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 展

 

해 · 풍 · 홍 Sea · Wind · Red_80x116.7cm_Acrylic on canvas_2012

 

 

학고재 갤러리

 

2013. 3. 27(수) ▶ 2013. 4. 21(일)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50 | T. 02-720-1524~6

 

www.hakgojae.com

 

 

유채밭_53x72.7cm_Acrylic on canvas_2013

 

 

전시 개요

 

학고재갤러리는 2013년 새 봄을 맞이하여 3월 27일부터 4월 21일까지 강요배(62, 1952~)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 강요배 개인전은 2008년 학고재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스침’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갤러리 개인전으로 학고재 전관에서 열린다. 본 전시는 작가가 제주 귀덕리에 정주하며 심혈을 기울인 근 5년간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자리가 될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에는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드로잉 10여점이 함께 전시되어 강요배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작가는 제주의 풍경 속 오래된 탐라의 신비를 고유의 신비스럽고 상징적인 어법들로 화폭에 담아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귀덕호박>, <동>, <백경(白鏡)> 같은 작품들에서 내 비친 풍경과 미학은 작가의 시선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파도와 총석>, <풍천>, <움부리-백록담>와 같은 대작들을 통해 작년 환갑(環甲)을 넘은 작가의 완숙미와 붓질의 정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색채미가 돋보이는 <명주바다>, <자청비>, <여명>등이 함께 선보여 작가의 다채롭고 풍부한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강요배는 제주의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현실과 청풍월해의 장면 장면을 불러들여 신화 · 전설 · 역사를 되묻고 다시 그 내부에 쌓인 수천수만의 삶의 호흡과 결을 어루만진다. 작가는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하며 그것이 지닌 의미를 작품으로 드러내고 소통하는데 주력해 왔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연을 통해 고뇌와 갈등을 겪고 있는 현대인을 어루만지는 자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길위의하늘_194x259cm_Acrylic on canvas_2011

 

 

길 위의 하늘 Sky on the Road

강요배의 회화미학에서 풍(風)은 색의 질감으로서 ‘색질감’의 토양과 기운을 구성 짓는 활기 넘치는 대지다. 앞서 붓바람이니 붓춤이니 하는 말들은 결국 색질감의 대지로 수렴된다.

<길 위의 하늘>에서 토는 밝은 그늘이다. 색질감은 검갈색으로 탁하게 올렸으나 천천히 그 속을 보면 흰 빛들이 떠다닌다. 밝은 그늘을 이룬 땅과 숲과 나무는 상(象)으로 잡히지 않는다. 잔상으로 아른 거릴 뿐이다. 아른 거리는 상들의 풍경이 어쩌면 제주의 실체일지 모르겠다. 손에, 눈에 명확히 잡히지 않으니 그 풍경들은 온갖 무늬 결들의 색비늘로 떠다닐 뿐이다. <길 위의 하늘>은 잡히지 않는 상들의 실체를 드러내려는 듯 하늘빛이 열리는 장면에 집중했고, 그 빛의 숱한 비늘이 흩어지는 순간을 포착했다. 흥미롭게도 먹장구름에 휩싸인 이 풍경이야말로 가장 제주답게 느껴진다.

 

 

 

파도와총석_259x388cm_Acrylic on canvas_2011


 

파도와 총석 Wave and Rock Columns

제주는 불기둥으로 솟아서 시원을 열었다. 오행의 ‘화(火)’가 생성이며 창조이듯이 제주는 불의 씨알로 잉태되었다. 180만 년 전의 신생대를 태우고 밝혔던 뜨거운 불(빛)들이 사그라지면서 제주는 제 꼴의 대지로 태어났다. 총석(주상절리)은 불의 몸이 바다와 맞붙어서 발끈한 돌기둥이다. 중문과 대포 해안을 따라 기립한 총석들은 제주가 불의 탄생지요, 신화지라는 것을 웅변한다. 화면 상단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포물선 구도를 짜며 골기(骨氣) 찬 총석이 섰는데, 포물선 내부로 파도가 몰아쳐 흰 포말꽃이 터진다. 우뚝 솟은 검갈색의 총석에 수평으로 물밀어서 산화하는 포말꽃의 희디 흰 꽃잎들. <파도와 총석>은 강요배 제주 풍경화의 한 상징기표로 읽힌다. 그는 제주를 희구하나 제주풍경과 캔버스는 너무 멀어서 자주 붓바람이 되고 붓춤이 될 뿐이다.

 

 

 

명주바다_162x130.3cm_Acrylic on canvas_2012

 

 

명주바다 Myeoungju Sea

명주(明紬)는 빛이 고운 아름다운 구슬이니 명주바다는 빛 구슬의 바다이다. 그에게 수(水)는 푸른 결의 쪽빛이다. 이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 달리 오직 맑고 푸른 바다만을 보여준다. 푸르고 푸르러서 시리고 아리다가도 불현 듯 포근해지는 따듯한 바다의 물결을.

강요배도 바다와 나란히 앉아서 또는 나란히 서서 저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 그 순간, 그의 망막으로 치고 들어온, 그의 눈을 채우는 푸른 물결과 빛을 캔버스에 옮긴다. 명주바다는 수천수만 수억 년의 바다였겠으나 ‘지금 이 순간’의 이미지, 즉 날이미지가 아니고서는 현실이 아닐 것이므로 순간을 붙잡아 두기로 한다.

