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연 展

 

 

어느 날 문득 series#1_50x60cm_gelatin silver print_2009

 

 

갤러리 룩스

 

2012. 6. 6(수) ▶ 2012. 6. 12(화)

Opening : 2012. 6. 6(수) PM 6: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5 인덕빌딩 3F | 02-720-8488

 

www.gallerylux.net

 

 

어느 날 문득 series#17_50x60cm_gelatin silver print_2010

 

 

작가 노트

어느날 문득

김성연

 

사진이 내게 중요한 표현도구로 자리 잡을 때 쯤, 늘 안을 향해 있던 나의 시선이 조금씩 밖으로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생각의 시-선(視-線)에 안과 밖의 차이가 있을 리 없겠지만, 사진으로 내 속내를 드러내고자 할 때 대상의 문제가 중요하였기 때문일 터이다.

아마도, 2009년부터 숲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듯하다. 나의 발길은 자주 산과 들 그리고 바다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나무와 숲을 찍어갔다. 장소로는, 지리산, 천진암, 석모도, 제부도, 안면도, 북한산과 두물 머리 등등이었을 것이다.

작업을 하며 숲이 발산하는 매력에 점점 매료되어 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숲은 인간보다 빠르게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며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동시에 다양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 렌즈 속에선 새로운 것들이 끊임없이 보였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숲에는 모든 것이 있다. 땅도, 물도, 바람도 그리고 불도 있다. 그러하니 숲에선 생명이 이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숲에서 생명의 기운을 깊이 느끼기 시작하며, 나는 우주의 성스런 기운과 종교적인 영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전설(傳說)과 종교의 탄생 배경은 “숲-속”이다. 단군왕검의 신단수, 석가가 태어난 룸비니 동산과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기독교의 에덴동산과 성서 속에 수 없이 나오는 숲과 나무들이 그러하다.

숲을 찍어가며, 나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가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연 속에 종교가, 종교 속에 자연이, 자연 속에 인간이, 종교 속에 인간이 혼융(混融)된 상태로 함께 존재함을 말이다. 어쩜 궁극(窮極)엔 종교도 인간도 자연의 흐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여 처음에는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찍어나가던 작업의 방향을 조금 바꾸었다. 자연과 종교와 인간이 어우러져 교류하는 모습을 함께 공유하며 찍어나갔다. 인위적인 연출도 있지만 가능하면 우리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찍었다.

지금 선보이는 이 작업들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약 3년 동안 작업한 것들이다. 작업하는 내내 자연과 종교와 인간을 첨망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첨망의 흔적이 모아지면, 또 다른 렌즈의 시선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날 문득 series#18_50x60cm_gelatin silver print_2010

 

 

전시 서문

김성연의 작업 “어느 날 문득”에 대하여

정주하: 사진가,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1.

사실, 사진술(Photography)은 참으로 단순하다.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카메라로 불리는 기계를 손에 쥐고 그 위에 있는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 더 이상 무엇인가를 덧붙일 시간적 겨를도, 의미의 틈새도 없다. 그저, 각인된 빛의 궤적을 따라 이미지가 형성되면, 그것을 다시금 현상하여 눈으로 보면 그만이다. 1888년에 코닥 1호의 홍보 문구 <당신은 셔터만 누르세요! - 그 다음은 모두 우리가 처리해 드립니다.>가 그랬던 것도 아마 이러한 사실에서 기인할 터이다. 사진을 잘 찍으려거든 파인더를 보고 셔터를 누르라는 말들을 하지만, 그 셔터라는 것이 파인더에 눈을 대야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허공에서 자동으로 작동하기도 하고, 손이나 발끝으로 눌러서 작동하기도 한다. 그렇게 셔터의 작용이 끝나면 조리개와 셔터 막의 움직임만으로 다른 모든 ‘그려내는 행위’는 기계 스스로 완성한다. 그뿐만 아니다. 카메라에 부착된 렌즈는 가혹하리만치 기계적(기機: 틀, 기계 械: 형틀, 수갑, 차꼬 的: 과녁, 표준, 요점)이다. 렌즈가 가진 각도와 범위에 포착된 모든 사물은 그 자체가 빛을 반사하는 한 필름에 흔적을 남긴다. 곧 사진(photograph)이다.

