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민 展

 

관훈 갤러리, 나무화랑 공동기획 초대

<人間-宇宙>

 

달그림자-그 곳_16x8x47cm_Bronze_2012

 

 

관훈 갤러리

 

2012. 9. 5(수) ▶ 2012. 9. 25(화)

 

나무화랑

 

2012. 9. 12(수) ▶ 2012. 9. 25(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 | 02-733-6469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05, 4F | 02-722-7760

 

www.kwanhoongallery.com

 

 

달춤-그 곳_30x17x48cm_Bronze_2012

 

 

안녕하십니까?

금번 관훈 갤러리와 나무화랑에서는 조각가 최병민 선생님의 조각전을 기획하였습니다. 일체의 화단 움직임이나 상업적 움직임 등에는 거리를 두고 느림과, 뚝심과, 기질로 변화보다는 자신의 작업에만 집중함으로 회갑이 훨씬 지난 지금 겨우 일곱 번째 가지는 진중한 개인전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그동안의 작업을 체계적으로 자료화한 화집발간을 기념한 전시이기도 합니다.

우리 화단에는 바깥으로 빠른 변신이나 변화를 보이는 작가는 많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직진하는 작가는 드문 편입니다. 최병민의 작가적 태도는 후자에 속하지만 그 작업의 감수성과 기량은 오히려 예민합니다. 작업의 내용도 그렇지만 인체조각의 완벽하고도 독자적인 해석과 표현은 우리나라에서 단 한명 밖에 없는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듯 묵묵하게 작업에만 몰인하는 최병민이란 작가의 전시보도를 의뢰하오니 아래의 자료와 첨부한 도록을 검토하시고 협조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바위섬 1_20x14x49cm_Bronze_2011

 

 

투명한 인간, 그 아름다움에의 獻辭

- 최병민의 근작 ‘응시’에 대하여 -

김 진 하 / 나무아트 대표

 

하늘을 경배하듯, 땅을 위무하듯, 해를 마주하듯, 비와 바람을 부르듯, 신을 맞이하듯, 운명을 바라보듯 경건하게 서 있는 사람. 머리와 어깨 팔에는 구름, 해, 달, 번개 등을 이고 두 발은 가지런히 대지를 딛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고도 강인한 육체, 절제되고 고요한 동작, 시대와 공간을 구별하는 의복이나 배경이 없는 나신의 직립. 거기에 부드러운 바람이 일며 스치는 듯, 그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최병민의 2003년 이후 근작은 바로 이런 사람, 대체로 남성이다. 과거에 그가 묘사했던 인체와는 사뭇 다르다. 농경적 샤먼, 노동, 놀이, 춤, 제의 등의 소재들은 여전하지만 인체를 다루는 방식은 달라졌다. 뼈만 남았던 인체는 부드러운 살갗과 강건한 근육으로 덮여지고, 움직임과 기울임이 컸던 다채로운 동작의 변화는 직립의 수직으로 고요하게 멈추어 섰다. 팔의 동작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도 움직이지 않는 굳건한 하체에 의해 안정적이다. 여전히 신화적인, 그러면서도 경건한 느낌이 극대화 된다. 정지(停止). 시간은 흐르되 동작은 멈추어진 상태. 그 멈춤은 스스로의 의지 혹은 의례 때문인 듯 다분히 의도적인 자세다. 사람이 이런 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의전(儀典)·의식(儀式)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동작이라 하겠다. 무거운 분위기의 어떤 중압감, 수도승 같은 비의(秘儀)적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사실 이런 자세나 느낌은 과거 구작에서도 일정부분 보였던 것이다. 1992년 금호미술관과 1995년 나무화랑에서 열렸던 최병민의 개인전에서의 역동적이고 활발했던 자세들 사이로 몇 몇 작품에서 바로 이런 의식에 참여한 사람의 정지된 긴장감과 절제된 경건함을 볼 수 있었다. <음복 飮福, 1991><충견 忠犬, 1991><평화 平和, 1991> 등과, 그 후부터 2003년까지의 작품 중 <감感><손><평화Ⅱ>과 같은 작품이었는데, 거기에 연장된 듯 보이는 근작에서는 직립의 동작에서 더욱 동세를 제거한 단순함으로 이 긴장감은 증폭된다.

