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 展

 

" 구름의 파수꾼과 경주장 "

 

 

 

아트스페이스 루

 

2018. 5. 29(화) ▶ 2018. 6. 25(월)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2가 110 PARK110빌딩 B1 | T.02-790-3888

 

www.artspaceloo.com

 

 

 

 

일상의, 또는 환상의 질주학

 

자동차들이 달린다. 하늘의 구름도 제 나름의 속도로 흐르고 있을 테지만, 지상에서 움직이는 탈 것에 비하면 그 유동성은 멈춘 것이나 다름없이 미미하다. 나뭇가지도 바람에 흔들리지만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은 그야말로 뺨을 휘갈기듯 스친다. 정진의 <허리업>에서는 이처럼 잔잔히 흐르든지, 거칠게 몰아가든지 일상에서 만나는 여러 운동들이 포토샵 레이어처럼 캔버스 위에 겹쳐 올라와있다. 이 그림은 도시 한 복판에서 우리가 매일같이 느끼는 속도감을 현란한 색으로 포착해내 그 감각의 기억들을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화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그 위에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운동선들이 데구르르, 쿠광쾅, 푸슉 하고(소리를 내는 것 마냥) 더해지는데, 그 운동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달리는 기구들 안에 깃든 사람의 혹은 사물의 에너지가 서두르고 충돌하고 피어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포스트모던을 통과해온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하나는 속도의 가속화다. 나날이 증강되는 교통과 통신의 속도는 현대인들이 장착한 질주의 욕망을 표출하고 체감케 한다. 교통과 통신혁명에 의해 눈부시게 가속화된 매체들의 속도는 오늘날 시간과 공간이라는 좌표를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조직하고 경험하게 만들었고, 상상치 못할 정도로 장소들 사이의 거리를 없애나갔다. 폴 비릴리오는 특유의 ‘질주학(dromology)’을 통해 이를 ‘시공간의 압축’이라고 표현했으며, 그 운명은 ‘속도에 의한 공간의 절멸’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말하자면, 그가 쇼 윈도우와 유리 건축물에서 예견한 도시의 스크린들은 연대기적 시간을 동시적으로 전송하고 실제 공간의 움직임을 가상의 인터페이스로 대체해버리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 도래한 하이퍼모더니즘의 지각장이다.

 

정진의 그림들은 이러한 속도의 감각을 역설적이게도 가장 모던한 매체인 회화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들에서는 비릴리오의 단언에 물씬 풍기는 디스토피아적인 전망보다는 그러한 시공간을 장난스럽게, 혹은 환상적으로 담아내는 동화 같은 분위기가 배어나온다. 작가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나, 의연하게 빗속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를 바라볼 때 저 속도를 추동하는 에너지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진다고 말한다. 비록 물신화되고 기계화된 무미건조한 일상의 반복에 깃든 속도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욕동, 끈질긴 에로스의 힘을 느낀다고 말한다. 가속화를 추동하는 저 힘들, 질주의 욕망들이 발하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그렇게 몰아쳐가는 의지들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처럼, 기실 저 질주의 절정은 폭력인 동시에 열락이다.

 

때문에 정진의 풍경화들에서 속도를 표현하는 쏜살같고, 몰아쳐가고, 쏟아지는 붓질들은 현대 테크놀로지의 속도에 대한 미래주의적인 찬양도, 비관주의 섞인 비판도 아니다. 그 선들은 현실 그 자체의 속도감이라기보다 오히려 가상적이고 환영적인 지각장을 구성한다. 비자연적이고 주로 형광색인 이 수직선, 사선, 횡선, 나선, 심지어 포말 같은 땡땡이들은 현실의 풍경 위에 덧씌워진 그것의 음화나 엑스레이처럼 캔버스 속 풍경을 초현실로 전환시켜 버린다. 한편으로 이러한 가상성은 현실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그림의 레이어로 삽입되기도 한다.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 찰리브라운과 같은 캐릭터들은 풍경의 한가운데-혹은 구석에- 자리 잡은 숨은 목격자로, 이질적인 세계의 부적응자로 끼어들어 시공간의 좌표를 교란시킨다. 마치 가속화된 리얼리티의 운동과 방향성에 저항하기라도 하는 듯, 세상이 굴러가고 흘러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을 향해 바라보고 뛰어들고, 주저앉아 있는 이 형상들은 속도의 통치하에 있는 현실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쉽게 작가와의 동일시로 읽히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이 유년기의 친구들은 현실의 가속화되는 망각과 단락에 저항하는 기억-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dur&eacute;e’-의 징표들일까?
최근 정진의 그림들은 일상의 거리나 공간을 비현실로 전환시키는 스위치 역할을 했던 유동성의 지각을 더 멀리까지 밀어 부쳐보고 있는 듯하다. <사이렌>이나 <라스트 댄스>에서 속도감을 나타내는 횡선과 나선들은 화면 가득히 증폭되고, 이에 저항하는 커다란 바오밥 나무들의 수직적 형상에도 불구하고 장면들은 불길한 밤하늘이나 포연에 휩싸여 아포칼립스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그저 역사의 종말로서가 아니라, 또 어떤 SF 소설 속의 한 장면이 아니라, 가속화된 테크놀로지의 극단인 ‘원격현전tele-presence’으로서 전쟁의 시공간, ‘지금여기’와는 아주 멀지만 동시적으로 우리의 세계 저편에서 일어나는 어떤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저 멀리 원경에 자리한 우주선의 광선, 로켓의 불꽃, 야구장 야간조명의 병치는 작가가 끌어들이는 환영적인 모티프들이 그저 현실도피로서의 초현실에 속한 사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현실의 힘과 방향성(벡터)에 저항하는 초현실로서 등장한다. 그렇게 이 그림들 안에는 압도적인 자연의 힘과 같은, 아니 어쩌면 더 무시무시한 초자연적 힘으로-그래서 숭고로- 표현되는 속도의 지배를 물신화하지 않으면서도 이에 항복하지도 않는 정서가 깃들어 있다. 쏟아지는 비는 기계적인 광선과 다를 바 없이 땅/현실 위로 내리꽂힌다. 그럼에도 작가는 캔버스에 작은 창을 만들어, 이 비가 바닷물이 되고 그 위를 서핑하는 사람의 모습을 원격으로 내다보도록(tele-scope) 한다. 그렇게 작가는 불안한 눈길로 이 속도의 테크놀로지에 깃든 욕망과 순환을 목도하지만, 그 이면에 기적처럼, 행운처럼 찾아올 환희의 순간 또한 오랜 약속처럼 아득하게 붙잡고 있는 듯하다.

 

이진실(미학/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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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80529-정진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