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영 展

 

 

 

 

2019. 3. 29(금) ▶ 2019. 4. 10(수)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36길 20 | T.02-396-8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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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영의 수묵화

박영택 / 미술평론 · 경기대교수

결정적인 단 하나의 선을 긋는다는 행위가 동양에서는 ‘예술’로 이해되어왔다. 그 선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선이자 정신인 경우에 그렇다. 그러니까 그 선은 몸과 정신이 의탁한 수단인 셈이다. 동양화라는 것이 그렇고 서예나 전각이 다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 일자 한 자를 쓰는 것만 보아도 그의 필력과 수련기간, 성품이나 학식의 정도까지 측량했던 것이 선인들이다. 선 하나를 온전히 쓰거나 그려 내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동진 시대 왕씨 가문은 명문거족이면서 특히 서예에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황희지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대 중국에서 서성(書聖)의 칭호를 받았던 몇몇 서예가 들 중에서도 유독 그만이 서성 중의 서성, 즉 계관서성의 영예를 받았다. 이 왕씨 가문의 교육은 엄하기로 소문났으며 자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익혀야했다. 왕희지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일곱째 아들인 왕헌지는 매우 총명하여 서예솜씨 또한 일품이었는데 다만 놀기를 좋아하는 것이 흠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왕희지는 어린 아들을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그 곳에 놓여 있는 18개의 큰 물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대. “글을 잘 쓰는 비결은 모두 이 물독 안에 있다. 네가 이 안의 물을 다 쓰고 난 후라면 너는 비결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18개의 물독교훈은 동양에서 그림과 서예의 수련에 대해 중요한 내용을 전해준다. 사실 어느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다는 것은 전적으로 ‘엉덩이의 힘’이다. 물론 오늘 날 현대미술은 엉덩이 대신에 머리와 감각, 개념과 정보가 우선시 되는 추세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그 시간의 축적이다. 그런가하면 동양의 서화가들은 사람들이 소나 양의 가죽을 벗겨 낼 때, 그것을 유심히 관참하여 그 가운데에서 영감을 덛었다. 또 하늘을 나는 기러기나 물 속에서 노니는 물고기, 사슴들이 뛰어 다니는 모습, 고삐 풀린 준마의 모습 등을 관찰하였다. 모든 대자연을 그림과 서예 속에 녹여 넣었던 것이다.

 비록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리지만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데 있더, 특히 동양화 작업은 무엇보다도 그런한 필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는 전적으로 시간에 비례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누가 그 더디고 무거운 시간의 층은 견디고 싶어하며 자신의 일상적 삶의 환경과 보이는 모든 것들에서 깨달음의 시선을 차분하게 드리우고ㅛ자 할지 궁금하다.

 

 

 

 

강신영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자신의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추려니는데 바친다. 수 백장을 반복해서 동일한 소재를 그리는 과정에서 대부분은 파지가 되어 버려지고 한, 두 점이 그에게 선택되어 살아난다. 어쩌면 그의 그림 그리기는 실패를 반복하는 광정에서 비로소 의미가 살아나는 것 같다. 그것은 작품을 만들고 무엇인가를 완성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에게 납득할만한 분위기, 충만한 정신, 보이지 않는 기운 등이 조화를 이룬 상태에 대한 동물적 감각의 그물에 걸려드는 것만을 골라내는 상당히 까다로운 감식안이 이루어지는 고행 같기도 하다. 하긴 모든 예술가들이 그럴 것이지만 이 작가는 우별나게 그런 과정을 익숙하게 체득해낸다.

똑같은 소재가 무수히 반복해서 그려진다. 여기서 반복이란 수치와 시간의 양은 무의미하다. 다만 현재의 시간만이 온전하게 내려앉는 그 시간에 그림에 집중하는 자기 마음과 정신이 일치하는 거런 접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몰입하기도 하고 무아의 경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는 그림을 통해 다분히 선적인 것의 체감에 기운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흡사 선화에 무척 가까워 보인다. ‘달마’ 대신에 호랑이나 나무, 집과 풀 등이 가득하다.

 

 

 

 

수묵으로 그려진 이 소박하고 단순한 선화는 종교적인 뉘앙스에서 자유로운 반면 순간순간 자기 마음을 지배하는데 공력을 기울인 자취가 형상화되어 나온 그런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는 상당히 즉흥적이고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려나간다. 수시로 돌변하는 상황과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관찰하고 그렇게 떠오르고 스쳐 지나가는 모든 단상과 이미지들이 그물에 걸려들 듯이 희 바탕의 종이에 순식간에 놓여진다. 그는 그렇게 떠도는 이미지를 잡아채서 내려놓는다. 몇 번의 붓질과 선염, 여백 등이 긴장감있게 ‘조여지는’ 그런 상황에서 종료된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그림 그리기는 무엇보다도 타이밍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그는 시간을 건져 올린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모두 충만한 정신과 마음의 파고가 일시에 비등점에 올랐을 때 멈춘 것이고 남겨진 것이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주술사나 명상가, 정신적 존재로 거듭나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가 시골에 박혀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하고 세속적인 일과는 무관한 삶을 살며 스스로를 유폐시켜 사는 이유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보호받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그림은 그런 삶에 대한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서 더욱 자랑스런 그런 보상으로 자리한다. 이 자의식과 작가정신은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삶의 환경(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의 의지)에서 나온다.

앞서 언급했지만 그림의 소재는 일상에서 자연스레 건져 올린 이미지들이다. 기와집과 나무, 호랑이 등도 띤다. 그것들은 구체적이 대상의 재현도 아니고 무거운 주제 아래 놓여진 형상도 아니다. 기호에 가깝다. 그는 빈번히 이 기호들을 가지고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한다. 선적인 언어 말이다. 여기서 수묵은 효과적인 매체가 된다. 그는 먹이 보여주는 매력적인 여러 효과와 맛에 매료되어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먹 색에 흠뻑 취해있다. 먹 색이 보여주는 무궁무진한 색 층, 색 역이 그럴 것이다.

 

 

 

 

근작은 수묵의 표현적인 효과에 충실한 것들이다. 눈에 띄는 것은 여전히 ‘선’이다. 필선들이 자아내는 힘과 조형성, 단순하고 함축적이지만 기운이 넘치는 그런 모필 구사에 가장 진력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반면 조형체험이 지나치게 단조롭거나 너무 한정적인 그림 그리기로 자폐화 될수 있다는 아쉬움도 든다.

 강신영은 오늘날 자유로운 작가 상, 고전적이고 전설적이며 신화적이기까지 한 작가 상을 구현해내는 그런 자부심과 조심스러운 열절이 한데 녹아있는 수룩화를 선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수묵화를 어떻게 논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여기까지 글을 쓰면서도 내게는 그의 수묵화가 그림이기 이전에 너무 뜨겁고 너무 단단한 자의식과 또는 가늠키 어려운 자유로움이 한데 엉켜있는 복합적인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완성과 미완성, 걸작과 졸작이라는 구분 자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는 이 미술판의 어느 한 부분을 의식하고 있기야 하겠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 논산 연무대 농가에 마련된 자신의 거주공간, 작업실에서 하염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농부들이 경작을 하듯, 계절과 우주자연의 순리에 따라 식물을 가꾸듯이 그렇게 그려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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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90329-강신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