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희 요리展

 

Combination

 

Combination_100.0x60.6cm_Watercolor on paper

 

 

인사아트센터 (3층 제1특별관)

 

2011. 11. 23 (수) ▶ 2011. 11. 28 (월)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 T. 02-730-1020

 

www.insaartcenter.com

 

 

Combination_100.0x60.6cm_Watercolor on paper

 

 

요리, Combination

 

조은정 (미술평론가)

도시이든 시골이든 태어난 장소와 관계없이 고향에 대한 추상적 시각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에 합의점이 있다는 것은 ‘고향’이란 개념이 인간 존재 내부에 존재하는 집단적 무의식에서 발원지를 찾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융(Carl Gustav Jung)은 심연에 놓인 자기(self)를 집단무의식을 담은 원형의 세계라 하고 표면적인 자아(ego)는 의식과 분별의 세계로 구분함으로써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공감에 대한 이해의 통로를 열었다. 고향은 자연의 모습을 띠고 있고, 몸이 나고 마음이 자란 장소성에 대한 관념으로써 향수와 연관되어 있다. 생명 탄생의 발아(發芽) 단계에 해당함으로써 결국 고향 이미지는 신화적 원초성에 다가서는 것이다. 인간이 내부에 존재하는 자기를 충분히 돌보지 못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을 때는 자아상실감 혹은 우울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결국 의식의 표면으로 상승한 고향은 내부 깊숙한 자기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며 자기 돌봄인 것이다. 억눌려 있는 본능이나 욕망에 대해 솔직 담백해진 지금, 우리는 일상의 발견 혹은 찰나(刹那)에 주목한다. 일상성은 근대 도시의 발견에서 구체화한 개념이고 현대성의 또 다른 특성이기에, 고향이란 지점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멋진 신발을 골라내는 데, 새롭고도 남과는 다른 물건을 찾아 스타일을 살리는 데서 자기실현을 하는 현대인은 일상과 욕망의 발현점을 외부에 두는 특징이 있다. 현재 ‘요리’가 유행을 주도하는 젊은 층에 확산된 것도 결국 ‘자기표현’의 방식으로 이해된 때문이다.

 

 

Combination_53.0x41.3cm_Watercolor on paper

 

 

이금희의 요리그림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과장된 표현이 아닌 일상성의 발현이라는 점에 있다. 눈뜨면 밥상 차리고 자기 전까지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는 주부에게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창작’이 아니라 삶의 기록인 것이다. 한국의 가정에서 주부가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라 칭해지며, 어머니의 신화를 가능케 하는 것도 실은 요리 덕이다. 온식구를 한 자리에 불러모으는 어머니의 힘은 밥상에서 시작되었던 것이기에. 식감이 중요한 요리처럼, 요리를 그린 그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황홀경을 기대한다. 물질이 넘쳐나기 시작했을 때 쇼윈도우 속 그릇들이 빛나는 현장에 눈을 두었던 포토리얼리즘 혹은 하이퍼리얼리즘 회화에서 보았던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광택이 넘치고 오감을 자극하는 음식을 떠올린다. 그런데 정작 이금희의 화면은 그림으로 저절로 손을 벋게 한다거나 코를 벌름거리며 킁킁대거나 혹은 입맛을 다시게 하는 눈을 요소는 없다. 하루쯤은 부엌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꿈틀대는 현실에서 미장센의 요리는 가당치 않은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이금희가 그린 요리는 식욕이라는 인간의 본능에 위치한 욕망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현대적인 의미에서 자기표현의 과시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요리는 요리라는 관념 즉 원본 없는 이미지의 재현 그것이다. 남을 위해 차려낸 밥상이 아닌 “아, 김장해야지!” 혹은 “이번 주에는 벌써 세 번이나 김밥을 싸네.”라는 혼잣말 속에 떠오르는 음식의 이미지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생산된 표현으로서가 아닌 내부에 존재하는 관념의 요리인 것이다. 그리하여 화면 내부에서는 요리하는 시간과 물질로서의 재료 그리고 이 둘을 봉합하는 노동이 연동되고 있다. 헌데 붉은 고춧가루 양념이 화면에 번지는 깊이를 통해, 착착 썰어내어 빳빳했던 것이 소금기에 절어 흐물흐물해진 무채를 통해 가늠된 것은 시간과 물질의 변주과정이다. 에너지원으로서 노동은 가시화하지 않으며 단지 가끔 젓가락을 통해 수요자만이 드러난다. 결국 요리가 가능하게 한 주된 요소가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요리가 외부에 드러나는 순간 소외되는 노동, 여성의 주체성이 상실되는 것이다.

