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숙자 展

(The 1st Solo Exhibition)

 

Shining Nights!

 

 

 

GALLERY M

 

2012. 10. 25(목) ▶ 2012. 10. 31(수)

Opening 2012. 10. 25(목) pm 6:00

대전시 유성구 엑스포로 161 대전문화방송 1층 | 042-330-3114

 

 

 

 

묘사를 넘어 인식으로 - 문숙자 작품에 관한 소론

 

홍경한(미술평론가, 경향아티클 편집장)

 

1. 문숙자는 누구보다 사생을 즐겨온 작가이다. 그가 방문한 국가와 도시는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으며 그가 화폭에 담은 풍경들은 그 국가의 주요 도시에서 직접 보고 느낀 외형과 심상들이다. 내용은 대부분 한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심벌이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주요 건축물을 비롯해 아름다운 야경, 기타 바다와 강, 나무와 다리, 주택과 가로등과 같이 일상성이 묻어나는 소박한 것들이다.

일련의 근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형식적 특징이라면 ‘점묘’를 묘사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장황한 서사를 생략한 대신 눈으로 받아들인 고즈넉한 경치들을 하나하나 점을 찍듯 작은 붓으로 정성들여 옮겨 놓고 있는데, 점묘는 도시와 항구를 밝히는 화려한 불빛과 평온한 마을 귀퉁이를 감싸고도는 구름과 대지의 시각적 청명함을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는 데 의미 있는 요소가 되곤 한다.

 

 

Amsterdam_162.2x130.3cm

 

 

그의 풍경은 마치 어릴 적 작성했던 일기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아니 그의 일기를 엿보는 듯한 여운이다. 원색의 대비가 강렬한 색채 원색이 한 화면에서 서로 마주하지만 전혀 유치하지 않은 색의 조합은 빼어난 편이다.)와 꼼꼼하게 묘사된 형상에서 전달되는 시각적 명징함은 단순한 사물의 이미지를 넘어 흡사 내 발길이 머문 적 있는냥 제 모습을 홀로그램처럼 비춘다. 특히 인적 없는 공간에 놓인 다양한 전경들은 발로 걸으며 느끼고 담으려 했던 작가의 예술적 열정과 애정, 명상의 숨결을 알 수 있도록 함은 물론 작가에 의해 대리된 공간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도록 잉여의 여백마저 제공한다.

이밖에도 문숙자의 그림은 빈틈없는 실경을 통해 그림을 또 하나의 생활역사로 해석하려는 의지를 읽도록 한다. 비록 그의 작업에서 체감되는 조형양식이 특별함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적 가치의 공유와 보편성을 넘어서는 성숙한 관념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의 그림에 호의적 긍정성을 덧대는 요인이다. 때문에 장황함을 함축으로,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의미로 전환시키기 위해 고심한 듯한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가 단지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형태나 색감, 서술된 이미지들이란 어쩌면 무의미할 수 있다. 이는 외형에서 내면으로, 묘사에서 인식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는 작가의 마음과 그에 따른 노력이 거추장스러운 측면을 배제하고 내재적 운율을 따르려는 심적 전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근래 그의 작품을 보면 예전 그림들(지극히 사실적인 범위에 국한적인)과는 다르게 자신의 내면적 희구의 투영, 가시적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미적 의식을 감흥의 세계로 전이시키려 애쓴 흔적들이 묻어 있다. 이는 대체로 강하게 인상 받은 이미지들, 일반적으론 소소할 수 있으나 작가에겐 남다른 미감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과거의 기억과 혼재시킴으로써 미적 완성도를 높여가는 방위에서 드러난다. 그런 까닭으로 그의 그림에는 모스크바의 풍경과 이스탄불의 정취, 런던의 향기와 미얀마 양곤의 소박함 등이 외형의

재현을 넘어 우리들이 진정 다가서야할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넌지시 일러준다. 은은한 색조와 질감아래 사색을 심어주고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처럼 우리에게 폭 넓고 부드러운 감성을 제공한다.이처럼 오늘날 문숙자의 그림은 점차 10년 전 작품 대비 많은 이들에게 충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요소들로 채워지고 있다. 쉼 없는 다작을 통해 그 실현성을 구축하는 것에서 오늘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목도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첫 개인전은 지난 화업을 정리하고 향후 작업에 대해 방향을 재설정하는 기회로서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 특별한 전환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전환이란 전후 노력이 지속적일 때 제 가치를 드러낼 수 있으므로, 작가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순간의 지연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지연이 요구하는 알고리즘은 다음과 같다.

