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갑 展

 

혼혈인에 대한 사진 보고서

 

 

 

사진위주 류가헌

 

2018. 9. 11(화) ▶ 2018. 9. 30(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6-4 | T.02-720-1020

 

https://ryugaheon.com/

  

 

작업노트
1992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혼혈인 작업은 올해로 26년이 지났다. 물론 혼혈(이하 형님)인 사진작업만 한 것은 아니지만 형님들과 약속한 3가지 중 두 가지는 지켰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약속만 남아있다. 요약하면 첫 번째는 평생 형님들과의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이고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형님들의 역사를 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이다. 완성되거나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2005년 10월 눈빛 출판사에서 “또 하나의 한국인”이라는 중간보고서 성격의 사진집이 출간 되었다. 당시 사회적 이슈(하인즈 워드)와 맞물리면서 가수와 연예인으로서의 혼혈인이 아니라 실제 한국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있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로부터 4년의 시간이 흐른 2009년 9월 ‘한국혼혈인협회’의 정신적 지주였고 기둥이었던 박근식 회장이 지병인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당일 화장을 하고 먼저 돌아가신 어머님이 모서져있는 충북 괴산의 작은 암자로 모셔진다고 했다. 큰 대형버스에 3일 밤낮을 같이 있었던 형님들을 비롯한 저는 당연히 함께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족들의 반대로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돌아가신 형님을 직접 만날 뵐 수는 없었다. 벌써 9년이란 시간이 흘렸지만 여전히 찾아갈 수가 없다.

1970년 초여름, 대한민국에 ‘혼혈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혼혈 청년 박 근식(피터)은 부산으로 무작정 내려갔다. 그곳에서 서울 행 완행열차를 타고 양복안주머니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필 진정서를 넣어두고 수면제 수십 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한 것은 외국인 선교사였다.

순식간에 전국 신문지면을 통해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혼혈인 처우개선을 위한 재단과 교육시설이 만들어지고 일정교육기간이 지나면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었다. 당시 대통령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의 도움으로 지금의 부천시 소사구 소재 유한양행 부지에 펄벅 재단을 설립,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남다른 손재주를 가졌던 박 근식은 용접에서부터 전기전자 등 손으로 직접 만들고 제작할 수 있는 일들을 했고 의기투합한 동료들과 작은 농장을 지어 삶을 이어나갔다.

한참 전국을 다니며 혼혈(형님)인이 있는 곳이라면 제주에서 강원산골 어디든 찾아다녔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근식 한국혼혈인 협회회장이 어느날 나에게 “어디 이씨”냐고 물었다. 자연스럽게 저는 “경주 이가”고 익제공파 38대손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자신은 “빌린 박씨”라고 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당시에는 웃으면서 그랬다. 어머니의 성(밀양박씨)을 따라 박씨 성을 따랐지만 자신은 밀양 박씨가 아니고 “빌린 박씨”라고 했다. 그러면서 호탕하게 웃었는데 당시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몸이 아픈 것을 알면서도 삶에 있어서는 늘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있었다. 그러나 3일 낮밤을 같이 있으면서 그동안 만났던 순간순간이 기억났다. 한국 혼혈인들의 산 역사이자 고통을 넘어 대한민국 이 땅에 혼혈인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음으로 양으로 자신들의 외침을 들려주는 그 어떤 곳이든 찾아갔었던 형님이었다.

그러나 형님이 돌아가시고 많은 것에 있어 변화가 있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 달에 두세 번 이상 찾아가던 만남도 뜸해졌고 매달 모이던 만남역시 그렇지 못했다. 몇 년 동안 이어온 형님들과의 인연은 물론이고 자주하던 전화도 뜸해진 어느 날인가 갑자기 형님생각에 서러움이 복받쳐 서글픈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불현 듯 형님들의 이야기가 여기서 마무리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작업으로서의 슬럼프가 아니라 다른 작업으로 인해 자주 찾아뵐 수 없다는 미안함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이 서로 엇갈리면서 형님의 “빌린 박씨” 이야기 생각이 났다.

한국에서의 혼혈인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문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된 형님들의 삶이 26년 이상의 만남을 지속하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출생과 깊은 연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형님들이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바로 어머니와 자녀에 대한 이야기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자손들은 성장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또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1세대인 형님들과는 다른 가치관과 생각으로 가까이 가거나 사진으로 촬영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실제 촬영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결혼식장 혹은 전체 모임에서가 전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혼혈인 2,3세는 태어나고 자라고 있다. 평생 혼혈인의 권익신장과 권리를 위해 평생을 살다가간 형님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장례식장에서 뿌연 먼지와 함께 사라진 유족들과 형님의 혼백이 담긴 유골함을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때 결심했다. 형님들하고 약속한 두 가지는 지켰다. 하지만 나머지 한 가지는 내가 스스로 약속을 했다. 형님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얘기한 ‘빌린 박씨‘ 이야기를 제목으로 혼혈인 2,3세대의 삶을 사진과 책과 전시로 마무리하고 판매된 수입금으로 작은 추모비를 만들어 형님 영정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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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80911-이재갑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