 

 

 

자청비_162x112cm_Acrylic on canvas_2012

 

 

자청비 Jachengbi

제주에 자청비(自請妃) 신이 있다. 부모가 ‘스스로 청하여 낳은 자식’이라는 뜻의 이 신은 여신으로 미모가 빼어나고 지혜로웠다. 서사 무가(巫歌)에 따르면 자청비는 사랑하는 문도령을 쫓아 하늘에 올랐고, 죽은 문도령을 살리기 위해 서천 꽃밭에서 환생꽃을 얻었다. 그런 자청비가 신이 된 사연은 하늘에서 문도령과 살지 않고 다시 땅으로 강림한데서 연유한다. 그녀는 하늘에서의 영원한 풍요와 사랑을 버리고 다시 땅에 내려왔다. 이 때 여러 곡식 종자를 가져와 사람들로 하여금 풍년 농사를 짓도록 도왔다. 그 뒤로 제주사람들은 밭에서 밥을 먹을 때는 먼저 밥알을 땅에 던지며 고시래를 한다. <자청비>는 고운 한복을 입은 여성의 붉은 치마와 흰 저고리, 누런 바탕이 전부다. 이 그림을 보는 맛은 색에 있다. 자청비가 농경신이니 바탕이 누를 황(黃), 즉 드넓은 대지다. 천지현황의 ‘지황(地黃)’과 같고 오방의 중심 토(土)와도 다르지 않다. 치마의 붉은 적(赤)은 남쪽을 상징하니 제주를, 화(火)는 생성과 창조, 정열이다. 흰 저고리는 결백과 진실, 삶, 순결이다.

 

 

 

동_112x162cm_Acrylic on canvas_2013

 

 

동 Dawn

날마다 새벽은 오고 동은 튼다. 동트지 않는 아침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날마다 동트는 풍경이 새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새날 새아침이란, 새해 첫 아침을 이르는 말이어서 ‘해맞이’가 특별하겠으나 휘연히 동터 오는 아침의 ‘동’은 일상일 따름이다. 강요배는 그 일상의 동에서 환한 깨우침을 본 듯하다. <개천>이 동트는 빛줄기의 상징을 회화적 미학으로 응결시켜서 제주 풍경에 깃든 신화나 역사, 또는 삶의 현실을 반추하도록 했다면, <동>은 무겁게 내려앉았던 어둠의 장막을 걷어 올리는 장면을 강조하고 있다. 화면에서 대지는 낮은 산 아래 검은 평원이다. 그리고 가까이, 낮은 대지 너머로 푸른 안개들이 피어난다. 동트는 햇살은 대지를 흐르는 푸른 안개를 딛고 노란 빛 물결로 떠오른다. 그 만큼이 절반이다. 동은 아직 화면의 중앙을 넘지 못했다. 장막은 걷히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동은 어둠을 밀면서 아침을 열고 있다.    

 

 

 

움부리-백록담_259x194cm_Acrylic on canvas_2010

 

 

움부리-백록담 Umburi-Baerokdam

움부리는 ‘굼부리’로 화산분출로 생긴 움푹한 구멍이다. 제주의 많은 오름에서 움부리를 볼 수 있다. 움부리에서 물이 솟기도 해 제주의 저지, 금능, 협재, 한림, 상명이 땅 밑 물길로 이어진다고 전한다. 제주 삼백 육심여 오름의 어머니는 한라산이다. 그리고 그 한라산의 정상에 어머니의 암메, 즉 거대한 움부리가 있다.

<움부리>는 제주 풍광의 탄생 신화지가 아닐까 한다. 제주의 땅이 솟고 오름이 솟고 산이 솟고 사람이 솟는 데에는 저 구멍의 푸른 신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해 불가능할 테니까. 그러므로 강요배는 움부리 백록담의 풍경을 사실 하나만으로 그리지 않았다. 높은 부감의 시선으로 그리되, 먼저 바탕에 산의 형상을 그리고 그 형상 위에서 흰 바람결이 활개 치도록 했다. 그 활개의 붓질이 강요배의 춤일 것이다. 그는 움부리의 형(形)과 상(象)을 바탕에 두고 흰 바람 춤을 추었다. 움부리 중의 움부리 백록담을 추었다. 추어서 흰 사슴 푸른 못의 신령한 움부리에 가 닿았다. 그렇게 그는 제주의 뭇 생명들을 움틔웠던 움부리를 화폭에 새겼다. 그 깊숙한 구멍의 끝에서 웅웅거리며 움- 움- 움- 움틔우는 움부리의 바람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귀덕리 팽나무_80x116.7cm_Acrylic on canva_2013,

 

 

탐라국 사람 강요배의 회화적 모국어

- 옥타비오 파스와 노자와 강요배와 리얼리즘의 꽃

김종길 | 미술평론가

 

나는 바깥에서 나와 나의 조국 멕시코를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 품고 있는 타인을 어슴푸레하게 보았다.      

 - 옥타비오 파스

 

온갖 것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뿐이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 엉키지만, 제각기 또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도덕경』제16장

 

나는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가장 어두운 숲, 그리고 가장 탁하고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도시인들에게는 가장 음산하게 느껴지는 늪을 찾는다. 나는 성스러운 장소, 즉 지성소로서의 늪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힘이, 자연의 정수가 존재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산책』

 

강요배는 한국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 그는, 탐라국 사람이다. 이 말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의 그림과 그림의 속뜻은 끝내 온전히 밝혀지지 못할 것이다. 그가 탐라국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의 존재와 의식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총체로 보았을 때 명료해진다. 존재를 ‘사람’ 중심에 두면 강요배는 지금 여기의 남한사람이요 제주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한 존재, 존재자로서의 예술가 강요배를 다시 말해야 한다면, 그는 분명히 탐라국 사람이다. 그의 의식과 사유는 탐라가 탄생했던 불의 시원에서부터 수천 년 제주역사를 교통하고 통어한다. 정치사회사는 물론이요 생물지리 자연생태사의 총화로서의 제주역사를.  

