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희 展

 

 

 

 

 

2017.  11. 15(수) ▶ 2017. 11. 21(화)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5길 8(인사동 184) | T.02-738-4018

 

www.sungallery.co.kr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소재는 무궁 무진 하다.

그 많은 소재 중에 언제부턴가 오랜 세월 속에서도 초연히 빛을 내고 있는

단청을 보고, 인간이 삶에 무너지지 않고 흔연히 서있는 사람의 이미지를

보았다.

 

단청은 나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고 부유하며 꿈, 평안함을 준다.

내가 그리는 인간은 인간 개개의 감성이 들어 있지 않은 보편적 공통성을

지닌 기호화된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안에 내재된 인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살아가야하는 목적의식을 상실하고,

존재 의미를 표현하지 못한다.

갇혀 있는 마음, 규격화된 벽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항상

내재 되어 있다.

이렇게 자유인 이고자 하는 마음이 끊임없는 소망을 갈구 한다.

우리는 희망, 소망, 행복을 여전히 갈망하며 그에 반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노력 한다.

 

단청과 인간은 무언가를 상상하고, 은유하며 여전히 흘러가는

기억의 공간 안에서 서로 닮아 있음을 느낀다.

 

작가 노트

 

 

 

 

부재(不在)와 소멸이 아름답게 되는 역설의 지점 - 김도희 展에 부쳐

 

"시간이 그것의 부재를 넘치도록 채우리라."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우리 세대에까지 이어진 선사 암벽화, 혹은 고대 고분이나 동굴벽화를 현장에서 직접 대할 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롭고도 뭉클한 감동을 받는다. 그 고유의 의미나 내용 등에 앞서, 오랜 시간의 하중과 풍상을 견뎌온 대상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경이로운 아우라를 뿜어낸다. 고찰(古刹)의 단청이든 고분(古墳)의 벽화든, 고색창연한 것일수록 더욱 아름답고 고귀하게 느껴진다. 아이러닉하게도 시간에 의한 소멸이나 부재가 그리 만드는 것이다. 벽화의 회벽에 균열이 생기고 박편들이 떨어져나간 것이나, 도형적 엄밀성을 생명으로 하는 단청조차도 그 본연의 색상과 채도가 현저히 떨어진, 그야말로 낡고 노후한 데서 우리의 경험과 감동은 고조된다.

 그 오랜 세월의 오브제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박리(剝離), 파손, 탈색 등의 소멸과 부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아니 필연의 과정이지만 우리는 바로 그 부재에서 또 다른 보완과 보상을 구현한다.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생긴 퍼즐과도 같은 손망실(損亡失)된 공간적 틈새 속에서 새로운 고고학적 상상력과 같은 것들로 미장(美裝)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또한 인류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원형적 무의식이 꿈틀대고 비상하는 공간이 된다. 파손되고 사라지고 탈색된 부분만큼 인류의 상상력은 더 빛을 발한다. 오랜 시간을 통해 겪은 부재 혹은 변형이 의미를 갖는다는 시각은 세계가 고정 불변이 아닌 유동적인 것이라는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아울러 시간의 선적(線的)인 개념이 흐트러져 불규칙한 시간의 의식이 환산된다. 요컨대 많은 부분들의 부재, 그 자체가 새로운 의미로 부상해가는 역설은 이 시대의 미학적 코드이기도 하다.

 화가 김도희는 익히 알려진 대로 전통건축의 백미인 단청 문양과 그 상징성을 소재로 삼아 오랫동안 작업을 해온 작가이다. 작가는 청년 시절부터 고궁 등의 단청에 매료되었다고 여러 곳에서 피력하고 있다. 실제로 단청은 보존성과 장식적 가치를 넘어 상징적 측면에서도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음양과 오행의 우주원리를 근간으로 하여 모종의 비밀스런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믿음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비단 이런 사항들이 아니어도 그 오묘하고 치밀한 도형적 구성 하나만으로도 매료되고 사랑받을 만하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 혹은 ‘나’라는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화면에 일관되게 나타난 단청 소재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재구성 혹은 인용의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도형적으로 완결된 것이 아닌 파편처럼 흩어지거나, 아니면 무언가에 은폐되고 생략된 이미지들이 대부분이다. 이미 파편화된 문양들은 그것의 고유 의미나 상징성에 대한 기술이기보다는 복선적 시간관과 다중적 시각 및 의식 너머 혹은 심연의 것들을 조회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일견 이러한 작가의 화면은 위계적이고 구조적인 세계가 회의되는 작금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동참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제 그것은 건축의 한 미장(美裝)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인식, 그리고 그것들이 더 이상 건축적 공간에만 한정될 것이 아니라는 정언적 명제를 소박하게 역설하고 있는 메시지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처마나 천장 및 기둥, 들보 등의 입체물에 착색 시문(施紋)된 그 어떤 패턴들 역시 어느 방향에서도 완전한 형태로 지각되는 것이란 없다. 작가가 나름대로 파편화와 재구성의 컨텍스트를 즐겨 등장시킨 데는 이런 실재적 현상에 근거하고 있기도 하다.