최병민 근작의 특징은 이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설명이나 서술을 배제한 인체의 동작. 완벽한 해부학적 기초에서 필요 없는 살과 군더더기의 제거. 원하는 표정만을 남긴 채 여타의 감정들을 소거한 얼굴구조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핵심적 형상성. 그러니까 최병민은 그가 설정한 주제에 대한 접근을 위해 조각을 구축하기 보다는(비록 소조적 방식을 택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정리를 끝낸 인간과 인체를 위해 필요 없는 부분을 거세함으로 그가 의도한 주제로 나아가는 방법을 구사한다. 이 때 조각언어는 명료해지고 내용과 형식이 하나에 이른다. 프랙탈 이론처럼 거기에는 인간의 정신이 확장되어 우주가 되고 우주와 자연이 축소되어 인체가 되기도 한다. 그곳에는 형상과 공간의 압축이 빚은 상징의 긴장감이 흐르고, 그 상징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을 넘어서는 인간의 원형적, 혹은 본질적인 존재성에 관한 것이다. 상식·역사·기록 등에 의한 합리적 구체성보다는 신화·전설·상상·유추 등이 빚은 카오스적이고 샤머니즘적 시각으로 자연과 관계하면서 빚어지는 인간과 문화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돌출해내는 풍토성은 넓은 의미에서의 오리엔탈리즘, 그 중에서도 역사시대 이전 동북아시아 전체 문화의 냄새처럼 느껴진다. 물론 최병민의 작업에서 이런 점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거나 예시된 적은 없다. 그러나 몇 몇 작품에서 보이듯 옛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연계된 제목 <아사달>에서, 또는 인물두상을 묘사한 <응시 03-07, 2003>에서 드러나는 북방계형의 골격--가늘게 찢어지며 눈꼬리가 위로 치우친 눈, 가늘고 높은 코와 얼굴형, 얇은 입술--등은 고대 한반도의 북쪽과 현재 중국의 동북삼성인 요동, 간도, 북간도 지역 등을 무대로 유추케 한다. 고조선, 말갈족, 여진족…등, 국경이 모호한 시대 북방 대륙전체를 넘나들며 숱한 부족들의 공통적 신화나 전설 등에 바탕 한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의 고대문화 냄새로 말이다.

과거 동양에서는 우주구성의 인자로 天·地·人을 꼽았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은 추상이자 공기 가득한 대기(大氣)인 비어 있는 하늘. 구체적으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물리적 토대인 대지(大地), 견고한 땅.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생명, 사람이 있다. 사람은 하늘(陽)의 기운과 땅(陰)의 흙이 서로 조화되고 버무려져진 육신으로 표상된다. 반대로 죽음은 그 육신이 정신과 분리되는 현상이다. 하늘로 돌아가는 정신은 혼(魂)이고 땅으로 돌아가는 육신은 백(魄), 즉 살아 있을 때 붙어있던 혼백(魂魄)이 죽음으로 갈라진다는 것. 최병민의 사람은 이 혼백이 분리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육체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살아 있었던 시간이 얼마나 아득한지 그 몸에 별자리와 산과 강이 박히고 새겨졌다(‘응시’연작). 마침내는 시간의 퇴적으로 망부석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육체. 뼈와 살이 흙과 바위와 같아지고 거기에 켜켜히 박힌 숱한 전설과 이야기, 그리고 묵언.

