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도예 展

 

생명_2012- 24x24x21cm_점토에 유약_2012

 

 

갤러리 이즈 제1전시장

 

2012. 10. 10(수) ▶ 2012. 10. 15(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00-5 (인사동길 9-1) | T.02-736-6669

 

www.galleryis.com

 

 

무제_19.4x19.5x14.5cm_점토에 유약_2012

 

 

예술가의 이름으로

 

- 이정훈의 세 번째 전시에 부쳐

도예작가 이정훈이 세 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불혹을 넘긴 작가의 생의 연원을 감안하면 많다고 할 수 없는 횟수다. 하지만 이 땅에서 여자라는 이가 감내해야 하는 갖가지 일을 고려하면 작업을 이어온 것만으로도 경하할 일이다. 작업을 모아 전시를 연다는 것,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작가에게 전시란 곧 출혈이다. 안으로 정교하게 다듬고, 밖으로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세상사에 일희일비해서도 안 되지만, 세상을 관류하는 수많은 흐름에 무심해서도 안 된다. 예술의 본질을 굳건히 지키면서도 예술이 아닌 것에도 마음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작가에게 전시란 곧 정체성이다. 기념비적인 전시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시건 그 시간과 공간이 작가를 말해준다. 정체성이란 있어도 힘들고, 없어도 버거운 법이다. 그래서 이 순간도 작가는 힘들다.

 

 

 

축제_26x26x24cm_점토에 유약_2012

 

 

예외가 없지 않았지만, 대개 이정훈의 작업은 도자기의 기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규격도 균일하고, 편안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이번에는 적잖은 변화가 엿보인다. 투각(透刻) 기법을 결합시킨 것이다. 알다시피 투각이란 묘사할 대상의 윤곽만을 남겨 놓고 나머지 부분은 파서 구멍이 나도록 만들거나, 윤곽만을 파서 구멍이 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우리말로 ‘뚫새김’이라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청자칠보투각향로(국보 제95호)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된다. 공정은 힘들지만, 그만큼 만듦새가 화려하고 우아하다. 만드는 이는 물론 보고 매만지는 이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무제_ 23x23x19.5cm_점토에 유약_2012

 

 

투각은 작가 이정훈이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자신의 성정(性情)을 그 위에 새기는 데서 몇 걸음 더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취미에 만족하는 다른 작가들과의 간격을 넓히는 바로미터이다. 절반은 생활인으로, 절반은 예술가로 살아온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되,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은 세상의 눈높이에 맞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이 지점에 다다른다. 세상을 버릴 수 있는 용기는 이때 생겨난다. 이렇듯 투각은 단순히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다. 도자 작업을 절대로 멈추지 않을 거라는 마음가짐, 삶에 덕지덕지 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세태(世態)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각오,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작업으로 ‘살겠다’는 결연한 다짐이다. 이번 전시는 자연인 이정훈과 예술가 이정훈이 불가피하게 엮여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삶의 경로를 도저히 변경할 수 없는 지경에 오른 순간 작가에게는, 작가로서의 ‘윤리’가 생겨난다. 작업하는 이는 물론 전시를 만들고 평(評)하는 이에게 책임감을 안겨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무제_ 22x22x19.5cm_점토에 유약_2012

 

 

두 번째 개인전 이후 오랜만에 만난 이정훈의 작업에는 여전히 감정이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기쁨의 쾌(快)보다는 나른한 슬픔에 가까웠다. 문득 문득 무언가를 향한 미움도 느껴졌다. 중요한 건 그 감정의 극단이 작업을 좌우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순간의 달뜬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회화와 달리 오랜 시간을 바쳐야 하는 도자 작업의 기본 속성 때문일 것이다. 처음 흙을 매만질 때의 어떤 감정이 차오름과 수그러듦의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궁극에는 적요해질 때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도자는 시간의 예술이다. 도공들이 생의 연륜에 관계없이 삶의 희로애락이 지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건 이정훈도 마찬가지여서, 저마다 다른 모양의 자기(瓷器)들이 결국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선을 다했지만 원했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자책하는 마음. 해서 흙으로 빚은 이정훈의 자식들에 깃든 감정은 슬픔이나 미움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극한 겸손이다. 세상의 이치는 오묘해서 마음을 비우니 그 자리에 자기만의 목소리가 생겨난다. 두 번의 전시에서 수줍은 듯한, 단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되던 이정훈의 작업이 이번에는 냉정하면서도 어딘가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은 비로소 자기만의 스타일(style)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타일, 이 얼마나 스타일리시(stylish)한 단어던가. 고상한 단어를 사용하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이만한 단어를 더는 찾지 못하겠다. 이정훈의 작업에 드디어 ‘간지’가 생겼다.

 

윤동희 | 도서출판 북노마드 대표, 미술 무크지 <debut(데뷰)> 발행인

 

 

무제_20x20x12cm_점토에 유약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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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21010-이정훈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