 

 

개천_182x227cm__Acrylic on canvas_2010

 

 

탐라인 강요배

그는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선명한 과거」(1974)에서 “나는 자라났다. 나는 이름 없는 폐허 속에서 자라난 잡초였다.”고 고백하듯이, 6?25한국전쟁과 4?3항쟁에 따른 폭압적 현실이 끊이지 않았던 1952년 제주의 폐허에서 태어났고, 자라났다. 그런 다음 육지로 나가서 청년기를 보냈다. 남한의 도시 청년 강요배는 교사였고 문화운동가였으며 비판적 현실주의를 지향하는 예술가였다. 그는 남한사회의 지식인으로서 예술가로서 반독재 민주사회를, 사회와 밀착하는 예술을 꿈꾸었다. 그가 1981년부터 참여한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미학적 실천주의는 모순으로 들끓는 남한사회의 현실을 낱낱이 뒤집어 까발리는 ‘바깥미학’에 있었으니까.

1988년 서른일곱의 강요배는 현기영이 한겨레 창간호에 연재한 「바람 타는 섬」의 삽화를 그린다. 소설은 1932년 제주 잠녀(해녀)들의 항일투쟁을 다뤘는바, 이 ‘잠녀항일투쟁’은 약 3개월에 걸쳐 1만 7천여 명이 참가한 1930년대 최대의 항일투쟁이었다. 그는 이 삽화를 그리면서 비로소 ‘제주화’ 된 듯하다. 이때 ‘제주화’의 의미는 제주를 모방하거나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역사가 제주의 역사와 구분되지 않고 합일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삶과 역사, 모국(母國)의 일여(一如)!

그는 연재를 끝낸 뒤 곧바로 제주 4.3항쟁사 연작 작업에 돌입했다. 1989년부터 3년 동안 4?3연구자들과 그들의 연구논문, 인터뷰자료, 현장답사를 통해 재구성한 50점의 제주민중항쟁사는 한국현대역사화의 한 성취이기도 하겠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남한사람 강요배의 제주화, 즉 탐라국 사람으로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씨족 군장(君長)의 국주(國主)가 존재했던 섬나라 탐라국. 그 나라는 오래전에 사라졌으나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는 면면해서 끊이지 않고 잇따랐다. 강요배의 영혼은 그것을 돌이켜 한 깨달음으로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1992년에 그 그림들을 전시했고 『동백꽃 지다』로 묶었다. 그런 다음 그는 제주로 완전히 귀향했다. 나는 강요배의 제주 귀향을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갔다’로 해석하지 않는다. 우리는 쉽게 그가 고향 제주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도 우리에게 제주로 ‘돌아갔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섬에서 자란 나는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고 고백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가고 옴의 차이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그가 그 누구도 아닌 오직 그 자신에게 ‘돌아왔다’고 고백함으로써 본래 그의 자리였던 곳, 그가 떠났던 그의 뿌리로 회귀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렇게 그의 자리로 ‘돌아감’으로써 ‘그’를 찾고 지웠다.

옥타비오 파스는 역사는 모든 인칭 대명사가 사라질 때 완성된다고 말한 바 있다. 존재가 자기 동일성과 고유성을 고집하지 않고, 역사가 배타적 방향성을 고집하지 않을 때 역사는 완성된다는 뜻이다. 삼라만상이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의미를 갖고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지만, 인간을 통해 발언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우주이다. 파스가 생각하는 인간의 완성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가 되는 순간이다.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나와 타자로 분열되기 이전의 원초적 존재로 회복한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의 시학은 자연스럽게 에로티시즘과 합류한다.

강요배 또한 제주로 귀향한 뒤에도 ‘타자되기의 비움’을 통해 원초적인 탐라인으로의 회복을 궁구했다. 그를 살리는 길은 그 자신을 죽이는 길이었고, 그 죽음의 허무(虛無)만이 새 삶의 진리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유년기 내 몸과 마음의 세포에 각인된 그 매운바람의 맛이 강한 인력이 되어 기어이 나를 끌어 들였”으나 그는 “돌아와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해 동안 자연의 언저리를 배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음에 제주의 풍경 속 오래된 탐라의 신비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북쪽 먼 바다로부터 하늬바람이 불어오면 바다가 크게 뒤채이며 일렁이던 순간들이 들어왔고, 맵찬 칼바람에 살점 깍이운 팽나무가 검은 뼈가지로 버티던 풍경들도 심연을 울리며 새겨졌다. 돌팍에 얽히고설킨 덩굴들이 가싯발로 바람의 가슴팍을 긁고 찢으며 저항했고, 돌담 밑의 수선 향을 흩트리고 청보리 싹을 떨게 하며, 바다 밭에 갈빛 고운 톳이 돋아나고 유채꽃이 일제히 피어나던 찰나들이 황홀했다. 이제 그 세계가 그의 세계요 제주의 삶이 곧 그의 삶이 되었다. 탐라인 강요배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파스가 그랬듯이, 그도 ‘나와 타자’로 분열되기 이전의 원초적 존재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런 맥락에서 강요배의 미학도 자연스럽게 회화적 에로티시즘의 경향을 엿보인다. 파스의 에로티시즘이 “익명의 존재에서 하나의 입장을 갖는 존재로”(김은중)의 관계에서 비롯되듯이, 강요배의 회화 속 풍경들 또한 익명의 풍경들이 아니라 입장을 가진 존재로서의 풍경들이다. 다시 말해, 제주풍경들은 은유로 가득한 섹슈얼리티였다. 그는 회화적 이미지로 야생의 몸을 드러내는 제주풍경의 현실을 포옹하면서 그 풍경의 운율을 캔버스에 붓바람의 짝짓기 춤을 추었다. 신명의 붓춤이요 색춤이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겸양의 미덕을 지니며 아집을 부리지 않고 자기를 버리나니, 그런 존재가 앞서게 될 지며, 자리를 초월하여 자기를 잊으니 비로소 새로운 자신이 존재하게 될지니라.

