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운 展

 

화려한 풍경 Splendid scene

 

달빛_72.7x60.6cm_Acrylic on canvas_2018

 

 

갤러리나우

 

2020. 3. 10(화) ▶ 2020. 3. 30(월)

Opening 2020. 3. 12(목) pm 6

서울특별시 강남구 언주로 152길 16 | T.02-725-2930

 

https://gallery-now.com

 

 

화려한 풍경_130x97cm_Acrylic on canvas_2019

 

 

신세계는 없다, 그저 삶이 있을 뿐

 

바다를 건너온 가족이 마침내 육지에 도착했다(도착 1, 2, 3, 4). 그리고 무사히 도착한 걸 자축이라도 하듯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빠와 엄마, 아들과 딸, 그리고 개 한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엔 그들이 타고 왔을 나룻배 한 척도 보인다. 작가는 이 그림을 <도착>이라고 불렀다. 그저 평범한 가족사진의 정경에 머물렀을 그림은 그러나 도착이라는 제목과 함께 범상치 않은 의미를 얻는다. 사실 앞서 서술한 그림 속 정경은 도착이라는 제목이 있었기에 그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어쩜 도착이라는 제목은 그림 이상으로 의미심장하다. 다시, 그들은 바다를 건너 육지에 도착했다. 그렇담 그들이 건너온 바다는 뭔가. 삶이다. 삶이라는 바다다. 나룻배로 건너기엔 쉽지 않은 바다다. 그럼에도 여하튼 그들은 바다를 그러므로 삶을 건넜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육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림은 삶을 비유하는 알레고리가 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시점에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마침내 성공적으로 육지에 당도한 걸 안도하는 것일까. 이제 힘든 고비는 넘겼다는 자신을 대견해 하는 것일까. 그림 속 정황이나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바다가 삶이라면, 육지는 또 다른 삶이다. 도착은 또 다른 시작이고, 종착점은 또 다른 시점이다. 도착은 막간과도 같은 분기점은 될 수 있어도 종점일 수는 없다. 그렇게 작가는 아마도 이즈음에서 한 번쯤 자신의 삶에 분기점을 찍고 싶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점을 앞두고 크게 한번 숨 고르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동안 작가의 그림이 뭔가 달라진 것 같지가 않은가. 그동안 작가에게 일어난 신상 변화를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분명 달라진 것이 있음을 느낀다. 표정이 사라졌다. 이런저런 그림 속에 작가 고유의 해학과 풍자 그리고 유머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싸해진 느낌이 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내면적이라고 할까. 무표정하고 내면적인 사람들의 표정에 비해 보면, 오히려 개의 표정이 살아있다. 신세계를 앞두고 뭔가 걱정과 염려가 역력한 표정이 사람들의 속말을 대신해주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당도한 신세계는 작가가 보기에 어떤가. 아마도 작가의 자화상(달빛)일 것인데, 무표정한 얼굴에 비해 무릎을 감싸 안은 깍지 낀 손의 표정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결의? 걱정? 염려? 두려움?)를 하는 그림 속 정경에서 그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작가의 또 다른 자화상(돼지 안은 남자)으로 그려진 그림 속 돼지(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그러므로 어쩜 작가의 분신인)의 경계하는 눈빛이 그 심경을 재확인시켜준다. 어른이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떤가. 어른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를 타고 있는 사내아이를 새 한 마리가 염려스럽게 쳐다본다(꿈꾸는 나무). 그런가 하면, 그가 누운 해먹은 꼭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껴입은 듯 도무지 편해 보이지가 않는다(해먹).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것이 꼭 머리만 큰 어른아이를 보는 것도 같다.

지금까지 작가의 그림에는 해학과 풍자, 유머와 위트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그림들도 있었다. 어쩜 해학과 풍자, 유머와 위트에 가려 잘 보이지가 않던 작가의 무의식이 수면 위로 드러나 보이면서 보다 적극적인 형식을 얻는 경우의 그림들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무의식이 보아낸 삶은 공허하거나 죽기 아님, 살기다. 이를테면 여기에 말타기 운동기구에 올라탄 남녀가 있다(horse riding). 눈빛을 보면, 남녀는 저마다 자기 생각 속에 빠져있는 것 같다. 운동 따로 생각 따로인 것 같은, 도무지 운동이 운동 같지가 않고 휴식이 휴식 같지가 않은 겉도는(심심한? 자못 진지하게 말하자면 부조리한?) 일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빛은 하릴없이 허공을 헤맨다. 그렇게 허공에서 길을 잃은 눈빛처럼, 삶은 공허하다(작가의 다른 그림들에 등장하는 담배 피우는 여자들도, 공허하다).

아니면 한 몸으로 엉겨 붙어 죽기 살기로 싸우는 레슬러 혹은 격투사처럼 삶은 밑도 끝도 없는 싸움의 연속이며,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생존게임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ultimate fighting). 해학적인 그림이 설핏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래도 삶은 대개 치열하고(차라리 처절하고), 잘해야 공허하다. 삶의 실상이 꼭 그렇지가 않은가. 너무 비관적인가. 밀란 쿤데라는 느끼는(그러므로 겪는) 사람에게 삶은 비극이고, 보는(그러므로 관조하는) 사람에게 삶은 희극이라고 했다. 이처럼 웃기지도 않은 삶의 실상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만든다.

주지하다시피 예술은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화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경험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추상하는 기술이다. 작가의 그림은 서사가 강하고(사람들은 곧잘 작가를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한다),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편이다. 이웃이며 주변머리로부터 소재를 끌어오는 것. 이처럼 작가 개인의 경험을 서술한 것이지만, 사람 사는 꼴이 어슷비슷한 탓에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여기서 공감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비슷한 것에서 차이를 캐내는, 평범한 것에서 범상치 않은 의미를 읽어내는 능력에, 혜안에, 태도에, 그리고 그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존재에 대한 연민에 따른 것이다. 이런 연민이 없다면 작가의 주특기인 해학도, 풍자도, 유머도, 위트도 없다.

 

-고충환(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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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00310-최석운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