이에게 예술은 있어도 없어도 되는 장식물에 불과하다. 모든 생산의 질서에는 가혹함이 아로새겨져 있지만, 모든 것이 걸린 예술에서 특히 더 그렇다. 그 점은 근대의 저주받은 예술가의 신화가 아니어도 피차 인정하는 바이다. 이 바깥의 존재는 스스로 위험한 경계까지 나아갔거나 밀려났다. 또는 둘 다이다. 플라톤의 동굴 속 사람들처럼, 안의 질서에 동기화되어 있는 부류들이 바깥에서 만들어진 예술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진다.

 

조금의 칙칙함도 있어서는 안 되는 완벽 무결한 밝음의 코드는 나 홀로 재난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한 예술가의 상황을 별개의 현실(또는 허구)처럼 바라볼지도 모른다. 작품이 시작될 때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만의 드라마는 대중적 삶의 정상성과 안정성을 확인시키는 예로 나름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보이지 않는 현실의 문턱은 자신의 정체성을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만남 자체를 미연에 방지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대로 예술가는 예술가대로 각자의 길을 간다. 이러한 분리에 예술가와 대중 모두의 불행이 있다. 대중은 일상이라는 표면에 영원히 갇혀있는 납작한 존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예술가는 소(유)통의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세상과의 단절은 자기라는 감옥 안에 갇히게 할 것이다. 작품에 자아나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는 예술 사조의 경우, ‘언어의 감옥’에 갇히게 할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나 작가, 그 어느 쪽이든 자기변모에 있어서 뜻밖의 기회가 될 사건은 간간이 이어진다.

 

전시회 또한 그러한 사건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섬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나서 몇 년 만의 전시, 그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그의 작품이 기본적으로 초상화라는 점에서, 굳이 자연인 박진홍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예술이 작가의 삶을 조금이라도 반영한다면, 이번 전시의 작품은 그의 상태가 여전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림 속에서나마 갈갈이 해체된 형체는 가학적으로 다가온다. ‘죽음으로서 사는’ 역설어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그렇지만 예술은 현실과 다르게 극단적 상황—‘죽지 않은 채로 죽을 수 있는’(바타유)--에 대해서도 다양한 방법론을 마련한다. 슬픈 내용을 가진 음악도 다양하게 변주되는 가락은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의 기조가 슬픔으로 다가오는 자들에게 예술은 값싼 소통이나 치유를 넘어서는 유희일 것이다. 대상을 꼼꼼하게 재현하는 스타일이 아닌 그의 작품은 단번에 그려지는 동양화처럼 그려진 것들에서 선택된다.

 

전시된 작품은 많지 않지만, 종류는 다양하다. 예술가의 초상이라 할만한 작품들에는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여러 단계의 정동이 있다. 작품 [정원]은 보이지 않는 중심축을 기준으로 좌우로 선들이 곤두선 상태로, 마치 빛을 가득 받기 위해 팔을 뻗은 식물 같은 모습이다. 이 식물성 초상에서 밝은 색 부분은 빛이 느낌이 난다. 성장이나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수분과 양분을 체내에 고정시키기 위한 생물체의 움직임은 가느다란 빛 줄기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되는 치열한 삶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만약 이 존재가 작가라면, 바람처럼 스쳐가는 영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촘촘한 망을 짜야 할 것이다. 이 망이 없다면 영감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으며, 영감이 왔다 간 것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캔버스 표면은 무엇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과 무관한 여러 겹의 물감으로 덮여있다. 범죄 현장에서 수집된 대상에서 범죄 흔적을 찾는 수사관처럼 화면을 계속 확대하면서 봐도 밀도가 약해지지 않는 추상적 형태들이 이어진다.

 

층대로 분리한다면 여러 장의 초상화도 나올 수 있을 만큼, 리허설 없이 치러지는 화면 속 전쟁은 치열하다. 거기에는 쭉 뻗은 길은 없지만 끝없는 덤불숲처럼, 때로는 첩첩 산중처럼 빠져 나갈 구멍들이 계속 나타난다. 누군가는 유목이나 탈주라고 부르고 싶을 법한 정처 없는 여정이다. 유한한 화면이지만, 작가가 수없이 방황했을 흔적들은 길 없는 길을 막아서거나 조금씩 터주곤 한다. 계속 식물적인 비유를 하자면, 꽃에 해당하는 부위는 밀도가 더 높다. 붉은색 기운도 돈다. 바로 옆 푸른색은 붉은 ‘얼굴’을 더욱 생기 있게 한다. 박진홍이 오랫동안 초상을 그려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몸의 다른 부분보다 더 밀도 있게 다가오는 부분은 얼굴로 간주된다. 초상이든 아니든 관객과 마주한 길쭉한 화면의 밀도 높은 부분은 관객을 바라본다. 또는 보여진다. 화면 속 처절한 형해는 회화의 주된 감각인 시각자체에서 오는 잔인함, 또는 실제의 피 흘리는 비극은 아니라는 점에서 ‘잔혹함’(아르토)이 있다.

