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귀옥 초대展

  

 

 

 

2019. 2. 8(금) ▶ 2019. 2. 28(목)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36길 20 | T.02-396-8744

 

blog.naver.com/kimboseong66

 

 

 

 

그림으로 쓰는 시
- 조귀옥 작가의 ‘야생화’ 탐방

시와 그림은 서로 닮아 있다. ‘시는 말하는 그림이고, 그림은 말 없는 시”라고 했다.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시는 마음의 소리요,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그림은 마음의 형체다. 즉 시와 그림은 방식만 다를 뿐 결국 작자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술인 것이다. 이와 관련, 중국 송나라 때의 대문장가이자 시인이었던 소동파의 말은 유명하다. 소동파는 당나라 왕유가 그린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를 보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라는 뜻의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를 유산처럼 남겨놓았다. 이야기적인 요소가 많았던 왕유의 그림은 그림으로만 머물지 않고 소동파로 하여금 그 그림에 어울리는 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림과 시를 넘나드는 미학적 순환과정을 겪은 소동파의 예술체험은 동양 예술론의 형상적 특징이면서 장르적 본질을 나타내는 미학 개념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시는 언지(言志), 즉 자기의 뜻을 말로 표현하는 언어예술이다. 그러나 관념이나 사상, 감정 등을 말로 전달할 경우 모호함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주관적인 상상력을 객관화된 이미지로 형상화하려 한다. 묘사나 비유, 상징 등을 통해 마음속에 구체성을 띤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는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 나타내고자 하는 중심내용을 뚜렷한 이미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작자 또는 화자의 감정이나 분위기, 정서 등을 드러낼 수 있다. 시가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것이 ‘시 속에 그림이 있다’라는 ‘시중유화’의 의미겠다. 반면에 그림은 구도, 색채, 음영, 농담으로 표현하는 시각예술이다.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화중유시’는 그림이 뜻과 이야기를 품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시중유화’는 시가 풍경 또는 사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시가 표현한 풍경에 의미나 사상이 무궁하다는 뜻이고, ‘화중유시’는 그림의 정취가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보다 그림이 표현한 정취에 의미와 사상이 깊고 무궁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시와 그림은 잘 갈무리된 지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근원의 존재에 대한 오랜 번민과 탐구의 결과물이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이해하고 다가서는 뜨거운 마음의 산물이다. 위대한 작품은 우리에게 예술을 넘어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들과 대면하게 만든다. 예술을 통해 발현될 수 있는 진실이 있다고 믿는 것은 이런 질문들이 불가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근원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과 질문을 통해 내적인 성찰을 꾀하는 화가가 있다. 우연히 소개받아 알게 된 조귀옥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손톱으로 툭 튕기면 쨍 하고 금이 갈 것 같은’ 가을 하늘이 밑그림처럼 펼쳐진 날, 북한산 아래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차곡차곡 옆으로 포개져 세워져 있는 수많은 화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밖은 청명한 햇살로 눈 부셨고, 안은 짙푸른 색감으로 출렁거렸다. 몇 개의 화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화판마다 푸른색이 출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푸른색은 무한의 공간을 상징한다. 무한대로 펼쳐진 우주 공간과 맞닿아 있는 가을 하늘이 그렇고, 그 속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태평양의 심해가 그렇다. ‘푸르다’고 표현한 파랑은 사실 굉장히 다양한 상징을 가진 색이다. 가을하늘이 주는 신뢰와 안정, 행복의 파랑새로 대변되는 희망과 평화의 색이기도 하지만, 심해로 가라앉는 우울과 슬픔의 색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조귀옥 작가가 배경으로 애용하는 푸른색은 밝고 경쾌하다. 명도와 채도를 올림으로써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선물해준 그의 화집에는 푸른색 배경만큼 캔버스 천(광목)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미색 같은 흰색들도 있었지만, 푸른색의 강렬함은 나를 몽환의 세계로 인도하는 ‘앨리스의 토끼굴’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파랑과 하양으로 인해 조귀옥 작가의 그림은 차분하면서도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들뜨지 않는 침착함은 냉정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배색과는 다른 색감의 꽃을 그 위에 앉혀놓았다. 그 꽃은 장미나 백합처럼 우아함을 뽐내는 그런 꽃이 아니다. 우리가 들녘이나 산길에서 만날 수 있는 흔한 야생화들이다. 작가가 그리는 꽃은 우리가 자연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이면서, 한편으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꽃이기도 하다. 그 꽃들은 오롯이 작가의 상상 속에서만 피어나기 때문이다. 엉겅퀴나 클로버꽃의 형상을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또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꽃들은 이름이 없다. 민초로 대변되는 이 땅의 소외된 민중들, 주변부로 내몰린 타자를 연상하게도 만든다. 작가가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을 캔버스 위에 구상으로 펼쳐놓지만 실상 그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구상의 세계다.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불가해한 생각들이 이어졌지만 조귀옥 작가는 어떤 경향성을 탈피해 인간의 순수를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자신의 정신세계 안에서 순환하는 자연을 모티브로 일관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야생화 연작’은 하늘이나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색(또는 흰색) 배경 위에 꽃들이 떠 있는 모습이다. 