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진 展

 

[바람의 化]

 

꿈_60x145cm_Pigment print_2011

 

 

갤러리 나우

 

2012. 9. 19(수) ▶ 2012. 10. 2(화)

Opening : 2012. 9. 19(수) PM 6: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2-13 3F | 02-725-2930

 

www.gallery-now.com

 

 

끈_60x145cm_Pigment print_2011

 

 

[작가의 글]

바람의 化

서울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와서의 첫 쉬는 시간, 같은 반 아이가 다가와 가장 먼저 건넨 질문은 공부를 학급에서 몇 등 정도나 할 것 같은 가였다. 이전 학교에서의 성적을 감안한 대답에 단번에 잘난척하는 전학생으로 찍히고 난 뒤 다시 이사를 하기까지, 서울에의 적응은 정말로 불가능하게 느껴졌었다. 이후의 1년은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단지 저 첫 대면의 순간만을 뇌리에 남긴 채 기억에서 지워져 있다. 추억이 없는 시기에 대한 기억은 마치 존재 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쉬이 사라져, 되돌아보면 마치 삶의 일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주곤 한다.

전학생을 새 친구가 아니라 경쟁상대로 인식하는 초등학생의 존재는 그만큼 어린 아이들이 공부에의 스트레스에 과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물론 어른이 된다고 이러한 중압감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어린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 집 사이를 떠돌며 유년기를 도둑맞는 사이 어른들 또한 쉴 틈 없이 일을 하며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일이라 자기 최면을 건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처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 것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현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실 개인이 각기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특히 역경을 극복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개인의 모습에는 영웅적인 감동이 있으며 사람들은 누구나 이러한 승리자가 되기를 꿈꾸고 희망한다. 그러나 사회가 과밀화되고 비대해 질수록, 사람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정진은 너무나도 쉽게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경쟁으로 화해버리곤 한다. 모두가 같은 것을 향해 손을 뻗을 때의 사회는 개인에게 그 어떤 거친 자연보다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도약_60x145cm_Pigment print_2011

 

 

[바람의 化] 전시는 개인들의 꿈이 가지는 이러한 양면성을 시각화 함으로서 공포와 아름다움이 병존하는 사회를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며 꿈을 이루려는 개인들의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삶의 모습은 작품 속에서 은유적으로 풀어내어진다.

전시의 작품을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 눈에 들어오는 동양화적 분위기의 추상적인 산, 계곡, 파도와 같은 자연의 형상들에 몇 발 다가서면 작품이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인간 형상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오르고 뛰고 추락하고, 매달리거나 서로를 밀어내고, 때론 끌어주거나 잡아주기도 하는 작은 인간상들은 종이에 크레용으로 그린 이미지를 스캔하고 컴퓨터를 이용한 축소와 수정작업을 거쳐 얻어진다.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 “잃어버린 것들“ (Le Depeupleur)의 닫힌 세상 안 거주자들처럼, 이들 형상들은 각 유형별로 각기 다른 존재 상태를 상징한다. 다만 이들 형상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주어진 환경이 아닌 자신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공간이다.

작고 나약한 풀 한 조각, 혹은 한 방울 물에 다름없는 존재들이 한데 모여 서로가 서로를 기어오르고 앞으로 나아가며 산과 파도가 생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거대한 산과 파도는 겉으로 드러나는 각 개인들의 모습보다 훨씬 개인들의 본질에 가깝다. 이러한 지형을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것이 바로 개인들의 심리와 본성,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즉 사회는 개개인의 내재적 특성이 형상화된 일종의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그 어떤 추악함이나 아름다움도, 그리고 그 어떤 구조적 불합리도 결국은 전부 우리 각 개인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인산인해_225x150cm_Pigment print_2012

 

 

다만 여기서의 아이러니는 이처럼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대해 개인이 손을 쓸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 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 열쇠가 되는 단어로 Sublime을 꼽는 이유이다.

미학에 있어 우리말로 숭고로 번역되는 Sublime의 개념은 원래 불가항력의 힘을 지닌 거대 자연에의 경외심과 두려움이라는 두 감정을 뿌리로 한다. 하지만 산업화의 물결과 함께 도시가 성장을 하면서는 도시와 대중이 Sublime 미학의 또 다른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대두된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계급 대중의 존재는 지배층과 자본가 계층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을 마주하는듯한 막연한 불안함과 경외심, 즉 Sublime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산업화에 이은 현대사회로의 이행은 결국 숭고미의 중심을 ‘아름답지만 두려운 대자연‘ 으로부터, 가늠할 수 없이 비대해진 사회와 그 안의 인간들에게로 이동시켰다.

현대인에게 있어 이제 자연의 Sublime은 특정 예외를 제하면 주로 관조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인간사회의 Sublime은 벗어날 수 없는 전지적인 현실로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인간사회의 Sublime을 지배하는 것은 개인들의 욕망, 꿈, 바램이다. 자연의 바람이 산을 깎고 파도를 일으키듯, 인간의 욕망은 사회를 빚어내고 사회의 풍파를 일어낸다. 우리 사회의 모습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바람의 화현(化現)인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힘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인간은 그러나 한편으론 여전히 그 앞의 위태롭기 짝이 없는 개인이기도 하다. 스스로 일어낸 파도의 거대함 속에 다시금 휩쓸리고, 그 속에서 다시 생존을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위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는 나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이처럼 불가항력의 힘, 그리고 그 앞의 위태한 개인으로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 안에서의 인간의 경험은 이처럼 본질적으로 숭고미에 닿아있다.

 

 

Scape_190x60cm_Pigment print_2011

 

 

 

 

■ 장우진

 

2011  Maryland Institute College of Art (MICA) MFA in Interdisciplinary Art 과정 졸업 | 2009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석사과정 수료 | 2005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학사과정 졸업

 

Group Exhibition  | 2012  부비다, 난지 미술 창작 스튜디오 난지갤러리, 서울 | 2012  사실, 주의! _임페터스, 난지 미술 창작 스튜디오 난지 갤러리, 서울 | 2011  Pulse Miami 초청작가전, ice Palace Studios, 마이애미, 미국 | 2011  Power Struggles: Leveraging Control, Gaucher Gallery, 메리랜드주, 미국 | 2011  Academy 2011: More Than One, Conner Contemporary, 워싱턴 DC, 미국 | 2011  Thesis Exhibition, Decker Gallery, 볼티모어, 미국 | 2010  Valley Peasants, Fox Gallery, 볼티모어, 미국 | 2010  Dirty secrets, 500 Gallery, 볼티모어, 미국 | 2009  Mount-Royal Show, Meyerhoff Gallery, 볼티모어, 미국

 

Awards & Residencies  | 2011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 선정 | 2011  PULSE Presents Award

 

 

 

vol.20120919-장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