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 展

 

 

그림자놀이_90x110cm_Hotfix on Canvas_2011

 

 

인사아트센터 (제1특별관)

 

2011. 8. 10 (수) ▶ 2011. 8. 15 (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 T. 02-736-1020

 

www.insaartcenter.com

 

 

그림자놀이(1부분이미지)_90x110cm_Hotfix on Canvas_2011

 

 

보석처럼 찬란한 주체, 보석처럼 빛나는 소통을 위하여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작가에게서 자료를 건네받았다. 정작 그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뒤적이다가 명함을 발견했다. 더러 있는 일이라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명함에는 흔히 명함에 실릴 만한 신상정보와 함께 붉은 색점들이 일정한 패턴을 그리며 점점이 찍혀 있었다. 오돌토돌한 미세요철이 손끝에 감촉돼 오는 점자였다. 명함에 새겨진 것이니만큼 당연 이름이겠지만, 다른 무엇일 수도 있겠다(명함 하단에 이름이 따로 프린트돼 있다). 이름과 다른 무엇이 부닥친다. 이름이면 이름이고 다른 것이면 다른 것이지 이름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필자에게 점자는 오리무중이었다. 추상적인 패턴이었고, 추상적인 기호였고, 추상적인 의미였다. 그것은 분명 의미의 메타포일 터인데, 정작 그 의미는 읽을 수 없는 의미였고 해독불능의 문자였다. 더욱이 그 해독불능의 문자(차라리 추상적인 기호?)는 작가의 이름일 가능성이 많다.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는. 이처럼 그 의미는 정박되지가 않고, 다만 열려있는 가능성의 계열을 따라 자꾸(사실상 무한정) 미끄러진다. 다시, 명함에 새겨진 점자는 다름 아닌 작가의 이름일 개연성이 높다. 뭔가, 의미심장하게 와 닿지 않는가. 작가는 자기 정체성에 관심이 많고, 자기 정체성을 대리하고 표상하는 의미론적 지점들, 이를테면 이름과 명함과 점자(그 지점은 이외에도 사실상 무한정 호출될 수가 있다)의 의미에 관심이 많다. 이름과 의미와 정체성이란 무엇이며, 무슨 의미인가. 그 의미가 낱낱이 밝혀지면 자기 정체성도 덩달아 환해질 수가 있는가. 자기 정체성이란 그렇게 밝혀진 의미들의 집합이며 총체인가. 주지하다시피 명함은 주체가 사회에 내어준 자기 곧 사회적 주체 혹은 제도적 주체 곧 페르소나(페르소나의 어원은 가면에서 유래했다)를 대리하고 표상한다. 이처럼 작가는 아마도 자신의 이름일 점자가 새겨진 명함을 건네면서 자기작업의 의미내용을 함께 건네주고 있었다. 나, 자아, 주체, 에고란 무엇인가. 나는 그로부터 나의 의미들이 파생되고 분기되는, 되돌아오고 축적되는 장소이며 몸이다. 그래서일까. 박미영의 작업엔 유독, 아니 거의 신체 이미지가 많다. 예컨대 2006년 작품 <자화상> 시리즈를 보자. 얼굴 프로필, 손바닥과 발바닥, 눈과 입술과 코 등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이 저마다 개별적인 화면에 파편화된 채로 재현돼 있다. 그리고 그 제목을 자화상이라고 부쳤다. 이 부분 이미지들의 집합이나 총체적인 모습이 자기를 오롯이 재현해줄 수가 있다고 본 것일까. 그러나 그 믿음은 진작부터 실패가 예정된 것은 아닐까. 굳이 자기를 파편화된 부분 이이지들로 재현해놓은 것을 보면, 모르긴 해도 작가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특정 주체에게 속해져 있다기보다는, 그래서 주체의 정체성을 보장해주기보다는 다만 익명적인 이미지이며, 정박할 곳(고정된 의미의 장소)을 찾지 못해 부유하는 이미지들처럼 보인다.