육체가 대지와 흙으로부터 와서 다시 거기로 돌아가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자연관이다. 이는 흙으로 사람을 빚은 창조론과도 같은 맥락이다. 구약 창세기가 수메르문명에 기반 한 서양의 창조신화라면, 고대 동양에도 이런 신화가 있다. <산해경 山海經>에 등장하는 반고(班固)의 천지창조와 이어지는 서왕모, 복희, 신농, 여와 등의 삼황오제 신화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여와’는 진흙으로 남녀 사람형상을 빚고 입으로 숨결을 불어넣어 마침내 사람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우주, 자연, 사람, 그리고 뭇 생명들이 통일되는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대륙의 서쪽 끝 곤륜산에서부터 동해바다 끝까지 공통적인 신화의 뿌리다. 서쪽으로부터 유래한 한족(漢族)과 동쪽의 동이족(東夷族)이 그 신화를 구성하는 분모들이다. 최병민의 작업은 바로 이 고대 동이족 전체로부터 고조선의 건국신화, 그리고 여타 고대국가나 부족들의 설화 등 우리문화의 원형에 상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실증적인 역사학의 방식보다는 무언가 크고 분명치 않은 느낌, 이미지, 유추 등을 버무림으로 인해 모호하면서도 커다란 흡입과 울림이 거기에서 발생한다.

신화와 전설은 문자시대 이전 일상성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서사이다. 비유와 은유가 기록(역사)을 대신한다. 이 고대의 서사적 사건과 시공간을 상상의 무대로 하여 최병민은, 마치 사람을 만든 조물주 ‘여와’처럼, 인간 존재에 대한 그의 입장을 흙의 붙임.빚음.떠냄.문지름으로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숨결을 불어 넣는다. 창조된 그들은 원시시대 이후 문명을 처음으로 맞이할 때의 정명(正明)의 정신과 지혜로움, 아름답고 건장한 육신을 가진 순수한 인간형이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경건한 대면과, 그 자연에 내재된 정령과, 사람사이를 주술로 중개하는 샤먼(Saman) 혹은 무격(巫覡)의 초월적 현실성이 최병민의 조각에서 정지되어 긴장된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신화인지 어떤 전설인지 그 소재가 중요하지는 않다. 조각은 그런 소재들을 서술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을 형상화하는 질료, 형식, 분위기, 상징이 중요하다.

 

 

아사달-그 곳_23x14x47cm_Bronze_2012

 

 

최병민 조각의 미덕은 바로 그만의 조각적 형식과 더불어, 넓고 광대한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인체에 축약해 내는 침묵의 음유(吟遊)와 은유(隱喩)의 발성법과 표현법이다. 소급해 보자면 그 침묵은 작품인물에서의 감각기관인 눈과 입의 생략과도 마찬가지로 일맥상통한다. 그 중에서도 눈의 약화와 입의 생략은 최병민 작품 읽기의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다. 묘사되어 있으나 흐리게 처리된 눈은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그 시선의 방향과 표정으로 작품의 주요 포인트가 된다. 눈은 무언가를 보는 감각기관이지만 눈을 뜨고 있을 때 사물이 저절로 보이기도 한다. 의식/무의식적 감각/지각행위이자 능동/수동을 아우르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병민의 작품에서의 눈은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눈이다. ‘凝視’라는 제목처럼 의식적인 바라보기 혹은 관찰이다.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앎의 의지, 즉 지혜를 구하는 행위다. 거기에는 올바로 봄과 올바로 인식하려는 인간의 지혜를 향한 원형적 본능이자 의지가 전제된다.

눈에 비하면 입은 아예 묘사되어 있지도 않다. 봉인된 입. 말에 대한 절제, 혹은 묵언. 말을 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화자의 의지가 있을때라야만 가능하다. 감탄사나 비명 등을 제외한 말은 상호소통을 단서로 한다. 이성적 행위란 것이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어딘가 집중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무언가를 응시하며 거기에 눈이 몰입되어 있을 때, 그리고 그 대상과 현상을 분석하고 알고자 애쓸 때 말은 필요치 않다. 오히려 깨우침에 방해가 된다. 깨우친 이후의 말은 지혜가 되지만 깨우치기 전의 말은 군더더기다.