-『도덕경』제7장

 

 

댕유지_72.7x60.6cm_Acrylic on canvas_2013

 

 

회화 밑의 자유 ; 물밑 바위들에 속이 긁혀 허옇게

그의 작업과정을 연상하면 신명의 굿판이 떠오른다. 갈필의 온갖 붓들을 손에 쥐고 캔버스에 색덩이를 쳐 바를 때의 그는 영락없이 샤먼이다. 100호 이상의 그의 많은 작품들은 붓바람 붓춤이 아니고서는 펼쳐지기 힘든 색들의 현란한 춤판이다. 붓짓과 색짓의 짓거리를 몸짓과 섞어서 흥을 틔우다가 일순간 접신한 듯 추게 되는 그의 붓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풍경과 만나기 위해서이다. 종잡을 수 없이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현실과 제주풍경들의 장면 장면을 불러내어 신화 ? 전설 ? 역사를 되묻고, 다시 그 내부에 쌓였던 수천수만의 삶의 호흡과 결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다.

1992년 ‘동백꽃 지다’를 끝낸 뒤 제주의 풍경들 속을 헤매다 그의 온 몸각(肉覺)이 부셔지고 흩어져서 투명하게 깨닫게 된 미학적 언어는 ‘모국어’였다. 날이미지로 싱싱하게 살아서 그의 내부를 채우는 제주풍경들의 언어는 그가 잊고 있었던 그의 모국어, 즉 탐라 제주의 속살들이었다. 그는 그 속살의 언어들을 찬찬히, 서두르지 않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회화라는, 그림이라는 형식이 풍경의 자유를 깨트리거나 손상시키지 않도록,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그는, 회화미학의 고대어와 중세어와 현대어를 되묻고 사유하며 한 장 한 장을 채워나갔다. 1994년, 그때의 흥분을 기록한 「바람부는 대지에서」는 그가 몸각으로 체득한 모국어의 실체를 보여준다.

 

- 맵찬 칼바람에 살점 깎이운 팽나무는 검은 뼈가지로,

- 바람은 구름을 휩쓸어 황무지를 후려,

- 가싯발로 바람의 가슴팍을 긁고 찢으며 저항,

- 푸르러진 황무지에도 실거리 노란 꽃등불이 여기 저기,

- 단내가 들길에 썩어 넘실거릴 때 먼 바다는 쪽빛,

- 휘몰려갔던 찬바람이 이제 물 실은 마파람이 되어 수숫잎을 파득이며,

- 갈바람이 앞바다에 켜켜히 물비늘을 일으키고,

- 들녘이 서늘해지면 콩밭이 한쪽부터 노랗게 익어가고,

- 조이삭이 수굿거리고 밭담에 산국이,

- 달 벵듸에 달이 맑고 솔숲사이 파도가,

       

맵찬 칼바람, 깎이운 팽나무, 뼈가지, 돌팍, 가싯발, 가슴팍, 돌담밑, 청보리싹, 갈빛 고운 톳, 노란 꽃등불, 호박꽃, 땡볕, 쪽빛, 물 실은 마파람, 구름장, 켜켜히 물비늘, 뒤집힌다, 버틴다, 후려친다, 저항한다, 피어난다, 걸리운다, 푼다, 핀다, 희다, 하늘댄다…. 명사, 형용사, 동사를 막론하고 그의 문자언어는 그대로 살아있는 회화 언어이다. 그는 황홀한 제주풍경들이 쏟아내는 소소리바람 같은 모국어의 수다를 들으면서 붓춤의 굿판을 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굿판은 풍경의 재현이거나 묘사이거나 인상일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두 가지 면에서 깊은 고민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제주풍경을 만물이 생겨나는 이치로 파악하는 우주적 사유이다. 다른 하나는 제주민중항쟁사를 그렸던 그가 결코 부정하거나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유이다. 첫 번째 사유는 노자의 언어에서 비유될 수 있다. 노자는 말했다. “세상의 온갖 만물이 생겨나는 이치는 서로 함께 상생하기 때문이라네. 나는 마음을 맑고 고요히 하여 만물의 이치를 직관하노니, 그것들은 생사를 되풀이하는 구나. 대저 그것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모두가 근원되는 뿌리로 회귀할지니, 이를 두고 고요하다, 맑다고 하거나 또 일컬어 명을 듣다, 회귀한다고 한다네.”(『도덕경』제16장)

그는 제주의 풍경들 속에서 모국어의 속살을 보았으나 그것의 천변만화를 또한 인식했다. 단순히 죽고 사는 생멸의 이치가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이어져 ‘서로 삶’의 가치와 연대를 이루는 것의 이치를 깨닫는 것과, 그리고 또한 서로가 서로를 낳고 기르고 자라게 한 뒤에도 근원으로 돌아가는 뿌리에의 회귀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쉬지 않는 풍경의 살아있는 결들을 표현해야만 그의 모국어는 완성될 수 있었다. 갈겨쓰기 하듯 붓바람 붓춤의 색질감이 난무하는 캔버스를 다시 살펴보라!