사진기술의 단순한 방법만큼이나, 사진의 생성 역시도 단순하다. 그러니까, 누구나 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포착해내고 복제해내는 사진은 그래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친숙하다. 모두가 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며 누구의 것이라 구별하지 않은 채 좋고 나쁨의 판단을 익숙한 자신만의 경험으로 규정 해버리게 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사진에 사용된 셔터의 빠름에 기대어 순간을 조정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워낙 순식간(예컨대, 1/125초)에 촬영되는 사진이니 그 순간을 어떻게 컨트롤하여 의식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곧, 우연에 기댄 결과라 함을 주창한다. 이는 의식 혹은 인식이 닿지 않는 다른 어떤 세계의 힘으로 사진이 만들어지는 것임을 은근히 주장하고 있으며 동시에 감성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신기(神技/氣)에로의 복속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것은 사진을 둘러싼 사실이자 의혹이다.

사실은, 사진(Photograph)이란 매우 불가해한 것이다. 해독을 원하면서 그 곳에 있으나, 시-지각적 감성에 더 많이 기대곤 한다. 선과 면의 문제와 검고 흰 콘트라스트가 마치 음악에서 소리가 작동하는 범위가 그런 것처럼 직접적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자극을 준다. 구체적인 문법의 체계를 갖춘 것이 아직은 아니지만,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작동하는 것은 분명하다. 검은색과 흰색의 차이와 긴 선과 짧은 선, 혹은 소실점이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그 화면을 읽어내는 마음은 사뭇 다르게 된다. 또한, 그와 동시에, 사진 속에 있는 축소된 대상의 이미지가 지칭하는 현실의 의미로 우리를 이끌어 가 ‘그것은 무엇이다’라고 확고하게 인식하게 한다. 사실의 증명과 감성의 울림은 전혀 그 해석의 맥락이 다를 터인데, 그 두 개의 코드가 하나의 밧줄이 되어 우리들의 의식을 교란한다. 사진이 불가해(不可解)한 성질(性質)을 가지고 있다 함은 여기에 기인한다.

 

 

어느 날 문득 series#25_50x60cm_gelatin silver print_2010

 

 

2.

지금 김성연의 사진 “어느 날 문득”을 보면서 이렇게 길게 사진의 본성에 대한 재고(再考)가 필요한 이유는 그녀의 작업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제목이 지칭하는 것처럼 이 작업은 ‘문득’ 이루어진 듯하다. 무엇을 찍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대상이 분명한데도, 그것이 지칭하는 현실의 의미가 전혀 다르고 모호하게 이해되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심사숙고 해서 작업을 진행 하였기 보다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했거나, 혹은 마구 비틀어 알아보지 못하도록 왜곡한 듯이 보인다. (사진,25) 그러나 어떤 방식을 취했던지 간에 저 사진을 바라보면 마음 안에 일련의 감정이 발생하는데 구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어 가고자 함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여행이라 할 수도 없는 그런 방랑 같은 이끌림 말이다. 보자! 몇몇 사람들이 갯벌 위에 난 길을 따라 섬으로 걸어가고 있다. 검게 처리되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다. 헌데 그 섬과 사람의 동선이 화면 안으로 직선인데 그 위로 가로지르는 새의 날아가는 방향은 그들의 동선과는 십자로 교차한다. 하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횡단하는 새의 동감이 매우 의아하게 어울린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관자(觀子)는 가로의 시선 방향과 화면 안으로 점점 들어가는 사람들의 동선이 부딪쳐서 혼란을 겪으며 보게 된다. 동시에 하늘도 비스듬하다.