 

 

Combination_162.0x112.0cm_Watercolor on paper

 

 

식욕과 성욕이 버무려진 광고와 같은 세계의 부재는 외부적 시각에 거주하지 않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내부에서 발원한 이미지임을 증명한다. 페미니즘 작가이며 편집자인 바바라 크루거는 여성 사진을 이용하면서 부분만을 사용하였다. 육체 전체가 드러나는 순간 또 다른 시선에 노출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릇에 담겨 먹음직스러운 상태가 아닌, 배춧잎 사이로 헤벌어져 속이 드러난 채 국물 뚝뚝 떨어지는 김치가 전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은 바로 대상화의 시선을 거부한 장치이다. 조합(Combination)이란 언어 속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한개의 원자들 속에서 일부를 선택하여 이루는 조건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식당이나 급식과 달리 대개의 가정에서는 여성의 손에 의해 요리가 생산된다. 하지만 우리가 고향 혹은 집, 어머니를 떠올리는 따뜻한 밥상은 대상의 아이콘일뿐 물리적인 재료나 시간 그리고 어머니의 노동력에 대한 경의는 아주 희미하다. 화면에 던져진 듯 붉은 국물 질질 흘리며 철퍼덕 놓인 배춧잎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오이, 맛살, 계란지단을 안에 담고 김에 돌돌 말린 김밥은 공중에 부유하고 있다. 구체적 대상을 떠올리지만 그 김밥이라는 언어와 김밥이 상응되지 않는 것처럼 부조리하며 불안한 현실을 드러낸다. 온전한 여성의 전유물이 요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소비와 욕망의 키워드를 통해서이다. 하지만 요리가 세수하거나 이를 닦는 것처럼 생활의 일부인 경우, 그것은 고된 시간의 기억이자 봉합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간극을 의미한다. 표현이자 욕망의 대상인 먹을 것, 음식이 요리인 것은 가공되고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가 넘쳐나는 현대생활에서 그가 그린 김치, 물김치, 김밥은 재료의 봉합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음식, 요리로 존재한다. 얼마나 여러 차례 담은 김치였으며 말아댔던 김밥인지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그 요리는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푸른 겉잎마저 아까워 떼어내지 않고 담은 김치, 깻잎에 속을 돌돌 말아 흰밥위에 얹고 김으로 말아낸 김밥은 일상의 변화를 주는 일탈을 의미하겠지만 이마저도 일상이 되어버리게 하는 생활의 반복성. 그 일상을 작가는 파헤집어 드러낸다.

 

 

Combination_53.0x41.3cm_Watercolor on paper

 

 

 
 

■ 이금희 (Lee, Keum-Hee)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 2011 | 이금희요리전 (인사아트센터) | 이금희요리전 (부평아트센터) | 2010 | KPAM 대한민국미술제 (한가람미술관) | SIEAF2010 국제아트엑스포 (순천문화예술회관) | 서울국제아트엑스포 (조선일보미술관) | 2009 | 이금희요리전 (인사아트센터) | 제27회 화랑미술제 (부산-벡스코) | 일상과 일탈의경계에서 (신라 C.C갤러리초대전) | 2008 | 일상과 일탈의경계에서 (단성갤러리) | 2002 | 경인미술관

 

현재  | 한국여류수채화가협회 회장 | (사)한국수채화협회 부이사장 | (사)전업미술가협회 분과위원장 | 대한민국회화제 운영위원, 이미회, 서울미술협회회원

 

B.F.A Ewha Womans University, Majored western painting | The 10th Solo Exhibition (2011) | Korea Galleries art fair and Boot Exhibion | Experienced a judge of the art exhibition of korea | The President of Korean Watercolor Association

 

 
 

vol.20111123-이금희 요리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