 

 

그림자놀이_80x100cm_Hotfix on Canvas_2011

 

 

자크 라캉은 거울단계이론에서 유아가 최초로 자기를 인식하는 것을 오인에 의해서라고 한다. 거울에 비친 반영상 곧 뒤집혀진 이미지, 왜곡된 이미지, 파편화된 이미지, 부분 이미지, 그래서 불완전한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인데, 그는 이후 그때 각인된 자기와의 차이로 인해 불안정한 정체성을 내재화한다고 한다. 그래서 결핍(그 자체 오인의 결과인)은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조건이 된다. 여기서 거울은 타자의 메타포이다. 즉 나는 나를 볼 수도 재현할 수도 없다. 다만 타자에 의해서 보여지고 재현(엄밀하게는 재구성)될 수 있을 뿐. 나는 정작 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너로부터 발원한다. 단순히 내가 너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기보다는 너의 시선을 매개로 해서만 나를 인식할 수가 있다는 것. 결국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그리고 나를 보는 너의 시선이 가변적인 만큼(그리고 가변적인 한) 나 또한 가변적이다. 자화상은 그 정의상 나를 재현한 것이다. 나를 재현할 수 있기 위해선 내가 내 밖에 있어서 나를 대상화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자화상은 사실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재현하고 싶은 불가능한 기획이며 욕망에 머문다. 혹, 나를 사물화하고 고정된 순간의 의미로 정박(박제?)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재현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이처럼 작가의 초기 작업은 타자에게 보여진 나, 오인된 나, 익명적인 나의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이미지를 가시화하고 있고, 정박할 장소를 찾지 못해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나의 불완전한 의미를 주제화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이후 작업에는 일종의 손짓(손 포즈)이 등장하게 되고(발바닥을 소재로 한 기억 밟기 시리즈와 같은 일부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그 모티브가 다양한 형태와 유형으로 변주되고 심화되면서 현재에 연이어지고 있다. 손 모양의 다양한 연출을 통해서 신체 전체를, 주체를, 정체성을 대리 표상하게 하는 일종의 제유법이 적용되고 있는 것. 주지하다시피 신체 중 얼굴 다음으로 풍부한 표정을 내포하고 있는 부위가 손이다. 손이 표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그 표정에 주체의 의미(혹 메시지?)가 탑재돼 있다는 것이며, 주체의 의미를 대리한다는 것이며, 그 자체가 일종의 기호로서 의미 기능한다는 말이다. 작가는 이처럼 주체를 대리하는 손의 의미를 각각 <거울보기>(2009)와 <그림자놀이>(2009)를 통해서 풀어낸다. 앞서도 언급했듯 거울은 자기반영성을 위한 전형적인 매개이며, 타자를 상징한다. 나르시스가 물거울에서 자기가 아닌 타자를 발견한 신화 이후, 거울은 타자를, 타자의 시선을 경유해서만 나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론적 불안정성과 한계를 암시한다. 어쩌면 모든 거울의 원형에 해당할지도 모를 나르시스의 물거울이 시사하듯 거울을 보는 행위 곧 자기반성적인 행위는 어쩌면 자기 내면의 욕망과 무의식 즉 타자(때론 자기 자신에게 마저 낯선. 그리고 타자의 시선이 내재화된. 자기 내면에 심겨진)에 맞닥트리는 경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림자놀이는 원래 손 모양의 실루엣 형상을 통해 손이 아닌 다른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놀이이지만, 필자에게 그 놀이는 일종의 주체놀이처럼 와 닿는데, 실제로 작가는 파편화된 신체를 테마로 한 작업에서 관계놀이 내지는 가장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주체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거듭 정립되고 수정되고 재정립되는 것임을 암시하며, 그렇게 수정되는 연쇄를 따라 계속 미끄러지는 가장(어쩌면 가상?)의 놀이를 노는 것임을 암시할 것이다. 결국 그림자놀이를 주체놀이로 읽는 것은 이처럼 주체를 향한 자기반성적 시도를 관계놀이와 가장놀이로 풀어낸 진즉의 경우를 재연한 것이며, 이번에는 손의 형상을 빌려 제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놀이_90x100cm_Hotfix on Canvas_2011

 

 