풍경화라기보다는 정물화 쪽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정물화는 중세 이후부터 회화의 기본처럼 많은 작가들이 다루어온 양식이지만 조귀옥 작가의 그림들은 정물화의 정적인 분위기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작품의 소재가 되는 꽃과 나비 등을 작품 공간에 끌어들여 갇히고 정지된 답답한 공간이 아닌,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자연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의 피조물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자 함이다. 작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을 건넨다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그림과 나누었던 정다운 말들이 다시 새로운 꽃이 되고, 풀이 되고, 바람이 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자연에는 우리가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가시적 공간과 시간이나 의식처럼 시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비가시적 공간이 있다. 조귀옥 작가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접점을 찾아 이 두 공간의 하모니를 이루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의도하는 그림이 아닌 그림 그 자체가 움직이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그림 안에서 점, 선, 면, 색들이 서로 어우러져 그림 앞에 선 이들에게 그림 안에서의 소통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림 스스로가 설명을 하게 하여, 보는 이들에게 저마다의 감정에 맞는 그림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그림 속에 살아있는 꽃과 꽃, 꽃과 풀, 꽃과 나비가 나누는 대화와 감정의 파장이 그림 안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작가는 스스로 단 한 번도 ‘꽃’을 그린 적이 없다고 한다. 그날그날 자신의 감정이 이미지로 구현되는 것을 화판 위로 옮겼을 뿐이란다. 그 때문인지 그의 그림들은 모두가 닮아 있다. 그것은 비슷한 이미지들이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순차적 변이에 대한 기록이자 순수를 향해 나아가는 진행형의 표현이다. 깨끗하고 정갈한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도록 그는 화판 앞에 서기 전에 몸가짐을 단정히 한다고 한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정화수 한 사발을 떠놓고 두 손을 모으듯 작가도 경건함에 경도되는 예술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도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인위적인 느낌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서다. 나이프로 물감을 찍어 바르거나 눌러 펼치듯이 꽃과 풀의 형상을 만들어간다. 작품에 따라서는 꽃을 줄기가 없이 꽃송이만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꽃들은 배경색과 어우러져 바다나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둥둥 떠 있는 이미지가 정적이고 수동적인 느낌이라면 그건 맞지 않는 표현인 것 같다. 공간 속을 자유롭게 헤엄치거나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어쩌면 그 꽃들은 작가 자신의 분신인지도 모르겠다. 물질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사람의 감정도 기계적으로 메말라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작가가 인간 본연의 순수를 찾고자 하는 그리움의 표현인 셈이다. 그것이 작가가 끊임없이 탐색하고 추구하는 진리의 본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작가는 그림과 함께 자유로워진다.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림은 빛과 바람에 따라 자유롭게 빛나고 흔들리며 저마다의 아름다운 춤을 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풍경이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눈에 그려진 것들을 담아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꽃들은 한없이 자유롭고, 한없이 평화롭고 우리에게 오래도록 마침표가 없는 평안함과 상상의 꿈같은 휴식을 준다. 하여 그의 화폭에는 봄이 없고, 여름이 없고 시나브로 앙증맞게 풋풋한 꽃들이 사시사철 피어나는 영원한 봄날의 따뜻함과 평안함으로 가득하다.”고 평한 김종근 평론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인이 그렇듯이 화가 역시 어떤 문장으로도 되돌려놓을 수 없는 감정의 여분을 이미지 또는 색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감정에 가장 적합한 소재와 색감, 채색의 강도와 방향까지 오랜 고심 끝에 선택하는 그들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언어를 포기한 자들이다.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이러한 감상은 그래서 불완전성을 잉태하고 있다. 나는 고흐의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진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소재로 한 동명 시조로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나아가 박수근 화백 그림 속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상까지 받았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알지 못하는 문외한치고는 그림으로부터 과분한 영광을 얻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관되게 흐르는 서사를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림 자체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말을 건네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기능하는 조귀옥 작가의 그림들은 내게 또 다른 예술적 영감을 준다. 인간의 순수를 자연물에 대입시키는 그의 작업은 그 의미만으로도 이미 성과를 내었다고 보여진다.
『서양 미술사』로 유명한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 이해심을 갖느냐에 따라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일반 대중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을 때 뭔가를 내놓고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외톨이가 되기 쉽다. 그런 점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조귀옥 작가의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 좋은 말은 입이 없어야 할 수 있고, 참 좋은 말은 귀가 없어야 들을 수 있다’고 한 경구만큼 조귀옥 작가의 그림에 잘 들어맞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의 본질과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임 채 성<현대시학 2018년 01/02게재>

 

 

 

 

 

 

 

 

 

 

 
 

조귀옥 | 趙貴玉 | Cho Gwi-ok

E-mail |
fivea1@hanmail.net

 

 

 
 

* 전시메일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은 작가와 필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vol.20190208-조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