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영 展

 

<Botanical Identity>

 

benesse art-naoshima_91x116.8cm_2010

 

 

갤러리 담

 

2011. 11. 1(금) ▶ 2011. 11. 13(일)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7-1 | 02-738-2745

 

www.gallerydam.com

 

 

dunkindonuts-suji_91x116.8cm_2010

 

 

갤러리 담에선 하선영 작가의 Botanical Identity 의 전시를 기획하였다. 하선영 작가는 화분에 담긴 식물들을 보면서 우리 삶의 한 켠에 존재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소원한 상태로 바라다보다가 어느 날 식물의 초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사진관 사진처럼 보이는 모방과 재현이 보여지는 데 이를 제 3자의 시각으로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선영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프랑스 아를르 국립 고등 사진학교 졸업한 후 사진과 비디오 영상 작업을 해 오던 중 회화작업으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시가 된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 15여 점이 선보일 예정이다.

 

Botanical Identity

현대인의 삶은 땅에서 점점 멀어지고 자연적인 자연에서 멀어지고 있다.

도시의 땅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본능에 의해, 자연을 갈망하고, 우리의 주변을 다양한 모습의 자연으로 채운다.

사람은 흙을 밟고, 흙을 만지고, 흙 냄새를 맡을 때 편안한 안식을 느낀다. 그래서 조그만 화분에 흙을 담고, 화초를 담아 우리 생활 곳곳에 둔다. 집 안, 식당, 커피숍, 호텔 등 다양한 건물의 실내, 혹은 실외에 배치된 화분은 장식의 목적으로, 때로는 정화와 같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우리 주변에 있다. 이렇게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화분을 사람들은 쉽게 지나친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화초를 가꾸고 정성을 들이며 키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화초는 화초를 가꾸는 사람을 많이 닮아 있다. 또한 식물은 평범하고 건조한 공간에 초록으로, 생명의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어느 여름, 당근의 둥지를 잘라내어 물에 담가 놓았더니, 연 초록의 줄기가 쑥쑥 자라났다. 당근의 줄기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일상의 행복을 느낀 경험을 한 후부터, 내 주위의 식물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자연에서 거칠지만 본능대로 자라고 있는 식물과 인위적으로 옮겨 심어진 식물은 어떤 나라를 여행할 때와 어떤 장소를 방문할 때에 가장 눈여겨보는 것이 되었고, 어느 공간에 있을 때에도 그 곳에 있는 식물을 주의 깊게 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 작업은 여러 장소를 다니면서, 흔히 간과할 수 있는 화분이지만, 다시 눈 여겨 볼 때에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또 우리 주변의 곳곳에서 쉼의 역할을 하고 있는 식물의 초상을 담은 것이다. 또한 식물의 초상은 화분을 키우고 있는 사람의, 혹은 화분이 자리하고 있는 장소의 아이덴티티와도 같다.

 

 

plant_91x116.8cm_2009

 

 

보터니컬 아이덴티티(Botanical Identity):

식물로부터 유추되는 은총의 존재론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1. 식물로부터 유추되는 은총의 존재론

하선영의 ‘식물 회화(Botanical Painting)’의 제목에는 반드시 그것을 보았던 장소가 명기되어 있다. 나오시마, 프놈펜, 던킨 도너츠-수지, 우리 집 같은 식이다. 마치 도상학(圖像學)적 일기(日記) 같기도 한 그 각각의 식물들은 그 자체만큼이나 그것이 놓였던 장소 역시 중요한 단서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선영이 그린 각각의 식물들은 먼 여행길의 한 이국적인 도시에서 만난 것이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들르는 카페에서 눈에 띤 것이기도 하다. 그 곳이 어디건, 그것들 모두는 그 안에서 실로 척박한 현대적 삶이 굴러가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어느 곳에서건 그것들은 사람들이 전례 없는 소외를 경험하며 고독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삶의 터전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는 것들이다.