바로 이 때의 응시는 세계와 현상이 인간의 지식에 의해 개념화되기 이전 원초적 상태에서의 인지작용을 의미하기도 하며, 또 개념에 의해 사람의 순수한 감성과 인식이 방해받지 않아야 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최병민 조각의 이 묵언(默言)을 수행하는 사람이 순수한 상태의 인간형이라거나--춤과 놀이와 사유와 노동을 하는 형상들--세계와 존재에 대한 직관적 깨우침을 지향하며 제의에 참가한 수행자나 예지자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속되지 않고 진리를 구하는 이들은 현자(賢者)다. 그런 현자의 침묵이 절제된 조각형식을 통해서 체현되어 나올 때 소재인 사람과 작가의 정신성이 동시에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인체에 대한 최병민의 접근과 표현은 안구의 궤적에 의존하여 대상을 분석하고 재현하는 서구의 모방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최병민의 소조기법은 인체를 사실적으로 모델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사실성을 약간씩 흔들면서 오히려 ‘묘사’에서 벗어나오는 비틀기를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조각형식에 새로운 지각적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표정의 생략, 극적인 동작, 고대 시제로 돌린 원시적 이미지 등 좀처럼 관찰에 의존하는 재현적 리얼리티는 별로 없다.

다만 거기에서 나타나는 인체는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한국인의 몸을 만들고자 하는 최병민의 미적 의도가 수반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렇게 구축된 형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육체라는 물리적 조건이나 형태에 앞서 작가에게 내재된 정서, 느낌, 의지, 감성, 생각 등을 단번에 드러내는 정신에 대한 ‘형상성’이다. 대상을 통해 작가의 내면, 혹은 정신성을 표출하는 행위는 결국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성찰의 결과이며 최병민이 궁극적으로 인물을 통해 드러내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인물에 대한 조형적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 동양화의 초상화 미학인 ‘전신사조(傳神寫照)’가 있다. 전신사조는 작가의 내면보다는 대상인 인물에 내재된 성격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의 정신이나 품격을 온전히 담아내더라도 반드시 대상과 그 외형이 닮아야 한다는 응물상형(應物象形)의 전제가 있다.

그렇지만 이는 최병민 작업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최병민 조각의 인물은 구체적으로 이름이 붙는 특정인이 아니라 익명의 ‘누구’일 뿐이다. 때문에 각각 대상의 특징이 없을뿐더러 그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분석할 이유도 없다. 그러니까 전신사조의 미학, 즉 특정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오히려 철저하게 익명의 사람들, 혹은 누구라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집단적(문화적) 전형성의 기호, 혹은 표지에 가까운 인체다. 그들은 놀고, 춤추고, 노동하고, 의례를 갖추는 동작을 취할 뿐이다. 삶과 인간과, 자연(우주)에 대해 신성함과 경건함, 예의와 존경, 평화를 구하는 것은 작가 최병민이다. 그래서 최병민이 만들어 낸 이 인체들은, 현대인들의 실존에 대한 불안·고독·갈등·소외·욕망 등에 상대적으로 대비되는 원초적 인간상이라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최병민의 작품에서의 이런 인간형이 현실에서의 실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로지 최병민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인간관의 기의(記意)이자 미적 기표(記票)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런 상상공간과 상황, 인간형의 제시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부재한 현실을 강조하게 된다. 애석한 일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내밀라는 지극히 아름다운 성경의 구절은 그러나 실재로는 실현 불가능한 현실의 패러독스이기에 더 고귀하게 느껴지듯이, 최병민이 설정한 인간에의 숭고한 가치도 지금 존재할 수 없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 된다. 이 현실적 불가능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최병민이 제공한 육체와 정신의 싱싱한 건강성의 크기에 반비례하는 절망을 동시에 맛본다. 그래서 마치 그의 조각에 등장하는 구름처럼, 아름다움의 부재와 그를 갈구하는 모순은 더욱 우리의 마음에서 안타까운 길항작용을 한다.