 

 

자화상 Self portrait 50F, 116.8x91cm, Oil on canvas, 2019

 

 

박진홍의 작품에는 보여 진 존재를 변화시키는 바라보기의 힘(관심, 공격성)이 있다. 이 무의식적 관계는 유기체의 본능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 상대를 본 것만으로도 시비가 붙은 경우가 있다. 시각성과 공격성의 관계는 자기가 자신을 바라본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주체의 냉정한 시선은 분신(分身)에게도 칼을 겨눌 것이다. 그것은 점차 강도를 높일 수 있다. 바라보기나 보여지기는 대개 안 좋은 결과를 낳는다. 그것이 적당한 수준에서 실행되었을 때,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름의 사회성을 낳는다.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아를 구축한다. 자아나 주체를 둘러싼 시선의 편재가 보여지는 자신을 의식하게 하면서 사회적 규율이 유지되는 경우이다. 다양한 정보기기가 편재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거울’은 더욱 늘어난다. 그러나 시선의 교환이 극단적으로 실행되었을 때, 타자에 관심과 ‘사랑’은 살해와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워질 수 있다.

 

시각은 사회적 규율과 선정성 사이에서 작동한다. 작품 [생각하는 사람]에서 작품 속 형상은 관객을 차분하게 바라본다. 그는 배경에 수직으로 죽죽 그어진 구조물처럼 그렇게 똑바로 있다. 그는 말하듯이 황토색 물감을 토해낸다. 머리 부분도 같은 색조이다. 그의 몸은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이상적인 깔때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방해가 될 수도 있는 매개체들을 생략하고 머릿속 상상이 바로 나올 수 있을까. ‘미디어는 메시지’가 되어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매체가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매체자체만을 지시하는 정보화 사회의 한계를 회화는 극복할 수 있을까. 회화는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기 이전에 매체의 자기지시적 속성을 확인 한 바 있다. 미디어의 자기지시성이 유아론과 만날 때 공허함은 이중삼중으로 메아리 친다. 내가 없으면서도 집요하게 내가 주장되는 현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소통지상주의 사회의 몸통을 이룬다.

 

작품 [자화상]에서 여백 없이 화면을 가득 메운 짙은 형상은 화면 앞으로 당겨온 초상이 떠오른다. 밝게 처리된 턱 선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한 정동을 표현한다.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한 기둥처럼 얼굴을 관통하는 굵은 선, 위로 치켜 뜬듯한 한쪽 눈을 찾을 수 있다. 완성이 아닌 완성을 향한 도정에 있는 조형적 요소들이 서로 보충하면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나간다. 어두침침한 화면에서 눈과 이마 부분은 빛을 내뿜는 듯하다. 바탕과 형태가 구별될 수 없는, 죽음에 가까운 혼돈 가운데서 분투하는 주체는 비극적 영웅으로 다가온다. 색이 많지 않아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형태가 분명한 작품 [생각하는 사람]는 아래로 시선을 향한 어떤 인물이 연상된다. 그의 초상은 식물부터 광물적 형상까지, 비루함부터 영웅적 면모까지 다양한 계열로 펼쳐진다. 이마와 뺨의 하이라이트는 움푹 패인 눈 부분을 강조한다. 배경과 같은 색조와 붓 터치로 형상화된 실체는 배경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배경과 형태를 구별하는 경계가 동일성을 구축하고, 그렇게 확고해진 주체가 세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존재라면, 박진홍의 방식은 이 경계를 가변적으로 만든다. 흙에서 나왔지만,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흙과 대별되는 그 살아있는 유기체가 애써 잊고 싶은 죽음의 그림자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죽음이 있을 때 나는 없다’(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 논리는 삶보다도 더 확실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유보한다. 그 형상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경계의 해체는 죽음을 떠올리지만 해체된 형체들에는 여전히 에너지가 있다. 무엇으로 변주될지 모를 풀린 선들은 타자의 시선을 포함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이 존재는 유령처럼 또는 성자처럼, 인간이 거주하기 힘든 과도기적 시공간에 걸처 있다. 허공 속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은 형상은 죽음을 떠올린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현대의 예술작품에 선명한 죽음의 양상을 분석한다.

