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주 展

 

고도를 기다리며

 

 

 

갤러리 도스

 

2020. 1. 22(수) ▶ 2020. 2. 3(월)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길 28 | T.02-737-4678

 

www.gallerydos.com

 

 

아뇨, 난 후회하지 않아요 (Non, je ne regrette rien)_acrylic on canvas_117x53cm_2019

 

 

고도를 기다리며

 

깊은 절망과 슬픔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내가 말하려는 슬픔은 은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무게의 것이며, 나의 기다림은 슬픔 뒤에 남겨진 시간이다. 이렇듯 설명할 길 없는 애매모호함을 드러내려는 나의 작업은 시 쓰기의 방식을 닮아있다. 슬픔이 두고 간 기다림의 시간에서 벌어지는 내면의 서사와 심상을 그림으로 적어보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을 형상과 색으로 추적해 가는 작업과정은 또 다른 색으로 변한 슬픔의 성격을 이해하고, 현재 머물고 있는 좌표가 어디인지 탐색하게 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슬픔을 다루고 음미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남았다. 그래서 난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난 슬픔 속에서 무엇이든 \'진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만났고 그것들은 슬픔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진짜\'로 남아있다. 슬픔이 내게 준 ‘진짜들’과 상흔들을 모두 소중하게 모아 내 삶 곳곳에 심어놓았다. 그때 내가 슬픔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어디서도 슬픔을 알아보고, 다가가고,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나로 남을 수 있었고, 슬픔 자체가 되지 않아도 슬픔으로 머무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글을 쓰듯 그림을 그렸다. 어떤 사건을 잊기 위해 다른 서사로 재구성하거나, 기억하기 위해 당시의 환경을 종이 위에 기록했다. 이것들은 남에게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읽히기도 하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되곤 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끄집어내고 싶었던 것들은 서사의 일부가 아니라 때마다 느꼈던 내 안의 깊숙한 무언가와 측정 불가능한 무게들이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곳과 그 시간의 온도를 표현해 내는 데까지의 분투는 슬픔과 희망과 고통과 평화가 불꽃 튀며 충돌하는 격렬한 전투와도 같았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일어났다. 나의 투쟁은 내가 찾아내야 할 온당한 색을 밝히는 데에서 비로소 밖으로 드러난다. 철저한 계산 끝에 완성되는 색이 아닌, 결코 찾을 수 없음에도 가닿기 위해 문대고 덧입히고 밀어내고 닦아내며 그 언저리를 찾는 것이다. 한없이 무모해보일 뿐이다, 바람의 색을 찾듯. 숨을 쉬듯 끌어내리고 올리고 쌓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있는 곳과 자못 유사한 지대가 지면(紙面) 위로 천천히 일어서기 시작한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 속에서, 묻어 둔 것들이 난데없이 일어나 나를 울리기도 하고, 없었던 것들이 생겨나 자라기도 하며, 무겁고 거대한 것들이 가볍고 빛나는 것들이 되어 어깨위로 제법 다정히 내려앉기도 했다. 나는 이 덧없이 가벼워지는 쓸쓸한 풍경에서 찰나에 가슴을 뒤흔드는 열망의 순간을 끄집어내고자 하였다. 이 순간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과 도래할 것에 대한 소망이 공존하는 것이리라. 어느 순간 ‘고도’가 사라진 나의 기다림은 유한한 존재인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자리에서 ‘인간’으로서 가야할 길을 생각하게 하였다. 나를 이 지난한 기다림 속에서 건져줄, 내가 기다리는 ‘절대적 타자’인 고도는 어쩌면, 내 스스로 고도가 되기로 결정한 바로 그 순간 만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여인을 사랑해 인간이 된 천사처럼, 창조한 인간을 사랑해 인간으로 온 신처럼; 불멸의 존재가 필멸의 운명으로 뛰어드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바람 속 먼지 (Dust in the wind), Black ink and tempera on Korean paper_162.2x520cm_2019

 

 

누구에게나 오는 순간 (Alight on light)_oil and acrylic on Korean paper_162x130cm_2019

 

 

다르게 흐르는 시간 (Perception of time)_Black ink and acrylic on Korean paper_160x390cm_2019

 

 

머뭇머뭇 (Hesitating)_Black ink and gouache on Korean paper_162.2x130.0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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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00122-한선주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