그곳, 대도시에서 사람들은 바쁜 일상사에 매몰되고, 경쟁으로 내몰리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생기 없는 삶을 살아간다. 역설적이게도 복잡화하는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인간은 고작 하나의 픽셀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몰락해간다. 주체성도, 존엄성도, 자존감도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삶의 행위라고 해봐야 관료적으로 할당된 분과적 업무의 비좁은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채워진 생활의 공간은 이미 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곳은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가 ‘신의 빛’을 감지했던 자연과는 이미 멀어진 세계다. 도시를 가득 메운 ‘인간의 어둠’이라는 문명이 ‘신의 빛’에 노출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학적 노선을 이끌고 창작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하선영은 언젠가 당근의 윗부분을 잘라 물에 담궜던 때를 기억해낸다. 단지 물에 담그는 것 외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만 초록색의 줄기가 쑥쑥 자라나는 것에서 진정한 희열과 행복을 느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식물은 땅에서부터 시작해 힘차게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유일하게 중력의 힘에 반하면서 위로 상승하는 것이다. 중력을 극복하는 이 유일한 힘은 태양으로부터 나온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에너지를 받아들여 식물은 위를 향해 자라난다. 그리고 그것들-식물들-은 먹힘으로써 인간과 동물에게 자신을 자라게 했던 에너지를 공급한다. 물, 석유, 석탄 같은 에너지의 모든 원천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새로 날게 하고, 자동차를 달리게 하고 비행기를 띄우는 것도 이 에너지가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태양에너지를 얻으러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다만 받을 뿐이다.” 그것이 전적인 은총인 이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기울일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우리의 영혼을 그 은총 아래 드러내는 것뿐”이다. 사실 그렇게 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조차 그 에너지, 곧 그 은총이다.

식물은 에너지의 은총으로 위를 향해 자라가며 중력에 반한다. 이는 식물 안의 클로로필(엽록소)이라는 광합성의 요소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에너지는 자신을 해체하는 희생을 통해 식물을 자라게 하는 요소인 클로로필로 줄기와 잎사귀 안에 있고, 또 씨앗에 들어가 땅 밑 어둠 속에 머물기도 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문명의 가련한 기술과 방법들-자연의 분출 앞에서 철저한 무기력을 드러낼 뿐인-로 세워진 도시에 살면서 왜 그토록 ‘자연을 갈망하고 주변을 자연으로 채우기를 원하는지’, 또 왜 ‘흙을 밟고 만지고 냄새 맡을 때 그토록 편안한 안식을 감지하게 되는지’에 대한 답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이 그 은총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아파트의 베란다, 커피숍이나 식당, 광장, 기차역, 공항 등 어느 곳에서든 화초를 기르고, 크고 작은 화분들을 배치해 놓고는 그것들에 정성을 기울이며 키우면서 말이다. 이는 하선영이 방문했던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곳에서 예외 없이 벌어지는 풍경이다. 모든 사람들은 중력에 반하면서 위로 자라는 식물에서, 그 약한 것들의 신체를 채우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강렬한 힘의 존재를 감지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일깨우는 영감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하선영이 말하는 ‘보터니컬 아이덴티티(Botanical Identity)’, 식물의, 또는 식물로부터 유추되는 정체성의 의미인 것이다.

 

2. ‘사실(reality)’인 동시에 ‘상징(symbol)’이기도 한

하선영의 회화는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 재현적이고 모방적이다. 알다시피 모방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내내 시각예술의 기본 기능이었다. 자연을 존중하는 것이 사물의 외관에 대한 의미부여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모방적 재현의 전통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에 의해 폄하되었는데, 자연이 이상(理想)에 모자라며 여러 결함과 결핍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므로 자연을 보완하거나 수정해 이상에 가깝게 다가서도록 하는 ‘자연의 이상화’, 또는 인간의 관점에서 그렇게 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의 인간화’가 추구되었다. 자연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은 더 이상 좋은 예술의 지표가 아니었다.

