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섭 초대展

 

- 열어보다 -

 

 

 

 

 

2017. 12. 2(토) ▶ 2017. 12. 14(목)

서울시 종로구 평창36길 20 | T.02-396-8744

 

blog.naver.com/kimboseong66

 

 

 

 

이종섭 개인전에 부쳐

- ‘열어 보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것들을 -

 

주성열(예술철학)

에필로그: 전시 개요

이종섭은 번갯불에 콩 볶을 만큼의 짧은 시간에 전시를 마련했다. 이번 전시를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규모를 키우고 싶어 했다. 필자가 급히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초조함과 설렘으로 공중부양 중인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나름 큰 성과가 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져 버릴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전시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종섭은 개인전 컨셉을 ‘열어 보다’로 결정했다. 작업 중인 자료를 중심으로 작업 여정을 관람자에게 공개하기로 한 것인데 정식으로 완성된 작품은 물론 정리되지 않은 작업의 일부분도 방문자들이 열어 볼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작품 재질의 특성상 감상자가 직접 포장된 상자를 열어서 보기에는 적잖은 위험이 있어 미리 몇 개의 자료와 포장을 열어놓고 관객을 맞이할 것이다.

 

‘열다’라는 말의 의미는 개봉하여 공개하는 의미도 있지만 이미 완성되거나 열매가 잘 익어 있음의 뜻도 포함한다. 따라서 ‘열어서 보여주기’는 이미 완성되어 보관 중인 작품을 공개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열매가 맺힌 것과 작가의 의도로 완결된 작업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과 차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보면 인간으로서 노력의 한계가 극한까지 갔음을 확인하고 저절로 한숨이 나올 것이다. ‘열다’라는 또 다른 의미처럼 함께 마음을 열어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그의 작업은 종이와 붓 대신 두꺼운 철판과 절단용토치로 이루어진다. 쇠는 속성상 일정한 불의 힘이 가해졌을 때만 작가의 의도와 상응하는 다루기 어려운 매체이다. 작은 불꽃을 바라보며 감각을 통해 엿가락처럼 철판을 가르고 녹인다. 단단하던 철판이 그의 끈질길 열정 앞에서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는 순간 원하는 형식으로 작품이 완성한다.  

 

 

 

 

작품 세계로 들어서며

작가 이종섭은 2007년부터 붓이 아닌 용접기를 들었다. 그림을 잠시 접고 서예를 배우기 위해 대전으로 터를 잡고 5년간 글을 쓰고 난 후 10년만의 일이다. 육중한 현실 앞에 먹으로 화선지를 가르듯 용접기로 글씨를 쓰고, 절단용 토치의 강한 불로 철판을 가르고 면을 갈랐다. 사각형 철판을 자르거나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두꺼운 철판을 면으로 나누고 유기적인 선의 형태를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적당히 굽히고 젖히면 구체적인 삼차원의 형상이 공간 속에 힘의 균형을 잡아 펼쳐진다. 종이를 가위로 오리고 잘라 입체 형상을 만드는 방식과 비슷하다. 중국의 종이공예인 ‘전지’와도 유사하나 그의 작업은 버려지는 면 없이 모든 면이 펼쳐지는 입체 조형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자신의 작품이 언어처럼 공유의 가치를 가지고 모든 이들에게 이해되고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근작의 대부분인 철판 작업이나 판화 그리고 드로잉은 ‘그림문자(pictogram)’ 형식을 취했다.  80년대 초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 진학과 동시에 인간을 이해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공부로 소비했던 까닭에 이제 자신의 경험과 한국적인 사유의 틀이 함축된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기를 원하는 듯하다.

 

 

 

 

그림 문자 혹은 미토그램(mythogram)

이종섭 작업의 중심은 픽토그램(pictogram)처럼 자신을 닮은 형상을 추출하고 그 이미지를 반복하거나 확장하고 연장한 언어 조형에 기반을 둔 문자적인 작품이다. 이미지의 탄생 이후에 나타난 문자의 발명에서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직접적인 체험에 기초한 그림이자 원초적인 인간의 언어인 그림문자라 불리는 픽토그램(pictogram)이다. 태초에 인간은 말과 글 그리고 그림이 하나였던 바벨탑 이전의 언어인 ’아담의 말‘을 사용했다고 발터 벤야민은 말한다. 이종섭의 작품들도 ’아담의 언어‘처럼 그림과 글이 하나의 덩어리로 보인다.

 

상형문자의 구조는 사물과의 연관성이나 의미로서의 관계성에 근거하고, 흉내 내기와 닮아 있음에서 출발한다. 사물 특성의 조합과 변별을 통해 의미가 만들어지는 상형문자의 기호와는 다르게 표음문자인 한글이나 알파벳은 상징적인 언어이므로 사람들은 약속을 통해 소통을 대신한다. 그래서 약속된 자의적인 언어기호가 나타나면서 말과 사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보편의 언어이자 불후의 언어인 상형문자는 이미지와 문자의 공유인 서술적 이미지가 원형이다. 작가가 관념을 해체하고 얻은 이미지는 자연만물과의 조응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아담의 언어’이다. 갇혀있는 순수한 언어의 관념을 물질로 만나 조형 이미지화 하는 작품의 구조는 미토그램(mythogram)과 유사하다. 이는 신화적인 일정한 양식으로 구조화된 이미지나 선사시대의 형상이미지와 닮은 표의문자에 가깝다.