두 번째 사유는 옥타비오 파스의 경우를 비교할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에게 시와 역사의 행복한 결합은 현실의 이중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 것, 즉 드러남과 숨음의 변주를 통찰하는 것과 같았다. 시와 역사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이지만 현실이란 언제나 드러남(現)과 숨음(實)의 이중적 방식으로 주어질 뿐 결코 하나의 관점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드러남이 역사적 실존이라면 숨음을 드러내는 방식은 바로 예술적 비전이다. 순수 예술과 정치적 혁명을 등거리에서 견제하는 삶의 비전을 획득하기 위한 파스의 열망은 역사적 실존 속에서 심원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인간들의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강요배는? 옥타비오 파스의 실천과 크게 다르지 않다. 회화란 역사에 무관심하지도 않으며 역사에 종속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미술의 미학적 창조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과 흐름에 등을 돌린 채 유유자적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미학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단순한 결과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가 옹호한 것은 참여시도 아니고 순수시도 아닌 새로운 시, 즉 좁은 개념적 도식을 깬 풍요로운 개념의 시였듯이 강요배도 풍요로운 개념의 회화를 창조하기로 했다.

정치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당연(當然)을 주장한다면 시/회화는 ‘본래 그러하다’는 본연(本然)을 드러낸다. 정치가 진보적인 직선적 시간을 웅변한다면 시/회화는 순환과 회귀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격정의 시기 동안에 쓰여진 옥타비오 파스의 많은 시는 회귀를 노래했고, 강요배의 회화 또한 회귀를 노래한다. 회귀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신 너머로 간, 즉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 자신임을 깨닫는 과정이다. 미학이 말하는 진실은 이탈에서 회귀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가 중요시했던 것은 정치적 해석을 넘어서는 인간의 심오한 진리, 즉 끝없이 생성하는 생명력이었고, 강요배의 사유도 거기에 가 닿았다.

 

돌과 꽃 사이에, 인간.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는 탄생,

우리를 탄생으로 데려가는 죽음.

 

인간,

돌 위로 줄기차게 내리는 비

화염 사이로 흐르는 강

폭풍우를 이겨내는 꽃

번갯불의 섬광을 닮은 새.

노동과 열매 사이의 인간.

_옥타비오 파스, 「돌과 꽃 사이에서」

 

 

바다 - 바위_89.4x130cm_Acrylic on canvas_2012

 

 

리얼리즘의 꽃 ; 전경과 후경이 만나는 곳

하나의 풍경을 두고 우주적 사유와 역사적 사유를 동시에 펼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가능한 일이라면 그것의 미학적 표현은 어떤 것일까? 옥타비오 파스는 「전전날」에서 “어떻게 하면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시, 순수만을 고집하지 않는 시를 쓸 것인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시대의 미학적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를 쓸 것인가?”를 고민한 바 있는데, 강요배의 회화도 그 미학적 통일성의 변증법을 해결하는 것이 하나의 큰 난제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강요배는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을 한 화면에서 만나게 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했다. 전경과 후경, 즉 풍경의 앞과 뒤. 전경이 눈앞의 풍경이라면 후경은 그 풍경에 깃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배경이다. 전경이 현실계라면 후경은 상징계이며, 앞서 말했던 ‘드러남’과 ‘숨음’의 이중적 세계이다. 그는 캔버스에 전후경을 동시에 구현시키는 미학적 전략을 구사했다. 그것은 리얼리즘 미술의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왜? 우리는 언제나 전경의 리얼리즘에 대해서만 말해왔으므로. 눈앞에 펼쳐진 것들의 실재에 대해서만 소리쳐 왔으므로. 아무도, 그 어느 누구도 육화된 리얼리즘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리얼리즘은 육화의 길에서 부정했고 거부당했다. 서도서기론을 지나치게 따른 탓에 한국의 리얼리즘은 100년 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수천 년의 ‘실재’를 상실했다. 만약 우리가 근대 이후의 서구식 리얼리즘에 대해서만 강조한다면 지금 여기의 세계를 형성해 왔던 밑뿌리의 역사는 송두리째 허구가 될 처지에 놓인다. 그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을 예술적 사조에 묶어 놓으면 그 미학적 파장의 반경은 극히 왜소해진다. 리얼리즘을 삶의 예술로 되돌린 뒤 고삐를 풀어 현실의 아수라판에서 뛰어 놀게 해야 한다. 그런 난장의 삶의 실재가 곧 리얼리즘의 형성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전경 뒤에 펼쳐진 후경에 대해서도 긍정해야 한다. 후경은 전경의 이면에 펼쳐진 초현실과 비현실의 상징계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재로서 후경의 개념들을 나열해 본다. 마술적 판타지의 신화적 세계가 펼쳐지는 꿈(특히 ‘태몽’에 주목해야 한다), 전경의 삶을 좌우지 하는/한다고 믿는 토속적 샤머니즘, 깨어서 인식될 수 있는 자아의 밑구덩이에 처박혀 간혹 놀라운 직관과 인지능력을 발휘하는 초자아, 몸에 깃들어서 몸이 하는 일의 역사를 응시하는 마음,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고 선 신령함(靈)과 넋(魂), 그런 넋의 환생을 관장하는 신령함의 서사(敍事), 그 서사가 다시 몸을 타고 올라가 쏟아내는 방언들, 그리고 신명의 공동체가 느리게 형성하고 오래도록 즐겼던 문화의 이미지들, 이미지의 은유들, 은유의 뼈들.       

후경의 시간은 직선도 회귀를 반복하는 나선형도 아니다. 하나의 후경에는 몇 개의 직선과 곡선과 나선형이 몽타주하듯 펼쳐진다. 고구려벽화에 새겨져 있듯이 장면들은 불일치하고 나날이 연속되지 않으며, 사건들만 남아서 무질서의 파계를 이룬다. 일관성이나 통일성, 장면 구성의 치밀함, 사건의 기승전결 따위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삶은 일관되지 않고 삐죽 거리듯 튕겨 나가며, 예고 없이 불쑥거리는 사건들로 현실은 진창이다. 사람과 동물과 하늘과 나무와 새들의 시간이 분절되고 끊어져서 탱자나무 가지들이 엉기듯 엉기고 또 그 가지에서 자란 가시들처럼 웃자라서 날 섰다.