사라졌거나 실재하지 않는 것에의 동경은 아름답되 비극적이다. 최병민 조각의 이 아름다운 그로데스크도 지금은 부재한 순수했던 인간형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을 증폭시킨다. 거기에 선과 악, 현재와 과거, 개인과 공동체, 절제와 욕망,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이분법적인 단순함을 넘어서는 최병민 작업의 너비가 있다. 비이성적이고, 설화적이며, 먼 과거에 시제를 두는 등 비록 오늘의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지 않지만, 소통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오늘 우리들의 삶과 세상살이에 대한 반성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최병민의 조각은 그의 관념에만 존재하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과거 사이에서 질긴 상징의 끈을 맞당기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 형태.구조.질감과 작가 내면의 인간존재에 대한 지향성으로 근작에서 최병민은 완벽하게 우주와 하나가 된 인간의 육체를 만들었다. 지방질을 제거한 늘씬한 몸매에 유려하면서도 강인한 몸. 거기에서 발생하는 발랄한 상쾌함, 심오한 존재에의 성찰, 질기디 질긴 생명에의 의지, 우주로까지 확대되는 고대인들의 기원과 에너지, 그리고 명증한 인간정신에의 고양은 우리들이 앞으로 지향코자 하는, 혹은 회귀코자 하는 과거의 능동적인 인간상에 다름 아니다. 이는 최병민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던 죽음에의 의지나 공포를 역전시키는 포지티브한 생명성이 주는 맛이다. 고요함·경건함·숭고함·진지함 등 마음에 내려앉는 미적 분위기의 통일이 주는 맛은 더욱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신명과 거룩한 상징을 이끌어 낸다.

최병민의 작품 모두가 집합하면 고대의 축제처럼 보일 것 같다. 농경시대 춤과 놀이와 무예와 제사 등, 축제가 맞다. 고조선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처럼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자 땅에서는 기쁨을 누리는 행사. 하늘에 사람의 춤을 바치고, 북을 두드리며, 모두가 하나처럼 경계 없이 평화를 기원하는 이 행위들은 개인을 전체로 확대시키며 하나의 문화, 공동체의식을 만들어 낸다. 이때 축제는 사람을 들뜨게 하면서도 순수하게도 만든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고 나면 지나간 삶의 궤적에 대해 반성을 요하는 시간이자 더 희망적인 앞날과 세상살이에 대한 의지를 다듬는 시간이 기다린다. 일상이다.

최병민이 상상하고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이 축제와 같은 세계와 일상이 통일되는 세상의 인간이다. 작가에게는 관념적인 상상을 옮긴 행위에 지나지 않겠지만, 최병민의 작품을 보고 느끼는 소통과정에서 설득력이 발생한다면 이 주관적 관념은 객관적 리얼리티로 전환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보았다.-- 고대든 현대든 사람 사는 것에 대한 생각과 기원이 다르지 않을 터, 하물며 최병민의 상상과 생각과 작업과정이 상징, 조형, 미감 등을 통해 우리들의 마음에 오롯이 들어앉음에랴. 언어적 개념이나 명제로 두드러지지 않고 모호하게 감지/감촉되는 최병민 조각의 궁극적인 주제와 가치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지금은 부재한 ‘순수하고 지혜로운 인간’에 대한 꿈, 그런 꿈의 투명한 표지(標識), 혹은 헌사(獻辭)로서의 조각에 대한 믿음 말이다.

 

 

주사위-그 곳_28x17x46cm_Bronze_2012

 

 

 

 

■ 최 병 민 (崔秉日民)

 

1949년 경기 양평 출생 | 휘문고등학교 졸업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개인전  | 1988  제3미술관 기획 | 1992  금호미술관 기획 | 1993  나무화랑 초대 - 'MAQUETTE' | 1995  나무화랑 초대 | 2008  모란미술관 초대- '응시' | 2011  나무화랑 초대 | 2012  관훈갤러리, 나무화랑 초대 - '人間-宇宙'

 

