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선 展

 

'실존의 포에지'

 

풀 자라는 집_116.8x91cm_Oil on canvas_2012

 

 

관훈 갤러리

 

2012. 8. 15(수) ▶ 2012. 9. 3(월)

Opening : 2012. 8. 15(수) PM 5: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 | 0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검은 길_116.9x80.4cm_Oil on canvas_2012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최경선의 개인전이 오는 8월 15일 부터 9월 3일 까지 2주간 실존의 포에지(Poesie)라는 주제로 관훈갤러리에서 열린다. 2001년 이후 11년 만에 국내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작가는 ‘풀이 자라는 집’, ‘검은길 연작’, ’오아시스’, ‘잊혀진 낙원’ 등의 2011년과 2012년에 작업한 작품 17여 점을 선보이게 된다.

지난 10여 년간의 베이징 생활 속에서 현대사회의 급속한 생성과 해체의 현실을 직접 목도한 최경선은, 혼동과 혼란에 가까운 변화 속에서 자기만의 내면의 목소리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마주했으며, 이에 대한 미완의 결론을 극단적인 내거티브적 효과로 표현하고 있다.

철거되고 있는 빈집과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 주는 낯설고 생경하고 불안한 감정들은 혼란 속에서의 예술가의 무력감을 그대로 전해주며, 관람자들에게 회화가 지니는 ‘반성적 사유’를 가능하게 도와주고 있다.

 

 

겨울 집_145.3x97cm_Oil on canvas_2012

 

 

[작가평론]

실존의 포에지(poesie)

 

“예술이란 일종의 넓은 의미의 언어이다. 이 언어의 도움으로 인간들은 서로 접촉을 시도하며, 이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남에게 알리고 타인의 낯선 경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한 예술가가 순전히 자기실현만을 위해서 창작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상호간의 이해 없는 자기실현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 그러나 자기 자신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더욱 안될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중에서-

 

최경선의 풍경은 네거티브 필름 즉 음화(陰畵)에 색을 입힌 초기 컬러사진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무의식이 출몰하듯이 낯선 세계로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드러나 있지만 숨기고 싶은 곳, 알고 있지만 밝혀내고 싶지 않는 곳에 대한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은폐되고 숨기고 싶은 세계가 모두 비의적인 것도 아니며, 반드시 매혹적인 세계도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은 혼동과 혼란의 세계의 반영에 가까워 보인다. 최경선은 바로 이 어둡고, 황량한 세계의 비참을 목도한 이방인-타자로서의 예술가적 자기인식을 견지하고 있는 존재다. 예술가는 이런 시대적 혼돈과 역사의 참혹함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그럼에도 그들은 생의 허위성에 맞서 어떻게 참다운 실존을 구가하고자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더불어 자기만의 내면의 목소리를 어떻게 빛나는 것으로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을 늦추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최경선의 실존적 미학의 관심 또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의 실존의 방법 중 가장 앙가주망(engagement)한 것이 이 세상에 하나의 아름다움을 보태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향한 노력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부터 태어난 예술이 결코 사회의 추함과 속세의 비참함을 피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술적인 형상이란 항상 두 모순되는 존재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예컨대 예술가는 활력에 넘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멸한 것을 끄집어내고, 무한한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유한한 것을 불러오고, 유토피아를 추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디스토피아를 선택해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 또한 부조리한 모순 속에 얽혀있으며, 이 모순은 예술 속에서 조화롭게(?) 배치된다. 그리고 그 모순이 극단적일수록 예술은 마치 수수께끼 같은 은폐된 세계에서 서서히 탈은폐(aletheia)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예술은 ‘드러냄’ 혹은 ‘노출’이 아닌, 숨겨져 있거나 은폐되어 있다가 서서히 혹은 갑작스럽게 드러난다는 의미에서 ‘탈은폐=알레테이아’이고, 이것이야말로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타자적 풍경, 풍경의 타자