샤먼들은 끊어진 시간들의 틈에서 삶의 진리를 엿보았고 엿 본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만이 후경의 아수라를 볼 수 있었다. 아수라판의 후경은 카오스로 가득했으나 그 가득함에 코스모스가 있었다. 후경이 전경으로 잠시 건너올 때는, 후경의 힘이 전경으로 뻗칠 때는 샤먼들의 몸을 통해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소름을 몰고 오는 노래와 접신의 공유 속으로 밀어 넣는 흥얼이 그의 입에서 터진다. 후경의 리얼리즘은 샤먼의 입에서 시작된다.

대지의 상상력만으로는 또한 후경을 이해할 수 없다. 중력의 풍경이 뒤집혀서 무중력의 풍경을 이루되, 사방천지 간에 위아래가 없고 팔방 시방으로 펼쳐지다가 뭉치고 뭉친 것이 휘돌아서 몽유도원을 이룬 곳이 후경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탁월한 후경의 인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는 함경북도 온성에서 제주도까지 22개의 첩으로 지도를 만들었다. 이 첩을 접으면 하나의 책이 되고 펼치면 한반도가 된다. 첩의 상상이 후경이다. 첩의 주름이 후경의 대지다. 풍경을 첩의 주름으로 인식할 때 리얼리즘은 생생해진다.

후경이 없는 전경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전경이 없는 후경은 존재할 수 없다. 후경은 전경의 존재라는 제1원칙에 의해 생성된다. 리얼리즘도 다르지 않다. 전경과 후경의 존재에 의해 리얼리즘은 생성된다. 전경이나 후경 혹은 후경이나 전경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리얼리즘이 생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후경을 간과했다. 그것은 입체주의,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해체주의, 유목주의 등과 같은 수없이 많은 사조들과 개념들에 의해 정의되었다. 그 모든 것은 세계의 전경에 관한 것이다. 리얼리즘은 전경의 사유를 통해 후경으로 나아간다. 특히 동아시아의 실재는 후경에 의해 전경이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니, 후경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리얼리즘의 리얼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강요배는 이러한 후경의 사유를 통해 우주적 사유와 역사적 사유를 통일시켰다. 그러므로 그의 제주풍경은 우주적 세계이며 동시에 제주 역사를 투영하는 삶의 풍경에 다름 아니다.

 

유욕(有慾)과 무욕(無慾)의 경계를 성찰하고, 경험과 표현을 일치시키며, 행위와 언어를 하나 되게 하는….

 

- 옥타비오 파스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중에서,『탕자』, 1943

 

 

설조_112x162cm_Acrylic on canvas_2010

 

 

사실성의 환상 ; 지금 여기의 실재

리얼리즘을 사실주의로 번역했을 때의 오류는 ‘사실(寫實)’의 ‘사(寫)’를 ‘베끼는 것(재현)’에서 찾을 때이다. 모방, 모사, 재현의 의미가 강한 ‘베끼다’의 상징은 ‘객관적 현실’을 기본적으로 전제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객관적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리얼리즘의 본질일 수는 없을 터! ‘베낌’이라는 재현행위가 리얼리즘의 개념 축으로 작동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현으로서의 ‘사실’은 오히려 ‘사실성의 환상’이라 바꿔 불러야 할 것이다. 리얼리즘은 ‘사실(현실의 재현)’에 있지 않고 ‘사실성의 환상(최대한의 ‘현실 그 자체’)’에 있으니까.

리얼리즘에서 예술작품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과정을 갖지 않을 수 없으나 실제로는 재현하고자 하는 그 현실은 이미 지나쳤거나(지금 여기라고 하더라도 매 순간은 지나치는 순간이잖은가!) 그래서 과거에 속하거나 혹은 사건으로 기록된 역사일 수밖에 없다. 기억에 의존하던, 사건일지에 의존하던 재현하고자 하는 현실은 ‘사실성의 환상’인 것이다. 그 환상이 명료할수록, 선명해질수록 리얼리즘은 커지는 것이다. 현실에 가장 가까울수록 리얼리즘의 미학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리얼리즘은 현실의 재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창조에 목적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리얼리즘은 재현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행위의 결과로 다시 읽어야 한다. 리얼리즘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성의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얼리즘 미학의 핵심은 사실성의 환상이 탄생하는 ‘현실 그 자체’에 뿌리가 있고, 그 뿌리를 미학화 한 개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은 ‘현실주의’나 ‘실재주의’로 번역해야 의미가 바로 선다.

