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희 展

 

- KOAS -

 

Song of Praise-Nature_oil on canvas_2012

 

 

인사아트센터

 

2012. 3. 28(수) ▶ 2012. 4. 2(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인사아트센터 2층 | T.02-1736-1020

 

 

Song of Praise-Nature_oil on canvas_2012

 

 

환원불가능하고 작은 것들의 계시적 진실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김창희의 세계와 마주하는데 별도의 주석은 필요없다. 그 세계는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구분하거나 선별하고, 선택하거나 폐기하며 별도의 종합을 도출해야만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난해한 본질의 탐험이나 복잡한 인식론의 안내 없이도 그 세계로의 길은 이미 모두에게 열려져 있다.

김창희가 그리는 자연은 대문자로 시작되는 ‘위대한 자연’이 아니라, 작고 단촐하며 있는 그대로의 ‘작은 것’들이다. 예컨대 관념적 사유나 추상으로부터 도래한 것들이 결코 아니다. 바람에 살랑이는 버들강아지풀들은 위대하다거나 위엄을 갖췄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계절을 따라 황갈색과 녹색의 옷을 갈아입은 벌판과 실개천이 무릎을 조아리고 존경을 표해야 할 것들인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렇지 않음으로써,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그런 것들이다.  

구름의 모양과 대기의 색이 지니는 품격과 미덕을 아는가? 그것들은 계절의 질서 안으로만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자연의 질서, 우주의 법칙은 맞설 때가 아니라 그 가담자가 될 때, 기꺼이 평화와 자유와 안식의 동반자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개구리, 메뚜기, 벌, 무당벌레는 버들강아지풀의 그늘에서 정확하게 자신들의 자리만큼만 차지한 채 있다. 이 순명과 작음이야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의 주춧돌이요 서까래인 것이다. 그러니 다른 설명은 그 자체로 오류일 개연성이 크다. 그것들 모두를 아우르는 별도의 대단한 결론은 대체적으로 심각한 위험을 동반한다. 이 세계는 따로 종합될 필요가 없다. 그 살아있는 단촐함, 역동적인 협화음, 생명으로 감각되는 작은 것들은 환원불가능한 우주의 단위들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류는 그 사실을 그것들 사이를 나플거리며 비행하는 온갖 색깔의 나비들 만큼이나 알고 있는 걸까?   

 

 

Song of Praise-Nature_oil on canvas_2012

 

 

이 환원불가능함에 대한 동의, 곧 자신이 주체가 되어 별도의 주석이나 해석을 추가하지 하지 않아도 되는 차원에 대한 동경이 김창희가 버들강아지풀을 그리고, 나비의 날갯짓을 채색하는 동기인 것이다. 그렇듯 화가의 ‘그리기’는 설명하거나 납득시키기 위해, 일테면 더 많이 알고 있는 견고한 주체, 자연의 강자(强者)를 입증하는 행위가 결코 아니다. 지금 김창희도 더 높아라할 것이 없는 동등한 위치에서, 오히려 주체의 더 내려놓음이 허용되는 그 자리, 곧 버들강아지와 나비와 개구리와 메뚜기의 휴식처에 까지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선언컨대 그것이야말로 화가가 축복을 누리는 비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자체로서 충분히 족(足)한 줄 아는 자연 앞에서, 지탱하기 어려운 무거운 욕망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법, 곧 자유와 해방의 작은 계기들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Song of Praise-Nature_oil on canvas_2012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외부세계가 혐오스럽고 잔인하며 부패했을 때 감각적인 사람들은 삶에 적합한 장소로 자신의 내부를 찾는다고 했다. 그래서 근대 이후로는 작가의 은밀한 내면을 드러내는 일이 예술의 본류로 인식되고, 자연의 환원불가능한 것들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을 것이다. 추상이 한 층 더 심층적이고 진화된 형태의 정신으로 여겨지고 권장되었던 것도 물론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그건 과도한 일반화가 개입된 오류였음이 드러났다. 내면으로의 도피만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고 창조성을 발아시키는 여정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주체적인 자기탐사를 통해서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작은 곤충과 무명의 풀들, 낙엽 더미, 늪지대의 습기, 따스한 봄볕, 가을의 청명한 대기를 통해서도 존재에 그 심오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생하는 화가,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섭취하는 시인들의 그리기와 시쓰기가 자칫 그 독과 덫에 빠져들고 마는 근대의 주체 미학의 논의와는 다른 차원의 진리로 향하는 출구가 되는 이유가 이러하다.

 

 

Song of Praise-Nature_oil on canvas_2012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confessor)는 자연이 성서(聖書)와 동일하게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저함없이 인정했다. 그에 의하면 자연과 성서는 그리스도가 변용 시에 빛을 발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두 개의 의복, 곧 그의 신성과 인성의 다른 이름이다. 자연과 성서는 모두 책으로서, 두 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의미다. 켈트의 신학자 스코튜스 에리우게나(Scotus Eriugina)에게도 자연과 성서는 신의 현현의 두 가지 형태였다.

성서가 문자언어를 통해 인간에게 말한다면, 자연은 기호언어를 통해 그렇게 한다. 모든 자연계의 피조물은 하나님 말씀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인식가능한 자연세계도 ‘영원한 로고스의 표현’이라는 건 신학적으로도 오류일 리 없다. 하나님에 더 다가서는 길과 자연으로 시선을 돌리는 길은 어떤 점에서 하나로 만나는 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과 감각을 통해 확인가능한 모든 사물, 특히 자연의 것들에서 하나님의 진리, 로고스의 흔적을 목격하고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운 ‘계시적 환경’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김창희가 입증해가고 있는 진실이기도 한  것이다.

 

 

Song of Praise-Nature_oil on canvas_2012

 

 

Song of Praise-Nature_oil on canvas_2012

 

 

 
 

김창희

 

1982 | 초대개인전 4회-Paris, Katia Granoff 화랑 외 | 1973, 77, 81 | 국전 특선 3회, 입선 연 10회 | 1983~92 | 현대미술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 1986~93 | 한독미술 협회전-서울, Bonn, Moscow | 2007 | 1970년대 한국 미술-예술의 전당 | 2008 | 화가의 30년 그 아름다운 변화-예술의 전당 | 1977~11 | 한국 기독교미술인 협회전-조선일보미술관

 

세종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 역임

 

현재 | 한국 기독교미술인협회 회장

E-mail | chkim45@hanmail.net

 
 

vol.20120328-김창희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