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경 展

 

IN THE BEGINNING

단순.심오.미

 

아르케(Beginning)_oil on raw canvas_160×660cm_2015

 

 

인사아트센터 1층

 

2015. 6. 3(수) ▶ 2015. 6. 8(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 T.02-736-1020

 

 

시원적 잉태(primordial conception)_pigment on raw canvas_150×150cm_2015

 

 

한 종교 학자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근원(根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종교학적이 아니더라도 심리학적으로도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이 숨 쉬고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삶과 예술을 진지하게 사려(思慮)했던 위대한 철학자들도 “존재의 근원”으로 접근하려는 무모하지만 숭고한 시도를 천착(穿鑿)했다. 그들은 현상이나 현실보다는 본질(substance)이나 이데아[理想]를, 파생적 구체(具體)보다는 본원적 실재(reality)를, 그리고 잡다한 구상(具象)보다는 일원적이며 단순한 추상(抽象)을 추구했다. 존재의 근원으로의 여행은 일상적인 것, 고정관념, 고착화된 전통, 구습, 문화적 틀, 유전적인 사상, 상식적인 가치관 등에서의 과감한 탈피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다.

 

 

보편적 악(universal evil)_ink on raw canvas_120×120cm_2015

 

 

이재경: 아르케에 착념하는 탈레스적 화가

 

지금의 작가 이재경이 그렇게 보인다. 그녀는 심리학자 카를 융(Carl Jung)처럼 에네르기를 끌어당겨 개인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매듭점”으로 인식되는 “원형적 이미지”(primordial image)에 집착하며, 임마누엘 칸트처럼 접근은 가능하지만 도달이 불가능한 “근원적 존재자”에 끈질긴 애착을 보인다. 그녀는 또한 만물의 시원과 근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추구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아르케(Arche)에 착념하는 예술가이며, 감각적 차원에서 경험되는 사물을 넘어서 궁극적 본질을 캐묻는 탈레스적인 화가다.

지금의 이재경은 그녀의 초기 그림(1-2기)이 표현하는 것과 같은 파토스적 분출보다는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우주적 원리나 본질적 이성, 곧 로고스로의 관조적(觀照的) 이행(移行)을 모색하고 있다. 그녀는 이 로고스를 부둥켜안고 해석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괴테의 파우스트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그녀는 지금 신약성서 요한복음 1:1의 첫 구절, “태초[아르케]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라는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 도상(途上)에 있는 것 같다. 작가 이재경의 약 30년 회화 편력은 하나의 단절 없는 파노라마처럼 이 근원으로의 회귀 과정을 점진적으로 펼쳐보여 준다. 곧 그것은 작가의 무의식 저변에 깔려있던 애초의 본질적인 모티프가 존재론적 또는 역사적 콘텍스트에 힘입어 그 매듭이 풀리면서 표출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중략-

 

헤겔적으로 표현한다면, 역사적 성찰 및 자기 반성적 투영을 나타낸 이재경의 제1, 2기가 정(正, thesis)이고, 내면 응시를 넘어서는 자기 투시를 통해서 왜곡된 자아로부터의 탈출과 부활 및 객관적 세계로의 비상(飛上)을 꿈꾼 제3기가 반(反, antithesis)이라면 제4기는 실존적 역사와 자아와 객관적 자연에 영원한 질서와 조화와 미의 본원적 의미를 부여해 주는 아프리오리적(a priori) 근원 곧 아르케를 추구하는 합(合, synthesis)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이재경이 천착하는 이 근원은 시원적이고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며,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이지만,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 원인에 대한 이성적 지식, 칸트나 헤겔의 범주화된 관념이 아니라 인간 및 만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탈레스적인 실재(substance)이다.

