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홍석 展

Seo Hongseok

 

不二 (INVOCATION SONG)

 

不二-招魂歌 Series_190EA_28cm×42cm_CHARCOAL,PENCIL,PIGMENT,OIL ON CANVAS,PAPER_2016

 

 

 

2017. 3. 29(수) ▶ 2017. 4. 4(화)

Opening 2017. 3. 29(수) pm6.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 T.02-736-1020

 

www.insaartcenter.com

 

 

不二-招魂歌 Series_190EA_28cm×42cm_CHARCOAL,PENCIL,PIGMENT,OIL ON CANVAS,PAPER_2016

 

 

서홍석의 회화

세상의 모든 일상, 일상의 겉과 속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작가 서홍석은 정리 벽이 있다. 그날그날 할 일을 일일이 체크하고 계획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진 노트가 수십 권이 넘는다. 그동안의 세월이 놀랍고, 그 세월을 기록한 양이 놀랍고, 그 일관성이 놀랍다. 흔히 계획한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지만, 더러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고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지금까지 삶을 설계하고 계획한 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 계획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의식적인 삶이고 깨인 삶이다. 하지만 이처럼 삶의 순간순간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흔한 경우도 아닐 것이다.

비록 일기는 아니지만(일기보다는 일지?) 사실상 또 다른 형식의 일기로 봐야할 그 노트에는 그러므로 그동안의 작가의 삶이,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이름의 시간을 낱낱이 의식하고, 헤아리고, 반추하고, 자각하고, 스스로 일깨우는 이 행위에는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무엇이 있다. 예술에 대한 모든 정의는 사실은 임의적인 것이다(그 정의가 임의적이라는 것은 예술의 특수성이며 심지어 미덕일 수 있다). 이런 임의적인 정의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예술에 대한 정의 이전의 상태를 가정해보자. 그럼, 무엇이 가장 원초적인 예술행위일 수 있는가. 바로 저마다 주어진 시간을 일일이 헤아리는 행위, 그 강박적인 행위, 어떠한 개념의 매개도 없이 존재와 의식이 그대로 부합하고 일치하는 그 행위야말로 가장 원초적이고 존재론적인 예술행위일 수 있다. 그러므로 노트는 그대로 하나의 삶이 축약된 예술이고 자화상이다. 역사며 기록물(인덱스)이고 아카이브다. 드로잉(드로잉 북?)이고 개념미술이다.

 

 

不二-招魂歌 Series_190EA_28cm×42cm_CHARCOAL,PENCIL,PIGMENT,OIL ON CANVAS,PAPER_2016

 

작가의 회화는 바로 이런 바탕이며 전제 위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마치 일기를 쓰는 것과도 같다. 그에게 그림은 일기의 또 다른 한 형식이다. 일상적이고 개인사적이라는 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듯 그림으로 옮겨 그린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작가가 그리는 일상은 이중적이다. 우선은 일상에 대한 작가 개인의 소회를 그린 것이며 생활감정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일상 자체도 그렇거니와 특히 그 소회며 생활감정이란 것이 대개는 대동소이하기에 작가가 그린 일상은 쉽게 공감을 얻는다. 개인사를 그린 것이면서 동시에 보편사를 그린 것이고, 특별한 경험을 그린 것이면서 동시에 일반적인 경험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마치 날실과 씨실처럼 상호작용하면서 하나로 아우러진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세상의 모든 일상을 그린다. 일상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본 세상의 모든 풍경을 그린다. 피마골을 그리고 시장을 그리고 포장마차를 그린다. 아현동과 영등포 시장 그리고 종로 3가의 골목을 누비고, 봉천동과 홍제동 개미마을, 상도동과 월계동과 같은 달동네를 그린다. 그 중에는 재개발 현장도 있고, 더러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그래서 다만 작가의 그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인, 그런 곳도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런 풍경, 풍경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경을 왜 그리는가. 그리고 정경의 무엇(어떤 국면)을 그리는가. 작가가 그리는 그림은 다만 풍경 아님 정경일 뿐인가. 작가는 과연 풍경 자체, 정경 자체를 그리고 싶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작가는 사실은 시간을 그리고 흔적을 그리고 그리움을 그린다. 상실한 것들을 그리고 자신과 더불어 살을 부대껴온 시간을 그리고 가까운 현대 곧 근대를 그린다. 근대의 생활사를 그리고 존재의 흔적을 그린다.