삶의 풍경을 리얼하게 빚어낼 때 이미지는 오히려 단조롭고 판에 박은 듯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전형적인 풍경들은 오히려 보는 이의 부재를 요구하고, 관자로 하여금 풍경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최경선의 풍경은 바라보기 좋은 안일한 풍경도 아니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심리적인 풍경도 아니고, 망막에 호소하는 리얼리스틱한 풍경도 아니다. 오히려 살풍경에 가까운 작가의 화면은 공감을 요구하거나 자기 망각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작가의 살풍경은 관조할만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개 관조할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은 지각하는 주체의 소멸을 야기하곤 하는데, 최경선의 풍경은 어떤 형태의 관조도 일으키지 않으며, 오히려 반성하는 주체를 요구한다. 이러한 최경선의 풍경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이 낯설음과 난처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최경선 작업의 모티프는 크게 집과 아이들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의 이런 모티프는 그의 10여 년간의 타국생활(베이징)을 통해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역동적인 변화의 한가운데 있는 베이징에서는 철거하는 집들, 생업으로 헝클어진 살림살이, 고단한 노동자, 그 와중에서도 어느 곳에서건 활기차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작가에게 이런 베이징의 풍경은 더 이상 이국적인 동경의 대상이 아니며, 암울했던 유년시절의 기억과 오버랩 되기에 이른다. 작가는 특히 걷잡을 수 없는 변화 속에 소외되고 배제되는 타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방치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집과 아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작가의 화면은 음화, 즉 네거티브사진을 연상시킨다. 색채는 거의 금욕적이라 할 만큼 신중하게 선택되는데, 이렇게 절제된 색채는 억압된 세계에 대한 상징으로, 또한 잃어버린 공간을 되찾고자 하는 절박함의 상징으로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세계가 왜 늘 단조로운 회색빛 이어야 하는지, 왜 침울한 정서밖에는 안 느껴지는지, 왜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는 늘 단편적으로만 드러나야 하는지, 무엇보다 색채에 대한 작가의 선입견과 편향성 또한 좀 더 숙고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2012년부터 화면에 새로운 모티프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로 화지아오 나무가 중요한 상징으로 배치되면서 화면은 다소 활력을 되찾게 되었던 것! 화지아오는 산초나무 열매를 말하는데, 보통 ‘마라’라고 하는 이 향신료는 중국음식에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혀를 마비시켜 얼얼한 맛과 매운맛을 내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지나치게 자극성이 강해 처음엔 오히려 적응을 못하지만, 이 맛에 길들여지면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맛이라고 한다. 사실, 이것이 무슨 나무인지 이해하기 전, 그것은 그저 살풍경과 꽃나무의 결합인지라 어떤 긍정의 메시지를 주려는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빨갛고 탐스러운 열매와 가지의 기묘한 형태에 끌려 이 도상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 나무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물질문명에 길들여지는 현대의 인간 조건을 설명하기에 합당하다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잊혀진 낙원_193.9x130.3cm_Oil on canvas_2012

 

 

빈집 혹은 언홈리

먼저 최경선이 그리는 집은 거의 빈집이다. 집은 콘크리트와 철골구조를 가진 획일적이고 삭막하며 차가운 현대적인 빌딩에 가깝다. 전혀 사람냄새와 온기를 잃은 빈집은 얼마나 낯설고 생경한가? 사람들이 더 이상 살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더 이상 쉬고 싶은 공간이 아닐 때, 사람들이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그곳은 폐허 혹은 폐가처럼 낯설고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곳으로 변한다. 그래서 그곳은 일종의 수용소 같은, 잠시 머물 수는 있지만, 결코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비참한 곳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그러한 집은 거의 허울뿐인 공간이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 공간을 피해 도망 나온 사람들처럼 보인다. 집을 배경으로 배치된 아이와 어른들은 마치 유령처럼 떠도는, 갈 곳 없는 영적 부랑아들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감정이 최경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이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집은 무엇인가? 그곳은 인간의 영혼이 쉬는 곳, 타자로 대표되는 아이들이 행복한 곳이다. 그러기에 집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회귀 해야 할 곳, 영원한 곳, 자궁 같은 곳이다. 그런데 그 집은 비어있고, 폐허가 되었다. 폐허가 된 집은, 집을 잃어버린 자들의 삶 즉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에 대한 메타포이며, 인간 영혼의 피폐함의 상징이다. 그러니 빈집을 보며 그렇게 불편하고 불안했던 이유에 대한 해답을 얼마간 얻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며,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더군다나 실존주의적으로 예술가는 이중으로 소외된 자들이다. 기성의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사회로부터, 즉 지배적 가치로부터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안일한 삶으로부터 그렇다는 말이다. 즉 작가는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소외시키는 자, 경계에 선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런 빈집 앞에서 아이들이 논다. 아이들은 열심히 놀이에 집중되어 있듯이 보이지만, 조금은 위태로워 보인다. 실상, 위태로운 건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일 것이다. 더 섬세하게 말한다면, 작가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풍경 속 아이들이 자신들의 열악하고 위험한 생존 조건을 작가에게 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는 메를로-퐁티가 주목한 “그러므로 풍경화는 나를 통해서 스스로를 사유하며, 나는 그것의 의식으로 성립된다”는 세잔느의 말을 환기시킨다. 세잔느는 “풍경이 내 속에 들어와서 자기 생각을 한다”고 말하곤 했다. 어쩌면 예술가는 더 아픈 존재들한테 자기 몸을 비워주는 영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경선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선과 응시가 교차되는, 사유하는 풍경화가 된다. 그런 까닭에 관자로 하여금 여전히 낯설고 생경하고 불안한 감정을 주는 것이며, 바로 그 그런 이유 때문에 관자들은 생생히 깨어서 풍경이 전하는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최경선 회화가 지니는 ‘반성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힘인 것이다.