 

 

속죄(atonement)_pigment on korean paper_120×120cm_2015

 

 

일견 이런 시도는, 질서나 보편성을 거부하고 파편화된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긍정하고 탈주체적, 상대주의적, 다원적인 세계를 포용하면서 일관되고 지속적이며 절대적인 로고스보다는 순간적 임펄스나 파토스의 표출을 중시여기는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는 무모하고 시대도착적인 신고전주의자의 도발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재경이 탈레스적인 실재나 근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반(反)포스트모던적이지만, 정형화된 미의 정의 및 미술의 각 장르와 기법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을 도모할 뿐 아니라, 문화와 사고의 틀이 세워놓은 장벽을 허물고 실존과 실재, 추상(抽象)과 구상(具象)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통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친(親)포스트모던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녀는 또 다른 장르의 신(新)고전주의의 부활을 모색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 그녀는 자연이나 객관적 대상을 인간의 주관적 사유에 종속시킨 데카르트에게 반기를 들며 기존의 관념과 가치를 초극(超克)하고자 하는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려는 예술적 경향을 보인 니체의 아방가르드적인 초인(超人) 실현의 좌절이 낳은 공백을, 그녀가 추적하고 추종하는 근원적 실재를 통해 메우려 하고 있다.

 

그렇지만 작가 자신이 피력한 대로, 그녀가 추구하는 “근원이란 규정화되고 정형화된 고전주의적 아르케나 로고스가 아니라 무한히 역동적이고 다채로우며 무엇에도 고착되지 않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영원한 실재이지만, 그 실재에서 파생된 구체(具體)들 속으로 침투하여 그것들과 유기적이고 불가분적 소통을 이루면서 그것들을 이상적으로 변화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가 탐미(耽美)하는 “근원”은 포스트모던적이면서 동시에 고전주의적인 실재라고 재정의될 수 있으며, 그녀가 주장한 대로 그것은 “단순(單純), 심오(深奧), 미(美)”의 본질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재경은 지금 이런 근원 추구의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곧 “근원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며, 이 세 가지 요소는 유기적으로 융합되어 있다.”라는 그녀의 미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한 미술을 실험하는 중이다. 이것은 이재경 개인의 미술 편력에서뿐 아니라 미술사학적인 관점에서도 고전적 실재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법적 통합으로서, 또 하나의 미술적 신(新)르네상스를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회 <IN THE BEGINNING>에 출품된 작품들은 발전적으로 이뤄진 작가의 이런 미학적 개념에 기초한 미술적 시도의 시작을 알리고 있으며, 우주 만상의 조형적 본질인 점, 선, 면, 색의 경계를 넘나들며 위에서 기술한 근원적 실재와 근접한 개념들을 “단순, 심오, 미”로써 형상화하고 있다. <아르케(Beginning)>, <시원적 잉태(primordial conception)>, <에덴의 기쁨(Edenic delight)>, <파생(派生,derivation)>은 근원에서 파생한 만물의 원초적 태동을 알리는 시원(始原)과 그 완전한 영역에서 누리는 완전한 환희를 연관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다. 대조적으로 <선악의 기원(origin of good and evil)>, <가인의 길(way of Cain)>, <왜곡(歪曲)의 탑(tower of distortion)>, <보편적 악(universal evil)>, <우주적 분노(cosmic wrath)>에서 작가는 근원적 실재에서 벗어나 빗나감으로써 생긴 왜곡과 보편적인 악,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어떤 거대한 분노의 분출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속죄(atonement)>, <사이(between)>, <화해(和解,reconciliation)>, <결연(結緣, relation)>, <나와 너(Ich und Du)>, <궁극의 추구(pursuit of the ultimatum)>에서는 실존과 근원 사이, 곧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하는 나와 너 사이에 벌어진 틈새를 메워(<결연>) 하나 안에서 상호 소통하고자 하는(<속죄>, at-one-ment) 작가의 궁극적 추구를 보는 것 같다. 아마도 이런 궁극적 추구가 향후 작가의 계속적인 노력의 표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임봉경(신학박사/Ph.D.)

 

 

사이(between)_pigment on tube_155×747×41cm_2015

 

 

왜곡(歪曲)의 탑(tower of distortion)_oil on korean paper_180×60cm_2015

 

 
 

이재경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ㅣ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개인전 |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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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te | www.jaikyunglee.com

 

 
 

vol.20150603-이재경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