 

 

不二-招魂歌 Series_190EA_28cm×42cm_CHARCOAL,PENCIL,PIGMENT,OIL ON CANVAS,PAPER_2016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도저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이며 증표일 수 있다.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것 중에 골목이 있고 시장이 있고 달동네가 있다. 하나같이 작가와 더불어 근대를 관통해온 삶의 풍경들이고 전형들이다. 작가는 그것(곳)들을 그림으로 기록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삶의 흔적을 그리고, 부재로 남은(그리고 머잖아 부재로 남겨질) 시간(그리고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풍경이며 정경은 사실은 이 도저한 그리움을 되불러오기 위한 구실이며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서 일상은 사회적 풍경으로 부를 만한 경우로 확장된다. 출퇴근길을 서두는 사람들,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을 그린다. 군중을 그리고, 현대인의 익명적인 초상을 그린다. 그리고 대통령의 노제와 탄핵과 같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정경을 그리고, 분단현실을 침묵으로서 증언해주고 있는 철책과 같은 역사적 풍경을 그린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일상은 다중적인 풍경이며 정경들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지고 중첩된다. 그리고 현실주의 미학이 그 층위를 뒷받침하고 견인한다. 여기서 현실주의는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사실주의가 사실적인 묘사와 같은 형식과 방법론에 기울어져 있다면, 현실주의는 현실에 대한 의식적이고 실천적인 참여 쪽에 방점이 찍힌다. 작가의 그림은 비록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그림은 아니지만, 동시대를 관통하는 정치적인 사건(사건풍경?)이며 사회적인 전형(사회적인 풍경)을 일상 속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주의를 획득하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작가는 일상을 매개로 보다 사적인 영역을 파고든다. 일련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 그런데, 주로 작업실 뒷산을 산책하면서 받은 인상을 그린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에서 풍경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형식실험을 위한 치열한 장이 되고 있다. 다른 그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체적 경향이 강한 것이 그렇다. 다른 그림들에 비해 붓질과 함께 유독 나이프 자국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 역시 이런 해체적 경향과 무관하지가 않다. 붓질과 나이프 자국을 병행해 구축과 해체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회화적 장을 예시해준다. 풍경에서 주체에게로 그리고 주체에서 풍경 쪽으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들의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운동성(호흡?)을 예시해주고 있다고나 할까(세잔이 그린 풍경화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분석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풍경은 주체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 주체는 풍경 쪽으로 그리고 풍경은 주체 쪽으로 건너가고 건너오면서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지워진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풍경 속에 숨겨진 사람(풍경의 일부가 된 사람)의 형상이 그런데, 풍경과 주체가, 주체와 객체가 삼투되고 합체되면서 종래에는 합일을 이루는 경지를 그린 것일 터이다.

그리고 종래에 일상은 존재론적인 층위로 심화된다. 더러 그림에 아예 씨앗을 짓이겨 붙여 그리기도 한 열매와 씨앗 그림들, 밤바다를 떠도는 혼들을 추모(세월호)하는 한편 꽃상여를 타고 간 모친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림들, 작가 자신의 짧은 입산경험을 그린 그림들이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과 같은 삶의 질곡을 그린 그림들이다. 삶에서 죽음까지, 죽음을 넘어 재생까지, 삶과 죽음이 무한순환 반복되는 존재의 비의며 우주의 섭리를 그린 그림들이다. 삶의 알레고리를 그린 그림들이다.