작가의 화면에서 인용되고 있는 단청 문양들 가운데는 색이 탈색된 것 같은 이미지들도 발견되고 있다. 먹선만 남고 색은 다 산화된, 그야말로 고색창연한 고찰의 처마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박편들의 이미지와도 같은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런 점 역시 작가는 문양 고유의 상징성이나 오방색의 고유 개념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 시간의 의식과 수용미학의 일단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한 시간의 흐름과 지평에 대상을 던져놓았다는 것은 시간 혹은 자연이 사역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이며, 또한 작가가 아닌 독자(감상자)의 참여와 경험에 의해 완성되는 텍스트라는 인식의 일단도 엿보인다는 것이다.

 

 

 

 

작가의 화면들에는 예의 인물 실루엣들이 등장하고 있다. 익명적 이미지들이지만 작가 자신 혹은 보편적 주체로 읽혀 마땅한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단청 문양 이미지들과의 연결고리가 감각적으로 긴밀하거나 매끄럽지는 않지만, 주체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내응(內應)하고 있는 조합으로 보인다. 주체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그 실존에 대한 복잡다단한 상념들이 언뜻언뜻 비쳐지고 있다. “단청과 인간은 무언가를 상상하고, 은유하는, 여전히 흘러가는 기억의 공간 안에서 서로 닮아 있음을 느낀다.”(작가노트) 어딘가 모르게 낯선 이 조합이야말로 불규칙한 복선적 시간관이나 다중적 질서, 탈구조적 세계관에 가까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근작에서 지나칠 수 없는 점이 한 가지 있다. 정체성 및 주체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면서 작가의 화면은 보다 ‘우리다움’에 대한 탐구의 밀도와 폭이 더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상여 만장(輓章)이나 보자기를 연상케 하는 반투명 상태의 천 질감, 혹은 무의식적 혹은 자동기술적 드로잉, 포말 같은 유동의 이미지, 비닐 완충재 마티에르 등 다양한 효과들을 화면 곳곳에 포진, 삽입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실험적인 효과의 단계이나 장차 작가 작업의 전환점을 앞두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전조로 보일 수 있다. 한 가지 더 부연한다면 작가는 ‘우리다움’이 궁극적으로 자연의 이치에 충실하고, 작위적인 것을 최소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체 실루엣과 단청문양의 조합이 자칫 감각적으로 생경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점에서 이모저모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 작가의 화면들이 대체로 잔잔한 흐름의 냇물 같고, 새털구름을 배경으로 새들이 자유롭게 비상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데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작가의 미적 태도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칫 ‘우리’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와도 같은 관념의 틀에 갇혀 있거나, 편향된 취미로 경도될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 속에서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것이 정체성이다 보니, 오히려 타자가 우리를 바라보고 느낀 바가 더 신빙성과 설득력을 가지는 경우도 흔하다. 우리 화단에서 이러한 이슈는 많은 작가들에게 관심사이면서도, 이 점에서 탁월한 성취를 보인 작가가 많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우려를 자각하고 작가 스스로 ‘우리’라는 이데올로기라는 색깔을 지워내며, 화면에 온전하고도 자연스럽게 용해시킬 것을 비중 있게 수행해내고 있다. 관념적이기 쉬운 오방색계의 색동이 바람에 흩어지고 명멸해가는 색종이 지편(紙片)처럼, 혹은 새털처럼 유영하는 장면이야말로 작가 미의식과 태도가 거둔 의미 있는 성취라 할 것이다. 자, 이제 성찰과 관조의 묘미를 작가가 조용하고 넉넉하게 역설하는 바에 귀를 기울여보자.

이 재 언 (미술평론가)

 

 

 

 

 

 

 

 
 

김도희

 

성신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5회 | 2009 바움아트갤러리 | 2011, 갤러리 I | 2014 SUN GALLERY | 2015 광진교 8번가 화랑 | 2017 SUN GALLERY

 

수상 | Salon des Beaux Arts 은상, 심사위원상 (2015, 프랑스)

 

부스전 | 예술의 전당 | 코엑스 | 부산 벡스코

 

그룹전 | 150여회

 

현재 | 대한민국 미술협회 | 한국여류화가협회 | 성신서양화회 | 카톨릭 미술가협회

 

E-mail | dh046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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