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메르헨 초대

 

노주용 展

 

숲 2017-2_130.3×162.2cm_Oil on canvas_2017

 

 

 

2017. 10. 23(월) ▶ 2017. 11. 4(토)

대전광역시 유성구 봉명동 1053-9번지 1F | T.042-825-7187

 

 

심상으로 형성된 매개공간, 숲

 

허나영(미술비평)

Hur, Nayoung (Art Critic)

 

하루가 다른 태양의 높이에 따라 데워지는 대지에는 아지랑이들이 피어오른다. 추운 겨울의 얼음을 녹이는 봄의 아지랑이도 있고, 뜨거운 여름 햇빛에 이글거리는 아스팔트의 아지랑이도 있다. 우리는 무심히 일상을 지나가다 이러한 공기의 움직임을 문득 깨닫게 된다. 노주용의 작품에는 바로 이러한 일렁임이 가득 채워져 있다.

 

짧은 곡선에 담긴 작가의 흔적

노주용의 작품에서도 우리가 아지랑이를 목격할 때와 유사한 과정을 갖는다. 큰 캔버스를 처음 대할 때는 먼저 나무와 숲이 보인다. 자연의 색은 아니지만, 분명 우리가 아는 숲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숲과 나무, 잎과 줄기의 분명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다. 분명 줄기였던 부분과 잎이었던 면은 점점 풀어헤쳐져 결국은 고불거리는 짧은 곡선들만이 남아,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실제로 ‘눈을 사로잡는다.’ 그 곡선들이 너무나 분명하고도 강렬한 색을 가지고 있기에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아지랑이가 만드는 왜곡에 주목하게 되듯이 말이다.

또한 노주용이 그린 곡선들은 점묘법의 색점처럼 저마다의 색을 발산하고 병치된 곡선들의 색은 보색대비의 효과로 서로 간섭을 한다. 빨간 색과 녹색, 하늘색과 주황색, 분홍색과 연두색 등이 서로 인접하면서 본래의 색이 아닌 다른 색으로 변형된다. 자연스러운 시각적 혼합이 아니라 착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옵아트(Op Art)의 소토(Jésus Rafaël Soto)나 바자렐리(Victor Vasarely)가 그랬듯이 각 곡선의 색들은 곧이곧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속인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형광색이 없고 금색과 같은 발광하는 색이 없음에도 노주용의 숲은 스스로 빛나는 색으로 가득 채워진다. 이는 저마다 강렬한 색을 발하는 곡선들 간의 잔상으로 이루어진 효과이다. 카메라 플레쉬를 보면 그 잔영이 오랫동안 눈에 남듯이, 강렬한 색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나무와 숲은 우리의 눈에서 어른거린다.

이러한 색에 대한 감각과 선택에 대해 노주용은 그저 선택했을 뿐이라 말한다. 어떠한 의도나 효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곡선 하나하나에서 작가가 담아내는 자신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는 우연한 효과보다는, 수고스럽더라도 자신이 일일이 하나씩 그린 곡선과 그 곡선으로 이루어진 필연을 더 믿는다. 그래서 곡선을 하나씩 그리면서 작가로서의 의지를 담아내고 자신의 흔적을 화면에 담아낸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이라는 대상을 담는 것이라기보다는 작가 스스로의 행위의 흔적을 표현하는 것이다. 강한 붓질로만 작가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노주용처럼 곡선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그 과정 자체 역시 그림 속에 작가의 흔적을 남게 한다.

 

해석된 자연

이렇게 강렬한 색과 반복되는 곡선으로 만들어진 숲은 그 과정에서 자연과 거리를 가지게 된다. 자연의 한 부분인 숲의 형상을 빌려왔음에도, 자연의 일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가 자기화한 숲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숲이나 나무의 사진을 찍고 이를 바탕으로 그릴 때에도 그저 대상의 사실적인 면이 아닌 새롭게 해석한 형상으로 화폭에 옮겨진다. 이 과정을 통해 그림이 지시하는 대상인 숲은 본래의 모습에서 점차 멀어지고, 대신 작가의 의지에 따라 강렬한 색의 곡선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노주용의 숲은 그 어떠한 특정한 대상을 갖지 않으며, 화폭 속 숲은 원본을 잃어버린 이미지로 남으면서 새롭게 재탄생한다. 작가만의 시선과 손끝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 해석된 자연은 현실 너머의 몽환의 세계도 아니다. 살아있는 나무나 꿈속에 나올 법한 생명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숲과 같은 공간이고 가족이 있는 곳이며 이름은 모르지만 익숙한 짐승들이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상징적인 이야기는 담겨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의 세부로 들어가면서도 다시 전체를 보게 되고 화면 자체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노주용이 만든 숲은 우리를 다시 실제 세계로 이끌어온다.