 

 

不二-招魂歌 Series_190EA_28cm×42cm_CHARCOAL,PENCIL,PIGMENT,OIL ON CANVAS,PAPER_2016

 

 

서두에서 작가는 정리 벽이 있다고 했다. 정리 벽이 자기를 기록하려는 강박으로 나타나고, 일기 혹은 일지의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회화는 일기 혹은 일지의 또 다른 한 형식으로 볼 수 있다고도 했다. 여기서 정리 벽과 자기에 대한 강박은 자칫 섣부른 선입견을 불러 올 수 있다. 회화의 형식 역시 정리 벽과 자기강박에 걸 맞는 형식일 것이라는. 그러나 일기 혹은 일지처럼 그날그날의 소회며 생활감정을 노트가 아닌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사실 외에 정작 그림의 형식 자체는 전혀 혹은 의외로 계획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분별적이지도 개념적이지도 않다. 우연적이고 심지어는 무분별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만큼 격렬하고 직접적(즉발적?)이고 활성이 넘친다. 여기에 회화적 스펙트럼을 보면 사실적인 그림에서 추상까지, 현실참여적인 그림에서 존재론적인 그림까지 그 층위가 넓고 깊다. 나이프와 해라를 사용해 물감을 두툼하게 발라 올려 마티에르(회화적 물성)를 강조한 그림이 있는가 하면, 화면 아래로 마구 흘러내린 물감이 비정형의 얼룩으로 맺힌 엷은 그림도 있다.

미술사 혹은 상호영향사로 치자면 표현주의와 신표현주의 그리고 추상표현주의를 아우르는 표현주의 계열의 경향의 회화를 자기화하고 재해석한 그림들이다. 표현이란 원래 내면에 있던 무엇인가가 자기 외부로 표출되고 분출되는 것을 말한다. 다른 경향의 그림들에 비해 주체가 강조되고 주체의 내면적 경험에 방점이 찍히는 그림들이다. 주체의 내면적 경험? 바로 내면에 응축된 응어리가 그린 그림이며, 응어리로 그린 그림들이다. 정신분석학으로 치자면 억압된 욕망일 수 있겠고, 보다 일반적으론 분노(응축된 에너지의 다른 이름?)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몸이 그린 그림이고 몸 그림(액션페인팅?)이다. 때로 작가의 그림이 우연하고 무분별해 보이는 것도, 직접성이나 활성이 강하게 어필돼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에 작가의 디스플레이 방식 또한 예사롭지가 않은데, 같은 사이즈의 그림들을 한 자리에 모아 하나의 큰 화면으로 보여준다.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이는 거대한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형식적으로 임펙트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디스플레이 방식은 다만 형식적인 고안물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여기엔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는데, 여기서 작가의 자기기록에 대한 강박에 연유한 일기와 일지 형식을 재차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림을 보자면 하나의 벽면에 열거된 작은 그림들이 마치 책을 연상시키고 낱낱의 책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여기서 낱낱의 그림들은 일상에 대한 작가의 소회며 생활감정을 그린 것(기록한 것)이며, 그 낱낱의 그림들이 모여 일상을 이루고, 삶을 이루고, 세상을 일궈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작가에 의해 축조된(편집된?) 하나의 세상(한권의 책) 앞에 서게 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저마다의 세상(책)과 대면하게 만든다.

 

 

不二-招魂歌 Series_190EA_28cm×42cm_CHARCOAL,PENCIL,PIGMENT,OIL ON CANVAS,PAPER_2016

 

 

不二-招魂歌 Series_190EA_28cm×42cm_CHARCOAL,PENCIL,PIGMENT,OIL ON CANVAS,PAPER_2016

 

 

不二-招魂歌 Series_190EA_28cm×42cm_CHARCOAL,PENCIL,PIGMENT,OIL ON CANVAS,PAPER_2016

 

 

 

 

 

 

 
 

 

 
 

vol.20170329-서홍석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