 

 

Santa Babara Church_72.7x50cm

 

 

2. 구상미술은 일견 진부하다 평가됨에도 세계미술사에서 오랜 시간 구동할 수 있었다. 그 의의 또한 견고함을 잃지 않아 왔다. 그리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단지 외형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 표현의 궁극에서 이탈한 인식으로의 전환이 큰 몫을 차지한 탓이 크다. 바로 이러한 후광으로 인해 구상미술은 절대성을 놓치지 않았으며 그 명맥을 이어 올 수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작가 문숙자의 작업은 지금 이 순간 스스로에게 무게 있는 과제를 떠안기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즉, 자발적으로 이전 작품들과의 다름을 갈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과제란 같은 구상일지라도 예술의 관학, 관전계의 작풍, 양식, 수법 등의 아 카데믹한 일련의 현상의 추구와 구현에서 벗어나 조형언어의 다변화와 표현 방식에서 남다른 시도의 필요성과 갈음된다. 그리고 이는 구체적으로 앞으로 다가올 길을 자신이 앞서 개척하고 조타를 삼으려는 측면이 부재하지 않음을 일러준다. 가변적이긴 해도 표면으로 드러난 예술의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사실주의(寫實主義)적 그림은 현실성을 반영해 문제의식을 공유하려하는 리얼리즘(Realism)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묘사적 실재주의 아래 종속되는 사실주의는 예술창작원리로서 인식론, 철학의 실재론과 맞닿아 있는 리얼리즘과는 변별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표현 대상과 방법에 있어 작가 문숙자의 풍경 연작들을 리얼리즘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사실적인 재현성을 갖춘 그림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는 분명한 분동을 필요로 한다. 만약 그의 그림을 사실주의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다소 진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미 수없이 많은 작가들이 기나긴 역사를 통해 완성도 높은 외형의 복제를 일궈온 것이 사실이고, 우리 예술사에서 역시 어떤 심리적 매개로써의 역할 또한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대상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작금 화면에 옮기는 기억의 단편들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범주에서 벗어나 인식의 카테고리 내에서 기록하고 있다면 그것은 대상 고유 존재론을 이탈한 리얼리즘이라는 양식의 성립이 가능하다. 중요한 건 이 두 가지 다른 경로 앞에 놓인 나침반은 결국 작가 문숙자 자신이 쥐고 있다는 점이다. 호불호를 떠나 어느 곳으로 조타를 돌리는 지에 따라 그의 작업에 대한 향후 고찰과 평가는 확실히 달리 할 수 있는 탓이다.

 

 

Cathedrale Notre-Dame de paris_40x80cm

 

 

그렇다면 그의 그림이 위치한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일단 문숙자의 작업은 가시적 관점에서 분명 표현 대상의 반복과 습속이 고착되어 있음을 아니라 하기 어렵다. 그가 그리는 각 국의 도시풍경은 여전히 예술의 거대한 한축을 형성한 채 그 가능성을 구축해 왔고, 지금도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하긴 힘든 구상미술의 현재를 가리키며, 또한 어떤 특정 공간과 감정에 대한 정서를 표현하고, 작가의 미적 경험이 조형 언어로 치환되어 새로운 생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여타 구상작품들과 다르지 않은 콘텍스트를 지닌다.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원하는 만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에 취했다는 캔버스에 점을 찍어 형상을 묘사하는 방식은 주지하다시피 19세기 말 신외광파 작가들이 시도했던 방식이다. 당시 그들은 이전 인상파의 수법을 더욱 과학적으로 추구한 나머지 광선 효과와 색채 분할의 기법을 회화에 응용하기에 이르렀고 쇠라, 시냐크 등이 대표적인 작가로 미술사에 등재되어 있다.

물론 우리나라 몇몇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그 흔적은 발견된다. 그렇기에 문숙자의 점묘가 온전히 새롭다는 관점은 합당하지 않으며, 새롭지 않은 것에 관한 고집은 예술창의에 있어 옳은 선택이 아니다.

그럼에도 눈여겨봐야할 부분은 오늘날 그의 그림이 위치한 자리가 아니라, 당대 지점이 되레 문숙자 작품의 새로운 전개를 가능토록 한다는 데 있다. 아니, 반드시 또 다른 길을 모색해야만 하는 시점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에 그 본질이 있다. 이것이 현재 그의 작품에 관한 적절한 판단일 것이며, 유보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다행인 것은 작가 역시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변화에 대한 모색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표현의 깊이가 과거 대비 근작에 이르러 원숙미와 더불어 한결 더 집약적,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은 그것을 명료하게 방증하고, 그와의 대화에서도 이러한 부분은 감지된다. 특히 점차 단순한 풍경이나 자연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닌 내면에서 울리는 감성, 그 울림을 핵심적으로 포박하려는 의지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방향으로의 선회를 유효하게 하고 이는 매우 생산적이다. 이것이 필자에겐 작금의 전시를 넘어 다시 열릴 다음 전시에 대한 기대의 이유이다.

 

 

Istanbul_53x40.9cm

 
 

 

 

 
 

vol.20121025-문숙자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