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국화여성작가회 제19회 정기展

 

‘ 緣 - 필연적 관계성 ’

 

 

 

조선일보미술관

 

2018. 5. 30(수) ▶ 2018. 6. 4(월)

세미나 | 2018. 5. 30(수) 오후 4시

개막식2018. 5. 30(수) 오후 5시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61 | T.02-724-6322

주최 | 한국화여성작가회 | 전시기획 | 신항섭 (미술평론가)

 

 

 

緣 - 필연적 관계성

신항섭 (미술평론가)

 

화가의 일상은 자연인과는 좀 다르다.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풍경이나 인물 그리고 정물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다. 모든 물상이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지라도 화가의 눈은 그로부터 미적인 요소를 감지해낸다. 눈에 읽힌 미적인 요소는 미적인 감흥을 야기하고 표현충동, 즉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한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실을 인지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작의욕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주어진 조건 및 현실에 대한 응당 있을법한 화가로서의 반응이다. 화가는 붓을 들기 전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재현적인 작업을 하는 경우에는 소재 및 제재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따른다. 가령 꽃을 소재로 작업하기로 결정하면 어떤 꽃을 채택할 것인지 고려하게 된다. 정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자연 그대로의 꽃을 그릴 것인지를 정한 다음 원하는 꽃의 종류를 선택하고 소재를  구하러 나간다.

 

인물이나 풍경일 경우에도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이 때 작업에 대한 구상이 선행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어떤 형태의 작품이 될 것인지 구상하는 단계에서 대략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구상단계에서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와 거기에 들어서는 소재 및 제재의 선택은 즉흥적인 결정에 의해 이루지는 것이 아니다. 이전의 작업에서 소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일 경우에도 우연적이라거나 충동적인 선택일 수는 없다. 그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또는 어떤 보이지 않는 이끌림에 의해 따르게 된다.

비록 그림이 시각적인 이미지로서의 가치를 우선한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물에 이르는 작업과정에서는 복잡한 내적인 회로가 작동하기 마련이다. 그 내적인 회로에는 의식 및 감정의 흐름이 주도하는 가운데 심리적인 요인이 개입된다. 그런가 하면 사상이나 철학적인 이해 및 숙고가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자연에 대한 사색과 사유라는 지적인 유희가 뒤따르기도 한다. 물론 비재현적이거나 비구상과 같은 형태의 작업에서는 자의적인 이미지 해석이 요구된다. 형태를 해체하고 분석하고 재구성하는가 하면 생략적이거나 단순화하고 또는 왜곡하는 등 일련의 다양한 조형적인 모색이 전개되는 것이다.

 

 

김춘옥作_자연-관계성_60.6×72cm_한지, 색지, 먹_2017

 

 

이렇듯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에는 의외로 복잡하고 번다한 정신 및 신체적인 움직임이 발생한다. 하지만 화가에 따라서는 이처럼 복잡한 작업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생략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사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데만 집중함으로써 정신 및 감정의 미묘한 흐름을 놓치는 수가 있다. 이럴 경우 그림 속에 마땅히 기거해야만 하는, 사상 및 철학 또는 문학성과 같은 작품의 큰 줄기를 형성하는 내용이 빈약해지기 십상이다.

 

비구상이나 추상도 다르지 않다. 무엇을 소재로 하든 또는 제재로 하든지 작품에는 시각적으로 읽히는 것 이상의 무엇이 담긴다. 그림이란 시각적인 이해나 즐거움만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하는 무엇을 통해 삶의 정서나 성찰을 유도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이 계몽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림은 어차피 화가 자신의 총체적인 삶의 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기에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것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그림이 정서적인 안정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삶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으로서의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결코 헛된 망상이 아니다.