조선 후기의 민중들은 실존적 실재에 눈뜸으로서 시대의 주체, 역사의 주체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세와 근대를 인식했고 왕권과 민권을 의식했으며, 현실과 실재를 자각했다. 지금 여기의 리얼리즘을 말하기 전에 그들에게로 잠시 귀향하는 이유는 그때, 바로 그 순간들 속에 리얼리즘의 전경과 후경이 구분되지 않으면서 하나의 개념으로, 하나의 완성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기의 갑작스런 시대적 회귀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려 하느냐고 꾸짖어도 어쩔 수 없다. 조선과 조선 밖의 세계가 서서히 충돌을 시작할 즈음의 현실을 다시 사유함으로써 지금 여기의 리얼리즘이 간과하고 있는 리얼리즘의 이면을 보완하려 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리얼리즘은 이면이라는 ‘후경’을 상실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전경이라면 후경은 현실 너머에 있는, 현실의 배꼽과 같은 그 무엇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만져지지 않는다. 신체의 감각을 내려놓은 자리에 영혼의 감각을 불 틔워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20세기 내내 아시아에 속한 한국과 서구라는 두 세계는 이해의 교집합이나 합집합도 이루지 못한 채 서구의 일방적 ‘승리’로 끝이 난 상태였으나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으니(두 세계 모두 당대 문명에 대한 오류와 폐해를 성찰하고 있으며 그 성찰의 대안을 ‘아시아성의 원형’으로부터 찾고 있으니), 그 승리의 비굴함에 대해 말해야 하고(‘승리’를 떠들었던 자들은 서구인들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바로 우리였잖은가.), 또한 크게 밀려나 있었던 옛 조선의 그것을 당겨 옴으로써 균형을 이뤄야 한다. 리얼리즘이 실재를 직접 가리는 것이라면, 선(禪)의 의미가 또한 그렇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선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리얼리즘의 실체라 할 수 있다. 선은 흘러가는 물일지라도 지금 여기에서 물의 실재를 터득하는 것과 같고, 꽃일지라도 지금 여기에서 꽃의 실재를 터득하는 것과 같다. 항상 ‘지금 여기의 실재’를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대화가 있다.

 

지장 : 그대는 어디 가려는가?

법안 : 그저 여기저기 돌아다녀 볼까 합니다.

지장 : 돌아다녀서 뭐하게?

법안 : 저도 모르겠습니다.

지장 : 모르는 그것이 제일 친절한 것이지.  

 

이런 말도 있다.

 

객승 :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 : 뜰 앞에 잣나무니라.

 

또 이런 말도 있다.

 

혜충국사 : 부처란 무슨 뜻인가?

인공봉 : 부처란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혜충국사 : 부처님께서도 일찍이 迷했는가?

인공봉 : 迷한 적이 없습니다.

혜충국사 : 이미 일찍이 迷한 적이 없었다면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공봉 : (대답이 없었다.)

인공봉 : 어떤 것이 실상의 뜻입니까?

혜충국사 : 텅 빈 것을 가져오너라.

인공봉 : 텅 빈 것은 얻을 수 없습니다.

혜충국사 : 텅 빈 것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실상을 무엇 하려고 묻는가?

 

그래도 모르겠다면, 딱 하나만 덧붙인다.

 

학인 : 부처를 생각으로 헤아려 본다면 어떠합니까?

충국사 : 생각으로 애쓰는구나.

학인 : 생각으로 애쓰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충국사 : 부처가 되었느니라.

 

선문답에 보이는 ‘지금 여기의 실재’는 전후경이 맞붙어있다. 대화는 겉과 속을 나누지 않고 치고 간다. 마음의 안팎도 구분하지 않는다. 강요배의 작품들이 문득문득 이러한 선의 화두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선적인 느낌은 그래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서구의 리얼리즘이 눈앞에 보이는 풍경(前景)에 집중했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풍경(後景)을 집중했다. 초상화를 그릴 때 전신사조(傳神寫照; 인물의 형상 재현에 그치지 않고 정신까지 담아내는 일)를 강조했던 것은 그런 이유다.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을 집필했던 조선미는 초상화란 형(形)과 영(影)의 예술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형’이란 그려지는 대상 인물 그 자체이며, ‘영’이란 그려진 초상화다. 형은 실체(實體)요, 영은 가상(假象)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외양(形)은 그때그때마다 변하지만, ‘형’의 배후에는 그 사람만이 가진 불변의 본질 즉 정신(神)이나 마음(心)이 있다. 이때 정신이나 마음은 외양(外樣)의 배후라기보다는 하나의 중층구조(重層構造)로서 형과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 즉 후경인 것이다. 화가가 어떤 특정 인물을 그려낼 때 그의 외양인 ‘형’을 올바로 포착해내었다면, 자연스럽게 이 ‘형’과 구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정신이나 마음 같은 내적 요소 역시 화면 위로 끌어올려져 ‘영’으로 비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전경과 후경을 나누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야 다시 리얼리즘을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인도가 나에게 가르쳐준 또 하나의 지혜는 세계는 실재하지만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세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나무도 항상 동일한 나무가 아니다. … 이러한 사실은 나에게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우주는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이 되었다.

- 옥타비오 파스,『동쪽 기슭』에서

 

 
 

■ 강요배

 

197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 1982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현재 | 제주에서 거주 및 작업

 

개인전 | 2013 강요배, 학고재갤러리, 서울 | 2011 풍화, 제주 돌 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제주 | 2009 강요배의 습작시절, 제주교육박물관, 제주 | 2008 스침, 학고재갤러리, 서울 | 제주 4. 3 평화기념관 개관기념 특별전: 강요배의 4. 3 역사화 - 동백꽃 지다, | 제주4. 3평화 기념관 예술전시실, 제주 | 2007 섬 빛깔,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진흥원, 제주 | 2006 땅에 스민 시간, 학고재갤러리, 서울 | 강요배, 아트스페이스 씨, 제주 | 2003 강요배, 학고재갤러리, 서울 | 1999 금강산, 아트스페이스 서울, 서울 | 1998 4.3 50주년 기념 동백꽃 지다 순회전, 학고재갤러리, 서울; 세종갤러리, 제주; 송원 갤러리, 광주;  | 가톨릭센터 전시실, 부산; 월성 문화관, 대구 | 1995 섬 땅의 자연, 조현화랑, 부산 | 1994 제주의 자연, 학고재갤러리, 서울; 세종갤러리, 제주 | 1992 제주 민중항쟁사, 학고재갤러리, 서울; 세종갤러리, 제주; 단공갤러리, 대구 | 1976 각(角), 대호다방, 제주