(사진,29)도 마찬가지다. 누가 과연 이렇게 이상하게 사진을 찍을까? 앞에 있는 나무 끄트머리와 중간의 호수 모습 그리고 저 원경에 보이는 산의 구성이 마치 카메라가 물에 빠지기 직전에 스스로 찍은 것처럼 보인다. 매우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에 대한 정보가 화면 안에 잘 들어 있음에도 보는 우리는 이 사진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 필경 정방형의 카메라로 작업했을 터이니 시선의 높이가 자유로웠기는 하겠으나. 낮게만 촬영하고자 했다면 앞의 나뭇가지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부조화한 구성을 한 사진은 그러나 우리가 나룻배를 타고 강이나 호수를 노닐 때 뱃머리에 기대고 몸을 비틀어 옆의 광경을 바라볼 때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제공한다. 이미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진행하는 배의 요동과 그 중심에 앉은 나와의 비대칭 구성은 바로 이 사진이 보여주는 것과 유사할 터이다. 약간의 어지럼증과 함께 말이다. 앞서 가는 우비 쓴 두 산보자의 모습을 찍은 (사진,1)도 그렇다. 비가 막 개면서 그다지 쓸모 없어진 비닐 우비를 그래도 몸에 걸치고 피어 오르는 흰 수증기와 함께 증발해 버릴 듯한 모습이다. 동시에 사진의 전반적인 모습은 저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걷고 있는 나의 행위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화면 안에 있는 구체적인 대상들에는 초점이 맞지 않고, 마치 그 초점이 허공으로 사라진 듯 먼 하늘이 화면의 절반을 넘는다. 그러니까 마치 걸으며 찍다 보니 흔들려 버린 듯 말이다. 그리고 아련하다.

이러한 형태의 사진이 가진 일차적 목적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우연적인 어떤 것을 요구한다. 그러하기에 사진을 읽어야 하는 독(讀)/관(觀)자들은 스스로 가진 매우 개별적인 경험의 순간을 불러내 와야 한다. 롤랑 바르트가 푼크툼(punktum)을 설명하면서 가져다 쓴 것처럼 말이다. 작가 김성연이 화면 여기저기에 흩뿌려 놓은 그 작은 의미의 촉수들을 전체의 틀로 읽어내려 한다면 참으로 민망 할 터이다. 절대로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각자가 지닌 내밀한 경험의 편린들을 화면 안에 있는 대상의 조각들에 중첩시키면서 그 희미한 자국들을 각인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뾰족한 경험의 기억이 화면 속으로 침투하여 나의 시-공간적 흔적을 다시금 확인시켜야 하며, 그리하여, 작가가 제시하는 모순된 이미지의 합성을 현실의 일상으로 재구성하는 사진 읽기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될 터이다.

 

3.

프란츠 카프카가 그렇게 강조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의 연속 속에서 살고 있다. 보통은,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 안에 흐르는/지속적인 물처럼 삶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과연 그럴까? 그 흐르는 듯한 삶이 ‘순간의 단편’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김성연의 작업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쟁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조각으로 연속을 대신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초가 타면서 방출하는 불꽃이 짧은 순간의 반복인 것처럼, 삶이란 조각/순간과 조각/순간의 연계임을 직시하게 하자는 것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조각이 지칭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아닌 전혀 개별적이며 개인적인 것이라고.

또한, 화면 여기저기에 보이는 성모의 모습이나 불상 또는 예수상이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 아이콘이 상징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있는 그 종교적 상징들을 되새겨 보게 된다. ‘옳다’ ‘그르다.’ 혹은 ‘좋다’ ‘나쁘다.’ 하는 관점이 아닌 보는 사람들의 개별적 마음 안에 나름대로 성찰을 요구하는 것으로 읽힌다.

자연의 모습도 같다. 산과 나무들의 모습과 바위의 모습을 경외의 마음으로 보기보다는 물성이 담긴 하나의 대상으로만 보려고 할 때 이 사진들은 의미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관자의 몫으로 말이다. 재미있게. 그러나, 그 재미가 단지 재미만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보았던 자연의 모습으로부터 인공의 시선과 섞이면서 다르게 비치는 엉뚱한 모습으로의 전환이 보인다. 그 시선의 중심에 인간이 있음만이 어쩜 자연스럽다. 이것이 김성연의 작업이 가진 미덕이다.

 

 

어느 날 문득 series#27_50x60cm_gelatin silver print_2009

 

 

 

 

■ 김 성 연

 

1992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 1987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개인전  | 2012  어느 날 문득, 갤러리 룩스, 서울 | 2012  어느 날 문득,  Toyota photo space 초대전, 부산

 

 

 

vol.20120606-김성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