낯선 색으로 익숙한 형상을 표현한 이 숲은 우리에게 현실 세계 저편을 여행하게 하면서도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중간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는 현실너머 무의식의 세계를 나타내는 초현실적 표현도 아니고, 3차원의 공간을 재현하는 환영(illusion)의 공간도 아니다. 우리가 분명 시각으로 지각하고 이를 통해 체감하게 되는 노주용이 만든 해석한 숲이다.

 

매개공간으로서 숲

노주용에게 숲이라는 모티프는 잔디에 누워 따가운 햇살과 나뭇잎의 그림자를 받으면서 점점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중간적인 상태에 이르렀을 때의 그 느낌에서 연유했다. 이는 실제 공간 속 자연물들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어딘지 알 수 없는 매개 공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느껴지는 현실과 몽환의 세계 사이의 공간이다. 그리고 노주용은 이 공간을 숲이라는 형상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 속 숲은 자연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특정한 어느 장소를 가리키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의 심상(心想)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최근 작업은 그의 심상 속 숲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숲이나 나무의 사진에서 따오던 것과는 또 다른 접점이다. 아마도 이미 숲의 모습이 그에게 체화(體化)되었기에 나온 결과일 것이다.

숲의 원본 대상을 탈각시켰던 방식을 넘어서, 본래의 원본 대상이 없는 작가만의 심상으로 이루어진 매개 공간인 숲을 그린다. 그리고 그 매개공간은 결코 차갑지 않다. 나무들이 저마다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화면에서 적절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풀숲에 숨어있는 짐승들은 마치 보물찾기처럼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길 기다리는 듯하다. 또한 노주용이 만든 숲의 공터에는 누구든 앉아 쉴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마음속의 쉼터 같은 공간이 된다.

노주용은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편안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래서 강렬한 색의 곡선들의 치열한 향연 같았던 숲은 최근작에서 더욱 편안해졌다. 색들이 서로 만들어가는 잔상과 착시효과가 적지 않지만, 노주용만의 탁월한 색의 선택으로 그가 만든 매개공간인 숲은 ‘환영(歡迎)’의 공간이 되었다. 누구나 몸을 누이고 나뭇잎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쉼터이다. 이러한 쉴 수 있고 평화로운 노주용만의 숲이 또 다른 모습으로 열리길 기대해본다.

 

 

 

 

 

 

 

 
 

노주용 | nohjooyong

 

홍익대 미술대학원 회화과졸 |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졸

 

개인전 | 2017 가나아트스페이스(서울) | 2014 화봉갤러리 (서울) | 2013 모리스갤러리(대전) | 2011 모리스갤러리(대전) | 2011 이레갤러리(파주 헤이리) | 2009 숲갤러리(서울) | 2009 서울남부지방검찰청갤러리(서울) | 2009 쌍리갤러리(대전)

 

부스전 | 2016 서울화랑미술제(서울무역센타) | 2016 DIAS국제아트페어(대전무역전시관) | 2015 DAEGU아트페어(EXCO,대구) | 2015 ARTBUSAN(BEXCO,부산) | 2014 SNAF2014  (성남아트센타) | 2012 kIAF(서울무역센타,서울) | 2010 Artseoul(예술의전당 .서울)

 

단체전 및 기획전 | 2017 1986AGAIN(갤러리낳이) | 2016 찬란한 여름 (고트빈갤러리) | 2014 SNAF2014  (성남아트센타) | 2014 흐름과 전망 (비주아트갤러리) | 2014 GIAF (세종문화회관) | 2012 빛그림자전 (제주도립미술관) | 2012 미술의경작 (대전시립미술관) | 2012 금상첨화전 (모리스갤러리) | 2011 검소한미학 이르페토전 (가일미술관)

 

E-mail | nohart@naver.com

 

 
 

vol.20171023-노주용 초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