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규 展

 

[천지불인]

 

 

천지불인_57x76cm_종이에 혼합기법_20081225

 

 

관훈갤러리 1,2F

 

2011. 5. 4(수) ▶ 2011. 5. 17(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 | 0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천지불인-우울1_56x56cm_종이에 혼합기법_201010

 

 

무심한 자연과 유심한 인간

고충환 (Kho, Chung-Hwan 미술평론)

 

그동안 장명규는 주로 문명사적 비전(문명을 찾아서)이나 이상향(낙원으로 가는 길) 그리고 노장사상(천지불인)과 같은 거대담론의 주제를 심화하고 변주시켜왔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외관상 미시담론이나 개인적인 서사가 대세인 시대에 그의 그림들이 제안하는 거대담론은 오히려 가볍고 피상적인,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시대감정에 화두를 던지는 어떤 힘이 있고 울림이 있다. 그 울림에 의하면 예술은 결국 실존의 문제이며, 예술의 화두는 그대로 인간이며 인생이며 삶의 화두에 등치된다. 그리고 그 화두를 몸소 실천하는 인간은 진인(眞人), 전인(全人), 자연인(自然人)으로 실현된다. 어쩌면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이런 진인이며, 전인이며, 자연인을 실천하고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은 평면적이다. 외관상 배경화면에 모티브가 중첩되는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 여기서 배경화면은 배경으로서의 의미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후경적 깊이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상실하고 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다지 의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화면은 그저 붓 가는 대로, 마음 닿는 대로 비정형의 얼룩을 조성한 연후에 그 위에 모티브를 얹혀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고, 흡사 무중력 상태에서처럼 평면 위에 모티브가 부유하는 인상을 준다. 주로 종이그림에서처럼 붓 자국이 여실한 경우도 있고, 캔버스 그림에서처럼 아예 편평한 평면으로 처리된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수들이 모여 작가의 그림을 평면적으로 어필되게 한다.

 

 

천지불인-신목4_57x76cm_종이에 혼합기법_2008

 

 

이 평면성이라는 조건은 회화가 전통적인 재현의 방법으로부터 빠져나와 회화 자체의 논리와 화면 자체의 생리에 주목하는 과정에서 찾아진 모더니즘 회화의 발명품이다. 그것이 감각적인 현실과는 느슨하게 관계 맺어지는, 혹은 아예 구분되는 회화의 자족적인 구조를 부각시킨다. 그래서 여전히 재현의 방법을 취하고는 있지만, 이로 인해 감각적인 현실과 관계 맺어지고 있지만, 그 재현과 관계는 전통적이거나 전형적인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감각적인 현실 그대로가 화면 속으로 들어와지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로 분절된 상태로 들어와진다. 그렇게 들어와진 분절된 개체들이 화면 자체의 생리에 맞춰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것이며,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편집되고 재구조화되는 것이다. 이렇듯 감각적인 현실의 자장으로부터 세계의 조각들을 가져와 자기 식의 세계를 구축하는 식의 그림이 유독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형식실험에 강한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평면성의 조건 그대로 작가의 관념세계를 투사하고 구현하는 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장명규의 그림은 평면성이 강하고 관념성이 강하다. 그 두 조건은 서로 유기적으로 간섭되면서 감각적인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출현시킨다거나, 혹은 감각적인 현실을 다른 차원에서 보게 만든다. 이를테면 이면보기 내지는 행간읽기에로 유도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 모더니즘의 생리와 회화 자체의 생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감각적인 현실과 관념세계와의 때로는 밀착되고 더러는 느슨한 상호 관계에 대한 인식이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거대담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관념성이 강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관념은 근작에서 천지불인의 주제로서 나타난다. 천지불인, 천지 곧 자연은 어질지가 않다는 말이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어진 것을, 그리고 서양에서는 선한 것을 사람의 덕목으로 여겼다. 어진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가 그렇다면 이상향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덕목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혐의가 어른거린다. 각각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정치철학이 개별주체에게 부과해온 도덕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처럼 어진 것과 선한 것은 다만 사람의 덕목이며 윤리일 뿐, 자연의 덕목이며 윤리는 아니다. 자연은 개념이 없다. 개념은 사람의 일일 뿐. 자연은 어질지가 않다는 말은 곧 자연은 개념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

 

 

천지불인-인간_57x76cm_종이에 혼합기법_20091104

 

 