이러한 이상화의 미학은 세계를 자신이 본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던 19세기 귀스타브 쿠르베에 이르러 다시 부정되기에 이른다. 쿠르베는 현실을 이상화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하는 것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사실주의를 선언했다. 아름다움보다는 사실을 원했던 것이다. 쿠르베적 사실주의는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 한정하고, 일상사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중시했다. 하지만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사물 외양의 모방을 부질없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려는 일련의 인상적 시각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거부되었다. 하지만 모방만큼이나 찰나적인 인상의 추구도 공허하긴 매한가지였음이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특히 세잔(Paul Cezanne) 같은, 보다 항구적인 진실의 탐색으로 자신의 회화를 이끌고자 했던 본질주의자에 의해 그 허세가 더욱 명백하게 불거져 나왔다.

하선영의 회화가 재현미학에 그 토대를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는 자연을 재현, 모방하는 것에 대해 어떤 미술사적 편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늘날엔 이 자체가 이미 하나의 태도요 관점이다. 작가는 주어진 그대로의 자연에 인위적인 질서를 가하는 것, 해석하고, 꾸미고, 장식하고, 재구성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가 쿠르베적 의미의 사실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추구하는 사실(reality)은 쿠르베가 추구했던 ‘시각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의 사실이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면 하선영의 식물들이 시각적 의미의 재현에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식물의 존재 자체, 특별히 그 신체성에만 한정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건강한 수직의 상향성을 보이는 줄기, 클로로필을 가득 머금은 무성한 잎사귀! 그 외의 것들로는 그것을 담고 있는 소박한 용기(用器)인 화분과 최소한의 암시적 공간이 고작이다. 이는 존재론적 의미의 사실로만 주의를 집중하려는 그의 미적 입장과 태도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그것은 사실인 동시에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구체적 장소에서 구체적인 한 시점에 마주했던 사실인 동시에, 가장 흔한 대상에 남겨진 천상(天上)의 비밀을 읽어내도록 허용하는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매우 평범하고, 흔하고, 소박하고, 보잘것없음 안에 아로새겨진 섭리라니!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가 이 아름다움을 외면해 왔던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주목하지 않는 것 또한 고통의 형벌을 받기에 충분한 죄목일 것이다. 그러나 처벌받는 대신 우리는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다.” - 시몬느 베이유

우리의 창백하고 평범한 세계의 도처에 비범한 생명이, 신의 은총을 가득 머금은 채 자신의 필연적 수동성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존재한다. 우리의 앞과 뒤와 옆에 그렇게들 존재하는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그만큼 우리는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것이 하선영의 소박하고 기교 없이 그려진 식물들의 메시지일 터이다.

 

 

 

 

■ 하선영 SunYoung HA

 

2001  프랑스 아를르 국립 고등 사진학교 졸업 | 1996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Exhibition  | 2009  Coree!, Rue de la Liberte, Arles, France | Chambre d’echo, Musee Reattu, Arles, France | 2002  Arrets Frequents 2, Negpos, Nimes, France | les ecoles d’arts en France-Mulhouse 002, Mulhouse, France | Arrets Frequents, Atelier Seruse, Marseille, France | Systemes organiques-circulation, la falaise, Paris, France | 17e festival international d’art video et multimedia, Clermont-Ferrand | 3e biennale Liege photographie et art visual, Liege, Belgium | 2001  Le diplome, galerie d’Arena, Arles, France | 7e festival bandits-mages, l’ecole des beaux-arts, Bourges, France | 17e Biennale mediteraneenne UMAN, galerie des ponchetes, Nice, France | carte blanche 2, salon bocal, Toulouse, France | 2000  A visage humain, fondation COPRIM, Paris, France | le mois de la photographie, Cherbourg, France | mille et un poisson, Agropolis museum, Montpellier, France | la curiosite, atelier des etudiants, Arles, France | carte blanche, galerie VISU, Marseille, France | 1999  Voie off, R.I.P. Arles, France

 

Award  | 2001  젊은사진가상, 아를르 국제사진 페스티발, 프랑스 | 2003  비디오아트작가상, 제 17회 국제 비디오, 멀티미디어 비엔날레, 끌레흐몽페랑, 프랑스

 

 

vol.20111101-하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