 

주요 그룹전 | 2012 제4회 제주 - 일본 신화미술 교류전: 신화의 기억을 나누다, 제주현대미술관, 제주 | 제19회 4?3미술제: 식구, 제주4?3평화기념관, 제주 | DMZ 평화미술+책프로젝트 - 겨울 겨울 겨울, 봄, 경기도미술관, 안산 | 모성 - 한국 미술 속의 어머니,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서울 | 2011 코리안 랩소디: 역사와 기억의 몽타주,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 | 제7회 제주신화전: 깊고 깊은 시선, 제주문화포럼, 제주 | 제4회 제주 - 일본 신화미술 교류전: 신화의 기억을 나누다, 사야마이케 박물관, 오사카 | 탐라미술인협회 2011 기획전 - 구럼비가 운다, 아트스페이스 씨, 제주 | 공존 그리고 상생,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 삶과 풍토, 대구미술관, 대구 | 2010 현실과 발언 30년 - 사회적 현실과 미술적 현실, 인사아트센터, 서울    | 제 3회 제주 - 일본 신화미술교류전: 신화의 기억을 나누다,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화산섬 제주의 삶, 풍경,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우에노모리 미술관, 도쿄 | 한국 드로잉30년: 1970-2000, 소마미술관, 서울 | 2009 제주 세계자연유산 특별전 - 자연의 신화, 제주현대미술관, 제주 | 2009 평화 미술제 - 대지의 꽃을 바다가…, 제주현대미술관, 제주 | 제주미술의 어제와 오늘,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 2008 오늘의 한국미술 - 미술의 표정,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 민중의 고동: 한국 미술의 리얼리즘 1945-2005, 반다이지마 미술관, 니가타;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후쿠오카; | 미야코노죠 시립미술관, 미야코노죠; 오오타니 기념미술관, 니시노미야; 후츄 시립미술관, 후츄, 일본 | 2007 제14회 4?3미술제: 다시 그 곳에 서서,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신화를 삼킨 섬 - 제주 풍광, 제주현대미술관, 제주 | 2005 제주 - 발리, 토니라카 갤러리, 발리 | 발리 - 제주,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길에서 다시 만나다, 부산 민주공원, 부산; 광주5?18기념 문화관, 광주; 태백 문화관, 태백; 청주 예술의 전당, 청주; 서울 아트센터 공평갤러리, 서울 | 제12회 4?3미술제: 동행,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2004 제 13회 제주미술제: 열린 시공을 향한 제주형, 탐라색, 제주국제컨벤션센터; 기당미술관, 서귀포 | 바람의 신화 2004 - 제주현대미술전,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정물예찬, 일민 미술관, 서울 | 선언 - 평화를 위한 세계 100인 미술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제 6회 제주 ? 충북 문화예술교류행사: 생명, 평화, 기당미술관, 서귀포 | 제11회 4?3미술제: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을 만나다,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2003 제10회 4?3미술제,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진경(眞景) - 그 새로운 제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1901년 제주항쟁기념 역사미술전, 국립제주박물관, 제주 | 2002 제9회 4?3미술제: 테러,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민족미술 20년, 청주 예술의 전당, 청주 | 2001 제8회 4?3미술제: 한라와 무등 - 역사의 맥,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생명으로의 초대, 학고재갤러리, 서울 | 2000 광주 비엔날레 - 예술과 인권,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광주 | 제7회 4?3미술제,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1999 제6회 4?3미술제: 보이지 않는 손, 보는 눈,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1998 우리 들꽃, 사비나 미술관, 서울 | 제5회 4?3미술제,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1997 제4회 4?3미술제, 제주도 문예회관, 제주 | 1996 전통과 현실의 작가 17인, 학고재갤러리, 서울 | 제8회 조국의 산하 - 강,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 1995 광주 비엔날레 - 광주5월 정신 전,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 광주 통일미술제, 망월동 묘역, 광주 | 1994 민중미술15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 동학100주년 기념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 1992 90년대 우리미술의 단면, 가람화랑; 갤러리 상문당; 학고재갤러리; 현 갤러리, 서울  | 현실과 발언 10년, 관훈미술관/ 그림마당 민, 서울 | 우리시대의 표정 - 인간과 자연, 그림마당 민, 서울 | 새벽의 숨결 - 동향과 전망, 서울미술관, 서울 | 1989 민족미술자리매김, 그림마당 민, 서울 | 조국의 산하, 그림마당 민, 서울 | 더불어 사는 삶, 예술마당 금강, 서울 | 1988 한반도는 미국을 본다, 그림마당 민, 서울 | 1987 반고문, 그림마당 민, 서울 | 1986 JAALA, 일본 도쿄도 현대미술관, 도쿄 | 우리시대 30대 기수, 그림마당 민, 서울 | 1985 을축년 미술대동잔치, 아랍문화원 미술관, 서울 | 1984 삶의 미술, 관훈미술관, 서울 | 6?25 전, 아랍문화원 미술관, 서울 | 해방40년 역사, 대학 순회 전시 | 1983 시대 정신, 제3미술관, 서울 | 1982 젊은 의식, 덕수미술관, 서울 | 행복의 모습, 덕수미술관, 서울 | 1981 도시와 시각, 롯데화랑, 서울 | 현대미술 워크숍 기획전, 동덕아트갤러리, 서울 | 1981-90현실과 발언 | 1980 12월 전, 덕수미술관, 서울 | 관점미술동인전, 청년작가회관, 서울 | 1977-80제1-9회 관점, 대호화랑, 제주

 

수상 | 1998 민족 예술상,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vol.20130327-강요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