작가의 그림에서 천지불인의 주제는 이처럼 개념이 없는 자연의 본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감각적인 현실의 질서가 해체되고 재구조화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모든 결정적인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하나로 스미고 통합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요샛말로 통섭의 논리를 실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논리를 넘어선 논리가 성립되고, 형식을 넘어선 형식이 정립된다. 이를테면 그림에선 회화와 판화, 판법과 드로잉이 그 경계를 허물며 상호 삼투되면서 유기적으로 어우러진다. 실사에 바탕을 둔 모티브와 암시적인 형태, 인출된 이미지와 회화적인 드로잉이 서로 견인하면서, 포개지고 간섭되면서 화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다. 그리고 여기에 무늬목이나 새의 깃털 같은 오브제마저 가세되고, 소재로는 자연소재와 인공소재가 대비되고 어우러진다.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형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혼성의 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노자는 인간의 비극이 구분(요샛말론 지식)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이질적인 것들이 몸을 섞는 이 혼성의 장관이야말로 구분이 없는 세계, 경계가 없는 세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념이 없는 자연의 경지 그대로를 실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가의 그림에선 이처럼 자연의 본성이 오롯해진다. 단순히 자연소재를 그려서가 아니라,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차원을 표상해서가 아니라, 이 보다는 더 본질적인 문제 곧 모든 인위적인 경계가 허물어지고 인간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으로써 부각된다. 작가는 그 혼성의 장 속에 이렇듯 자연의 본성과 함께 세상사를, 인간사를 탑재해놓고 있다. 이를테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전언으로 유명한 섹스피어의 희곡 햄릿이다. 여기서 작가는 그 희곡이 삶의 본질을, 실존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것으로 본다. 삶과 죽음의 문제, 그것은 적어도 자연에겐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나, 사람의 모든 문제의식의 총체이며 자의식의 거울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장면이 다름 아닌 TV 모니터를 통해서 방영되는 것에서 작가는 TV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가 현대인의 자의식을 반영하는 또 다른 거울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거울은 TV 모니터로부터 시대적 사건 사고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빔 형태의 기둥으로 변주된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 사고를 실시간으로 전송해주는 그 미디어라는 기둥은 혹 정신의 좌표로서의 기둥(흔히 기둥은 시대정신의 표상이며 지주를 상징한다)의 현대판 버전일지도 모른다.

 

 

천지불인-지난여름2_57x76cm_종이에 혼합기법_201009

 

 

그리고 그 미디어의 빔에는 때로 알 수 없는 문자 혹은 부호의 다발이 전송되는데, 바로 컴퓨터 언어체계인 알고리듬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언어로 전환되기 직전의 부호이기에 당연히 오리무중인 이 언어체계가 꽤나 의미심장한 알레고리로 와 닿는다. 이를테면 세상은 언어로 축조돼 있다. 언어로 인해 세상은 그 표현을 얻고, 언어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 그런데 말들이 너무 많다. 현대인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잃는 딜레마에 빠진다. 언어는 그 자체 자족적인 구조와 생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에 일치하지도, 그 주체를 담보해주지도 못한다. 나아가 내가 하는 말은 결코 너에게 그대로 가 닿지가 못한다. 소통을 매개시켜주는 말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불통의 아이러니에 사로잡힌다. 이 오리무중의 부호 다발을 매개로 해서 작가는 인간사에서 소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말들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소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일깨워준다.

그리고 인간이 등장한다. 대개는 직립해있거나 다소곳한 정자세로 앉아있는 자세의 인체, 혹은 두상이나 프로필이 최소한의 가장자리 선으로만 표현된 인간이 관조적인 인상을 준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그려져 있지가 않은데, 실제로는 부재하는 얼굴이라기보다는 관조하는 얼굴이며, 자기 내면을 쳐다보고 있는 자기반성적인 정황을 암시하는 얼굴이다.

그런가하면 일종의 목인(木人) 혹은 자연인(自然人)도 보인다. 이를테면 토르소 형태의 신체 속에 나무로, 숲으로 채워져 있는 인간인데. 그 자체 문명인과 대비되는 인간형으로서 작가의 인간관 내지는 자연관을 엿보게 한다. 그는 몸속에서 뿐만 아니라 몸 바깥쪽으로까지 나뭇가지를 키워내고 꽃을 피운다. 보기에 따라서 그의 몸을 숙주 삼아 몸 바깥으로 웃자란 나뭇가지가 무슨 뿔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 자체 사유의 뿔 혹은 정신의 뿔로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이를테면 사유하지 않는 시대에, 정신이 황폐해진 시대에 내미는 어떤 시대정신의 좌표 같은 것 일수 있다. 아마도 작가는 그 뿔과 더불어 무소의 뿔처럼 이 시대를 홀로 건너가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우리에게 권유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천지불인-행성2_72x53cm_캔버스에 혼합기법_201012

 

 

 

 

■ 장 명 규 (張 明 奎, JANG MYOUNG KYU)

 

2011  천지불인2011, 관훈갤러리, 해반갤러리(인천) | 2009  하늘도 무심하네, 갤러리 문화살롱 공, 의정부 | 2008  장명규 목판화전, 구올담 갤러리, 인천 | 2006  낙원으로 가는 길/향수, 인사아트센터 | 2002  낙원으로 가는 길, 신세계갤러리, 인천 | 2001  낙원으로 가는 길, 관훈갤러리 | 1999  낙원으로 가는 길, 갤러리 사비나 | 1998  낙원으로 가는 길, 갤러리 사비나 | 1996  문명을 찾아서, 갤러리 지현 | 1994  문명을 찾아서, 서림화랑 | 1994  문명을 찾아서, 금호미술관 | 1992  문명을 찾아서, 한선갤러리 | 1991  문명을 찾아서, 모인화랑 | 1989  문명을 찾아서, 관훈갤러리 | 1986  한강미술관 | 1984  미술회관 등 | 개인전 16회 및 표상83전, 젊은 의식전, 인간시대전 등 | 단체전 130여회

 

 

 

vol.20110504-장명규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