 

문자 기호의 발명은 현실을 추상화하고 이미지와 문자를 분리시켰다. 반면에 도상텍스트(iconotexte)는 글과 조형적 요소의 총체성을 의미하며 감응을 통해 새로운 체험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무쇠로 형상화한 작품의 촉각성에 주목한다. 삶이 진정성을 회복하면서 건조한 이미지는 촉각적인 형상으로 되살아난다. 살아온 날이 만들어 준 문자는 또 다른 기억의 응어리를 표상하는 작업으로 촉각적 공간을 차지한다. 촉지적 감각을 통해 지각된 것은 해석도 번역도 필요하지 않다. 작품은 스스로 균형을 잡고 있으면서 조금만 힘이 가해져도 출렁거리는 특성이 있다.

 

 

 

 

주름, 함의(implication)와 전개(explication)

함의(implication)와 전개(explication)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다. 종이 작업에서도 주름(pli)이 펴지고(ex-pli) 접어지면서(im-pli) 감춰지거나 드러나는 현상을 재현한다. 주름은 온전한 형상을 숨기고 일부만을 보여준다. 펼침은 감춰졌던 이미지가 드러나기도 하고 반대로 빈 공간을 보여주기도 한다. 파도의 주름이 생명을 영속시키듯, 아코디언의 주름이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듯, 그의 작업은 주름과 펼쳐짐의 상호작용에 의해 의미가 전개되거나 잠재되기를 반복한다. 불교의 가르침으로 말하자면 ‘一卽多 多卽一’로, 하나는 만물이고 만물은 하나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주름’은 영혼의 모습이며 잠재적이고 현실태를 갈망한다. 그리고 신체라는 선택을 통해서 현실화 된다. 지각은 영혼의 영역에서는 애매하지만 신체의 구조에서는 선명하다. 영혼은 신체를 통해서 현실화하는데, 지각을 통해 애매함과 선명함이 드러난다. 이는 주름이 펼쳐지는 모습이다. 한 장의 철판에는 무한히 많은 주름의 잠재태가 있다. 이 잠재태는 선택 혹은 포착을 통해서 생성으로 나아간다. 접힘은 그 형태가 드러나는 펼침 혹은 설명(ex-pli)이다. 이것의 영혼 즉 주름으로 가득 찬 단자이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세계를 가지고 표현하고 담고 있다.

 

무쇠 덩어리 속에 갇혀 있던 특유한 힘이 작가의 의도에 따라 솟아오른다. 영원토록 저장되는 물질에 저장하는 것이다. 무쇠와 문자가 지닌 감각을 종합하고 우리에게 그 감응을 제시하여 작품 속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작품은 작가의 에너지를 변화시키고 작가는 또 다른 힘의 방향을 ‘미학’적으로 조종하고 있다. 이종섭의 언어들이 상호교섭하면서 만들어내는 어울림과 리듬이 조화로운 힘을 만들고 ‘옹골진’ 희망의 씨앗을 잉태한다.

 

 

 

 

세상과의 접속으로 다양체를 만들듯 그는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작품의 중심에는 작가 자신이 있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변화되고 의미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삶의 여정에서 무언가와 접속하는 일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사건은 곧 내가 가야할 방향과 목적을 다시금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또 다른 사건과 접속되면 새로운 방식으로 또 다른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들뢰즈의 리좀의 가치를 분석하고 사유화하여 재현한 듯 한 그의 작품은 뿌리가 있고 나무줄기와 가지가 있고 거기에 잎이 있는 수동의 사유 방식인 수목형의 구조가 아니라 접속에 따라 다양체를 형성하는 변화무쌍한 삶의 여정을 구체화한다. 잠재적인 가능성이 현실과 만나 가능성으로 바뀌는 것은 나무에서 열매가 맺는 방식과는 다르다. 인간의 삶은 나무처럼 수동적이지 못하다. 언제나 위태로운 방식으로 현실과 마주하고 능동적인 대처로 변화무쌍함을 구축한다.

 

철판을 가르고 다듬는 이종섭은 기억을 추상화 해내고 철과 불에 대해서 동일한 파동을 느끼면서 깊은 상상을 한다. 사물을 자기 안에 사무치게 만드는 작업이 녹녹하지 않았겠지만 언어의 현실이며 인간의 현실이기도 한 형식과 내용이 성공적으로 만났다. 예술작품은 감각적 존재이며 재료 또한 감각적인 질감을 가지고 있는데 무쇠판을 가르고 펼쳐 새로운 감각과 감응을 주고 있다. 독창성은 그것이 출발했던 상황의 약점이나 혹은 그보다 더 작은 것에서 얻어진다. 함석헌은 한 마디의 말, 한 줄의 글을 위해 천 마디의 말과 백 줄의 문장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단단하고 단단한 매체 철판을 재료로 하는 작업은 실로 놀라운 일이며 더구나 모든 작업과정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다니, 그 고단함을 짐작조자하기 어렵다. 10cm 두께의 철판을 산소절단기로 가르고 달구어 형태를 만들어 가는 일은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실험하는 과정이지 않을까 싶어진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도 몇 차례 겪었는데 운이 좋아 살아남았음에 감사할 따름이란다. 그는 쉬지 않고 드로잉, 철판 가르기, 종이 가르기와 자르기, 스프레이 페이트 드로잉, 붓글씨 등을 수련하며 차분하게 정진하고 있다.

 

 

 

 

 

 

 

 

 

 

 

 

 

 

 

 
 

 

 
 

vol.20171202-이종섭 초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