 

그는 말라르메나 릴케같은 작가들을 연구한 대목에서, ‘허무 속에서 기이한 긍정의 능력을 얻듯이. 나의 죽음이란 맨 마지막 순간의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삶의 내밀성과 깊이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순간부터 죽음이 있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을 이룬다.’고 말한다. 블랑쇼는 현대의 작가들이 죽음과 아무 관계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으로 눈을 돌리게 하여 죽음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말한다. ‘화가는 배고픈 직업이다’는 항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죽음과의 내밀한 관계가 예술에 존재한다. 블랑쇼는 죽음을 마지막으로 여기는 인간이 죽음에 얽매여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술가가 작품에 얽매여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예술가는 ‘소멸의 환영 속에 스스로 나타날 수 있는 자’, ‘죽음을 자기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가 되며, ‘예술은 죽음과 삶, 이 두 영역을 합쳐 더 넓은 통일된 공간을 이룬다.’(블랑쇼)

 

자유로 간주되는 예술의 특징은 그것이 죽음까지 포괄했기 때문이다. 박진홍의 작품은 명확한 의미와 연결될 형태가 아닌 형상들이 지배한다. 들뢰즈가 분석한 현대회화처럼, 빈 바탕은 재현을 거부한다. 형태가 재현주의의 산물이라면, 형상은 모종의 형태가 행위나 흔적들로 변모된 상태를 말한다. 그의 작품들에서 형상은 보고 이해하고 의미를 확정 짓기보다는 상상하게 한다. 그것을 앎을 통한 소유와 지배를 배제한 어정쩡한 형체들이다. 작품 [얼굴]은 낭비나 소란과 연결된 분탕(焚蕩)질을 떠올릴 수도 있다. 나는 그 와중에 통통한 젖살이 남아있는 아이의 실루엣을 본다. 그러나 왼쪽의 뒤통수 부분의 흩어진 선들은 죽음 또한 떠올린다. 이때 체액과 물감의 비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 앞과 뒤의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형태를 그리고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색이 하나로 움직인다. 영감과 산물이 동시적이다.

 

이러한 방식은 추상적 화면을 낳는다. 미술사에서 추상은 좀 더 일관된 회화적 논리로 나아가, 바탕과 구별 되지 않는 균질한 밀도의 선 또는 색 면을 향하게 된다. 그러나 박진홍의 경우, 비중이 크든 적든 바탕이라고 간주될 부분이 존재한다. 바탕 위에 색선이 얹혀지면서 어떤 형태를 구성/해체한다. 수 십 년 간 지속된 그의 작업 이력상, 이미지의 형태는 얼굴로 추정된다. 작품 [정원]에서 화가가 그린 얼굴을 이룰 다양한 조형요소는 조직되어 있지 않고 하나하나 떨어져 나와 쌓인다. 여백과도 같은 빈 바탕에 둥 떠있는 선들이 어지러운 작품 [얼굴]은 언뜻 왼쪽을 바라보는 옆모습을 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에서 신경질적인 선을, 어떤 이는 거기에서 카타르시스적인 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희끄무레한 색도 가세한 칠하기는 그리기에 지우기를 포함시킨다. 경계가 없는 울뚝불뚝한 색선들은 바탕에서 나오는 중일까, 바탕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또는 나타남과 사라짐이 반복되는 과정일까. 그것은 영원회귀의 신화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변화만이 계속되는 어떤 상황에 대한 비유다. 박진홍의 작품은 어지럽게 그어진 듯하지만, 밀도 높은 화면을 눈으로 뒤적거리다 보면 다양한 형상이나 상황이 연상된다. 많은 작품에서 보이는 스크래치는 상처 또한 연상시킨다. 상처와 그 흔적은 중층적이다. 어떤 상처는 아물었기에 그 다음의 흔적도 가능했을 것이다. 치명상도 있을 수 있지만, 상처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특징이다. AI가 더욱 일반화될 가까운 미래는 살아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구별 또한 중요해질 것이다. 작품 [정원]은 대개 하나의 인물이 화면을 차지하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두 인물이 공존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길쭉한 화면 하단의 인물/형상과 화면 상단의 밝은 피부 빛의 인물/형상은 마치 남성과 여성처럼 대조된다. 그것은 초상이 아닌 풍경이다. 얼굴 안에 풍경이 있듯이, 풍경 안에도 얼굴이 있다. 삶 한가운데 죽음이 있듯이 말이다.

 

이선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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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00504-박진홍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