단체전  | 1975-95   혜화동인전 | 1976-83  12월전 | 1977  현대공간회전 | 1983-84  현실과 발언전 | 1988-97  한국성-그 변용과 가늠전 | 1976  국전  | 1984  제3미술관 개관2주년 기념전 | 새로운 정신전 MAIL-ART를 통하여, 제3갤러리 기획 | 1986  로고스와 파토스전, 관훈미술관 기획 | 1989  금호미술관 개관 기념전 | 1990  제3미술관 개관 7주년 기념전 | 모란미술관 개관기념 야외조각전 | 화랑미술제 '90 서울 ART FAIR, 한국화랑협회 기획 | 1991  한국형상조각의 모색과 전망, 모란미술관 기획 | 조각의 힘, 갤러리아 미술관 기획 | 제5회 '91 한국현대조각 야외초대전, 춘천문화방송 | 1992  덕원미술관 개관기념전 | 서남미술관 개관기념전 | 제6회 '92 한국현대조각야외초대전, 춘천문화방송 | 우성 김종영선생 10주기 추모전, 우성 김종영 기념사업회 | 현대공간회 25주년 기념전, 현대공간회 기획 | 1993  십이월전 - 그후 10년전, 덕원미술관 기획 | 신작초대전, 그림마당 민 기획 | 민족예술회관 건립기금마련전, 민예총 기획 | 정신주의전, 녹색화랑 | 정신이 투영된 인간의 모습전, 동호 갤러리 | 1994  자존의 길, 금호 갤러리 신춘기획 | 민중미술 15년전, 국립현대미술관 |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전, 예술의 전당 | 인사갤러리 개관기념전 | 도깨비의 해석전, 서남미술관 개관2주년 기념 | 통일 미술제, 갤러리아 아트홀 기획 | 1995  자존의 길 II, 금호 갤러리 신춘기획 | 한국 조각의 오늘, 종로 갤러리 기획 | 비무장지대 예술문화운동작업전, 공평아트센타 | 1996  오늘의 조각가 15인전, 송원화랑-광주 미사화랑 아트인코리아 | 사비나화랑 개관기념전 | 한마음 현대미술전, 한국미술협회 | 서울대학교 개교50주년 기념전 | '96 한국현대야외조각 100인초대전, 춘천문화방송 | 신축 금호미술관 개관기념전 | 1997  민족예술대학건립기금전 |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광주 | 대화/공간-조각전, 올림픽조각공원 | 1998  200인 조각가 소형작품전, 선화랑 | 열린 미술제, 킴스 아울렛 | 1999  '한국현대미술25년-근대성의 흔적' 인터넷미술전, 추계예대 | 90년대 미술의 정황전, 엘렌 킴 머피 갤러리 | 2000  금호미술관 10주년 개관기념전 | 한국.베트남 평화전시회, 서울옥션 | 2001  서울판화미술제-MULTI 21, 예술의 전당 | 사람은 왜 기억할까? 전, 갤러리사비나 | 소 춤추다, 인더 갤러리 | 문화사회로 가는 길, 문화연대 | 2002  천개의 눈, 천개의 길, 덕원 갤러리 | 형상조각 6인전, 관훈 갤러리 | 2004  서울미대 온라인 동문전 | 당신은 나의 태양전: 한국현대미술 1960-2004, 토탈미술관 | 작은 기념비전, 선 갤러리 | 2005  갑오세 갑오세전, 동덕미술관 | 2006  미소전, 조선 갤러리 | EHS project 2006, 세종문화회관 | 보성개교 100년전, 박영덕화랑 | 2006 서울미술대전 구상조각, 서울시립미술관 | SIPA 2006, 예술의전당 | 2007  Hommage 100 한국현대미술 1970-2007, 코리아아트센터, 부산 | '인간' 세상보기, 마나스 아트센터, 양평 | '4인행', 한 갤러리 | 서울조각회 기금마련 특별전, 마나스 아트센터, 양평 | 2008  현대공간회 40주년 기념전, 거제문화예술회관 초대 | 2009  Ticktac-Korean Sculpture展, 갤러리 고도 | 서울조각회 30회展-그 서른의 여로, 공평아트센터 | 2010  혜화동인전 20회기념전, 청아 갤러리 | '가만히 들이다', 인천문화재단 | 2011  '인사동 풍물에 流를 더하다, 서울시 디자인재단 | 윤봉길문화축제기념 전국조각가초대전, 예산모현사업회, 예산 | 2012  서울조각회 33회전, 모란미술관, 마석

 

 

 

vol.20120905-최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