동시에 그 생경하고 불편한 감정은 또 예술가의 무력감을 그대로 전해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실존은 아이들의 생존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아이의 생존이 위협받는 땅에서 예술은, 도대체 그림은 “벽에 붙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말이다. 최경선 작품을 보는 내내 불편함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러한 무력감이 온전히 관자에게 전달되는 까닭이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를 통해 표현되고, ‘집 같은(homely)’은 ‘집 같지 않은(unhomely)’에 의해 표현된다면, 작가의 의도 아닌 의도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인데, 그럼에도 디스토피아 즉 잃어버린 낙원에서 ‘잃어버린’, ‘돌아가야 할’ 근원적인 공간에 대한 추구는 미흡해 보인다. 어떻게 하면 낯설음의 공감을 넘어선,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에 대한 열망과 비전을 표현할 것인가?

 

개념(사유) 혹은 감각

잃어버린 낙원은 본향(本鄕)이다. 작가와의 서면인터뷰 중 작가로부터 ‘본향’(사실 이 단어는 내게는 약간 금기시된 단어이기 때문에 발설하기엔 좀 난감하게 생각해오던 차였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작가가 어떤 태도로 작업에 임하는지 가늠이 되면서, 순간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떠올린 것이 A. 타르코프스키가 <희생>과 <노스텔지어>에서 말하는 본향의 이미지였다. 최경선은 누구보다 선험적으로 그러한 본향에 대한 이미지를 자주 상상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재의 작품에선 그러한 이미지는 배제되고 있었다.

오히려 이전의 <물주기 Watering>(2007년)와 같은 작품은 실존적 의지를 가진 존재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높은 건물에서 아주 작게 축소된 사람이 물을 뿌리는 장면은, 마치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어>에서 주인공 코르차코프가 온천의 끝에서 끝으로 작은 촛불 하나를 켜서 그것이 꺼지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옮기는 과정을 반복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최경선의 근작은 자신의 의지를 얼마간 배제하고, 오히려 현실의 상황이 그대로 표현된 다큐멘터리적 요소(다큐도 이미 객관적인 매체가 아니다. 이미 카메라의 각도에 작가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를 몽타주 형식으로 만들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때론 예술가의 의지와 소명의식에 의한 개념적 작품보다 외부현실을 그대로 재구성하는 일이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경선은 예전 작품을 통해 개념을 생각해가며 이해가 좀 명료해 보이는 이미지를 선호했다면, -사유(개념)를 통해 표현을 추구하는 화가는 무엇보다도 대상이 자연 속에서 드러날 때의 수수께끼, 즉 우리가 매 순간 볼 때마다 새로워지는 수수께끼를 놓치게 된다- 현재는 이미지 자체가 말을 하도록 하는 방식, 그러니까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그 자체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전에는 별로 보이지 않았던 방법, 즉 화면을 지우는 기법이 사용된다. 일종의 돌발흔적 즉 ‘디아그람(diagramme)’이 그것이다. ‘디아그람’이라는 전략은 전체가 아닌 부분적으로 도입되는데, 이는 추상과 구상을 동시에 벗어나려는 의지, 물질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더불어 이 기법은 어떤 갑작스러운 에너지의 출몰, 이로써 예기치 않게 등장하는 공간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사실, 이 기법을 매우 훌륭하게 구사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예술세계를 풀어낸 G. 들뢰즈의 책 <감각의 논리>에서는 디아그람에 대한 숙고할만한 논지가 실려 있다. 베이컨이 사용하는 디아그람이라는 개념은 “감각을 그린다”는 베이컨의 발언에서 유래한 것으로 질서와 리듬의 맹아를 내포한 혼돈, 말하자면 수많은 형상화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어떤 회화적 사실이 도래하게 만들어주는 돌발흔적을 가리킨다. 디아그람은 화폭에 혼돈과 재난을 도입하는데, 이것들에 의해 빈 화폭을 미리 점령한 기존의 판에 박힌 이미지들은 무장해제되고, 새 이미지들이 생성될 장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디아그람은 혼돈이며 파국이나 동시에 새로운 질서 혹은 리듬의 싹이기도 하다. 아마 최경선의 작품이 가진 힘은, 바로 기존의 이미지를 무효화하고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시키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본향 혹은 포에지