 

이런 여러 문제를 감안했을 때 화가는 작품을 구상하고 소재를 선택하고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그러므로 감상자는 그림에서 시각적인 이미지 그 이상의 무엇을 찾아내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작품 하나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한 점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림 한 점에 유의미한 내용을 담는 것은 창작행위가 단순한 손의 기능이나 기술의 문제를 넘어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류민자作_오월의 나무_20호_캔버스에 아크릴_2018

 

 

이 세상에 우연적인 것은 없다. 어떤 연고에서든지 필연성에 의해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지구를 형성하는 대자연, 그 가운데서도 생물은 특히 그렇다.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근본적인 여건인 흙과 물과 햇빛을 통해 생명의 숨결이 만들어진다. 그로부터 연원하는 모든 생명체는 근본이 같으므로 어떤 식으로든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유기적인 연결감이야말로 자연이라는 거대한 생명체의 집단을 유지해나가고 보존해갈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화가는 결코 자연과의 단절을 획책할 수 없다. 아무리 추상적인 이미지라고 할지라도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어디선가 불쑥 떨어진 것일 수는 없기에 그렇다. 인간 자체가 자연에서 생성한 유기체이고, 그 유기체의 사고 또는 감정의 흐름에 의해 추상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까닭이다. 이러한 사실을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물상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이미지 또는 속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가는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나비 한 마리가 들려주는 속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긴 겨울 죽어 있는 듯이 동면하는 나무 한 그루를 지탱하는 힘은 언 땅 밑을 헤치며 나아가는 아주 여린 뿌리의 생명활동에 있다. 동면하는 나뭇가지가 새봄을 맞아 눈부신 새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은 동면중에도 수분과 영양을 끌어올리는 부단한 생명활동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생명활동은 조물주가 부여한 생명의 순환질서에 다름 아니다.

 

생명의 순환질서라는 커다란 명제를 이끌어가는 것은 다름 아닌 본능이다. 모든 생물체는 주어진 감각기관을 통해 본능을 드러내고, 그 본능을 발설하는 것으로써 생명은 유지되고 지속성을 갖게 된다. 동물적인 본능이란 생명활동을 최적화하는데 필요한 일종의 반사적인 행위이다. 생물로서의 본능이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태생적인 감각이다. 그 감각에 의해 상대와 소통하고 경계하기도 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가 부지불식간에 서로 소통하는 것도 서로의 본능을 침해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일이 아닌가싶다.

 

 

송수련作_내적시선_53×65.5cm_한지에 먹_2017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예술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명체에 장착된 본능의 회로를 이해하고 거기에 반응함으로써 시각적인 세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조형의 마법을 얻을 수 있다는 자각이 아닐까. 이제까지 그림의 소재 및 대상은 현상계에 대한 관심 및 관찰의 결과로서 얻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시각적인 이해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그림은 시각예술이라는 대전제를 충족시키기 위한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 그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아주 조그만 노력만으로도 지금과는 다른 조형세계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의식세계 및 감정의 흐름 또는 잠재적이고 무의식적인 흐름을 이끌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대자연을 소재 및 대상으로 하는 전통회화에서는 생명의 순환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생물체의 내밀한 세계를 엿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실제의 작업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생명활동이라는 엄숙한 자연의 질서를 부단히 의식하면서 작업하는 것과 의식하지 못한 채 작업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작품에 의식이나 감정이 침투하는 것과 단지 기술만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운생동이라는 미학적인 가치야말로 거기에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하려는 의지의 결과물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심도 깊은 관찰과 사색이야말로 기운생동을 성취할 수 있는 첩경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운생동이 수묵산수화에만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충일한 생동감이야말로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품의 내재적인 가치일 터이다.

 

되풀이하거니와 그림이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의 집합체라고 전제했을 때, 이 세상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진실한 애정 그리고 깊은 사색이야말로 자연과의 연결고리, 즉 필연적인 관계성을 구하는 진실의 해법일 수 있다. 자연물상 하나하나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의구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림이란 어떤 경우에도 결과적으로는 자연의 번안에 다름 아니다. 자연에 모든 해결책이 그리고 답이 있음을 불현 듯 자각함으로써 미망의 숲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창의적인 세계를 마음껏 유영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자作_사유공간_53×45.5cm_한지에 채색_2016

 

 

장혜용作_엄마의 정원_31.8×41cm_캔버스에 아크릴_2017

 

 

이숙진作_또 다른 자연_55×55cm_한지, 먹, 분채, 석채_2016

 

 

이순애作_거닐다_72.7×60.6cm_장지에채색_2018

 

 

권희연作_자연-낮은곳_91×72.7cm_캔버스에 채색_2018

 

 

송근영作_竹_70×50cm_Cyanotype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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