그림자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손이 아니라 손이 만들어낸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다만 손을 매개로 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나 또한 나 자신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다만 타자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림자는 손과 다르다. 손의 모양이 달라지면 그림자의 형상도 바뀐다. 타자의 시선에 비친 나 역시 부분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그래서 불완전한 집합으로 재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림자놀이를 매개로 한 작가의 작업은 마치 그림자처럼 그 실체가 모호한 주체이며 가변적인 주체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근작에서 손 모양을 테마로 한 작업은 일종의 수화의 형식을 취한다. 손짓으로 하는 대화를 뜻하는 수화의 의미에서처럼 작가는 주체로부터 소통의 문제로까지 작업의 의미지평을 확장시킨다. 수화는 기호이며, 그 이면에 의미가 탑재된 기호이다. 결국 기호와 의미가 핵심이다. 그 핵심이 소통의 계기를 열어주며, 그 자체 주체의 의미에도 연동된다. 의미에는 표면적인 의미와 이면적인 의미가 있다. 비록 수화의 표면적인 의미가 어느 정도 고정돼 있을지는 모르나, 그렇게 고정된 정도는 일상 언어 혹은 정상언어에 비해 더 느슨하고 헐렁한 경우로 봐야한다. 수화를 통해선 최소한의 투명한 의미만을 전달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불투명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몸 언어(이미 그 자체 기호화된 수화는 몸 언어가 아니다)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하고, 실제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라캉은 무의식의 언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때 무의식의 언어의 일부는 그대로 몸 언어에 투자된다. 결국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기 위해선 언어의 표면적인 의미와 투명한 의미만으로는 부족하며, 어쩌면 이보다 더 결정적일지도 모를 이면의 의미와 불투명한 의미, 몸이 하는 말이며 무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수화를 테마로 한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진정한 소통의 계기를 열어놓고 있는데, 그 계기 그대로 작가의 작업의 밑바닥에 깔린 주체 문제(자기인식과 함께, 이로부터 연유한 자기 자신과의 진정한 소통 문제)와도 통한다. 기호학자와 언어학자들은 언어(수화도 언어고 이미지도 언어고 표정도 언어다) 자체로는 의미를 고정시키지 못한다고 본다. 의미가 고정되는 지점은 그 언어가 실제로 사용될 때이다. 그 언어가 실제로 발화되는 지점에서이며, 전제와 상황, 문맥과 맥락 속에서이다. 그리고 나는 매번 다른 전제와 상황에 맞닥트리고, 다른 문맥과 맥락 속에 처해진다. 그래서 언어의 의미 또한 매번 달라진다. 그 자체 실체로서보다는 의미론적 대상인 주체(주체라는 의미) 역시 예외일 수가 없다. 작가는 전사된 이미지 위에 유사 큐빅을 심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수화를 재현한다. 수화로 기호화되고 의미화 된 손은 신체 전체를 대리하고, 주체를 대리하고, 정체를 대리한다. 그렇게 나(수화를 통한 나의 의미)는 평면 위에 흡사 촘촘한 그물망처럼 짜인 유사 큐빅 입자들의 집합으로서 재현된다. 자기발광성의 입자들, 단자들, 모나드들의 집합과 더불어 나는 스스로 빛을 발한다. 그런데 그 입자들은 그 이면에 해체를 숨기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 빛을 내던 나는 뿔뿔이 흩어져 밤하늘의 유성들처럼 떠돈다. 어쩌면 주체란 파편화된 부분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잡동사니?)이며, 거울이 되돌려준 반영상(허상?)이며, 그림자처럼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는 부재이며, 실체가 없는 의미이며, 밤하늘을 떠도는 유성처럼 찬란하고 막막한 우주일지도 모른다.

 

 

화장하기_100x110cm_Hotfix on Canvas_2010

 

 

 
 

■ 박미영

 

배재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화 졸업 | 국립 창원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졸업

 

개인전  | 2011 인사아트센타 | 2010 마산ECHO | 2006 대안공간마루 | 2006 창원성산아트홀

 

부스전  | 2006 중국위해시예술전람층 | 2009 터키이슬람 | 2009 독일베를린GallySUN | 2010 성산아트홀

 

그룹전 및 단체전  | 2003~2011 국내외 그룹전 및 단체전 100여회

 

수상경력  | 2007 청년작가상-창원청년작가회 | 2009 올해의 작가상-미로회

 

현재  | 한국미협 | 경남전업미술작가회 | 미로회 | 창원청년작가회 | 그룹‘마’

 

블로그  | https://aldi5.blog.me

 

 
 

vol.20110810-박미영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