최경선은 삶에 애정을 갖고, 삶을 인식하고, 삶을 변화시키고, 삶을 개선하는 일에 작가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런 고민과 함께 작가는 변화의 도도한 물결 속에 인간의 생존을 겁박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소외된 공간과 인간을 다룬다. 그리고 작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연민(empathy)에 근간하지만, 그것은 연약하거나 감상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분노할 줄 아는 비판적 힘과 진실의 속살을 드러내려는 강인한 태도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근작이 ‘침울하다’거나 ‘쓸쓸하다’의 감정과 같이 단선적으로 읽혀지는 것은, 바로 패러독스와 위트, 유머와 같은 수사법(rhetoric)의 도움이 없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술도 사람도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기만 하다면, 관객들은 부담스러워하고 거부반응을 보이기까지 한다. 앞서 말했듯이 진지하고 심각한 거대담론에 근간한 테마일수록 에둘러 미시 담론으로 가는 길을 선택 해야 함이 옳을지도 모른다. 예술은 마치 휘어서 돌아가는 원반 같은 것이다. 은유와 환유와 같은 비유법과 위트와 역설 같은 수사는 예술이 드러나는 방식 즉 탈은폐(aletheia: 진리)의 방식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최경선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근작이 가진 딜레마에 대한 아주 섬세하고 정교한 모색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사실, 예술이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서는 미술사의 모든 대가들이 고민하고 열망해 오던 것이다. 예술에 답이 없다는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예술의 경지가 시적 경지라고 가정한다면, 나는 단연코 타르코프스키적 포에지(詩: poesie)를 들고 싶다. 포에지란 하나의 세계관이며 현실과 맺는 관계의 하나의 특수한 형식이다. 이렇게 볼 때 포에지란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하여 동반되는 하나의 철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야 비로소 예술은 사실의 반영이 아닌 진실의 창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작가에게 이러한 타르코프스키적인 시적 연결을 당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에게 내 스스로 모토로 삼고 있는 좀 긴 아포리즘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해짐을 느낀다.

“위대한 예술가가 긴 인생의 최후까지 창조적인 상태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자질이 필요한 것 같다. 그는 한편으로 삶에 대한 비정상적인 예민한 의식을 유지해야 하며, 결코 흡족하지 않아야 하며, 삶에 만족하지 말아야 하며,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야 하고, 그것을 가질 수 없을 때는 절망해야 한다. 불가사의한 무거운 짐이 밤낮으로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는 위로 받지 못할 벌거벗은 진실들로 뒤흔들려야만 한다. 이 신성한 불만, 이 불균형, 이 내적 긴장 상태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이다. 많은 이류시인들은 젊은 시절에만 그것을 가진다. 워즈워스는 절망할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그의 시적 힘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흔히 역동적 긴장들이 너무도 강렬해서 그 사람이 원숙함에 다다르기 전에 그를 파괴시켜 버린다.”

-험프리 트레벨얀이 쓴 괴테에 관한 글 중에서-

유경희(미술평론가/ Ph.D.)

 

 

집에 관한 조언_193.7x130.3cm_Oil on canvas_2012

 

 

 

 

■ 최경선

 

1995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개인전  | 2010  유년의 잔치, 갤러리 아트사이드, 베이징 | 2009  허욕의 자리, T Art Center, 베이징 | 2001  RETURN, 덕원 갤러리, 서울

 

그룹전  | 2012  United Art Scramble, Michael schultz Gallery/ With Space, 베이징 | 제30회 화랑 미술제, 관훈갤러리, 코엑스, 서울 | The first step in 화랑기획전, With Space/ 798 Be 갤러리/ TN 갤러리, 베이징 | 2011  His Her Story, MK2 ART Space, 베이징 | RED LAND 제1회 강서예술제, 강서무주문화국 미술, 무주/ 강서난창문화아트센터, 난창 중국 | ART 제7회 중국 송좡 문화 예술제, 경계-중법 아트센터, 베이징 | KIAF 한국 국제 아트페어, 관훈갤러리, 코엑스, 서울 | 한국 현대 형상 회화, 관훈갤러리, 서울 | CIG 베이징 국제 아트 페어, 중국국제무역센터, 베이징 | 2010  Now Asian artist 부산비엔날레 특별전 (부산문화원, 부산 | 감각 이동, 주중한국문화원, 베이징 | 2009  송주앙 청년 예술제, 샹빠오 미술관, 베이징 | 798 예술 비엔날레, 아트사이드, 베이징 | 시각과 유희 (주중한국문화원, 베이징 | 표이, 딩펑 갤러리, 베이징

 

소장  | 베이징 국제 자동차 박물관

 

 

 

vol.20120815-최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