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으로서의 선 - 그 힘展

 

 

 

 

대전이응노미술관 전관

 

 

2010. 11. 5(금) ▶ 2011. 2. 27(일)

대전광역시 서구 만년동 396 | T. 042-602-3275

주 최 | 대전이응노미술관

 

 

www.ungnolee-museum.daejeon.kr

 

 

전시작품 | 김규진, 김덕용, 김응원, 김태호, 김호득, 김환기, 문봉선, 민균홍, 박봉수, 박서보, 서세옥, 송진화, 송현숙 오수환, 오숙환, 윤명로, 오 윤, 이강소, 이종상, 이영민, 이우환, 이응노, 장우성, 전윤정, 장욱진, 최만린, 한명옥,

合作圖 | 김기승, 김영기, 조중현, 김정현, 박인경, 이남호, 이유태, 변관식, 박래현, 김기창, 이응노

 

 

 전시주제어 | 동양 : "획은 곧 화요, 화는 곧 획"  | 서양 : 선의 새로운 인식과 대두

              - 획 (劃)으로서의 선 : 일획성, 신체성, 먹(墨)의 물성/매재성, 정신성

              - 한국의 선, 미학적 정체성 (우리의 선이 일본이나 중국의 선과 구별되는 것)

              - 서양의 선과 동양의 획

 

 

김규진作_음품쌍죽_한지에수묵_77x175cm_연대미상_연세대박물관소장

 

 

정신으로서의 선- 그힘전은 개관 이후 고암 이응노 (1904-1989)를 넘어서 고암선생 당대의 미학적 과제와 난점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즉, 우리 20세기 미술사의 화두였던 '현대성'이라는 주제를 고암 외의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그 과정을 보고 알기 위해 기획되었다.

 

 

문봉선作_冬_130x180cm_한지에 먹_2008

 

 

전통미학의 원리라든가 민족미감의 표현에 대한 이들의 이해와 고뇌가 어떠했든 그것은 논리로서라기보다 사물을 바라보고 느끼는 방식을 결정하는 이들 감수성의 원형과 관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세계관과의 단절 가운데 겪은 생존과 정체성이라는 치열한 위기의 시간, 전통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단절되었다 할지라도 원형은 유전자에 새겨진 것을 의미한다.

'현대'라는 용어 자체가 새로운 세계관의 이식과정에 심화된 혼란을 의미했던 때, 이들 작가들에게 자기 유전자를 인식하는 충동으로서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서세옥作_산_95x84cm_한지에수묵_연세대박물관소장_1982

 

 

 "정신으로서의 선, 그 힘"전은 유전자로서의 원형 (原型)- 그 감수성을 '현재적' 언어로 회복할 때에동원된 수단을 선(線)으로 정의해 본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그림을 대상 (objet)으로서가 아니라 그리는 자가 더불어 교감하여 침투 (interpenetration) 하는 존재로 여겨왔으며 문인들이 붓 한 획에 모으는 정신을 중요시 했던 것은 바로 그 몸짓 (gesture)에 응집된 기운이 그림을 완성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서구 미술사가 공간인식의 역사라면 동양의 미술은 선劃이 곧 그림畵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선線은 작가 자신의 신체를 통하여 자연에 내재된 질서와 시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의지였고 동작으로 기록되는 정신이었으되 화면 (평면)이라는 20세기의 전혀 새로운 공간개념과 더불어 화해를 이루어야만 했던난제를 안고 있었다.  

주체 (그리는자)와 객체 (그림)을 분간하지 않았던 형이상의 세계는 과연 화면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객체로 인식하는 미술사  전혀 다른 (미학적) 전통과 만날 수 있을까?

 

 

송현숙作_16 brushstrokes_180x135cm_Tempera on canvas_2007

 

 

2차 대전 후 서구에 등장하는 추상표현주의와 엥포르멜의 "서체적" 표현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들의 공간인식의개념에 일어났던 변화, 즉 화면은 평면이라는 전제는 그들 전통의 부정과 더불어 온 강한 위기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을까?

'밑그림'이나 미완성으로 간주되던 그들의 '드로잉'이 작업과정 그 자체로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거나, '즉흥'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우연성, 시간성, 음악성 (운율), 속도감과 더불어 새롭게 인식된 것은 화면이 더 이상 재현의 기능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위기감과 무관하지 않다. (추상화는 이런 맥락에서 탄생되었다.)

 

 

이강소作_Emptiness_70x100cm_종이에 아크릴물감 연필_2010

 

 

20세기 서양이 자기 전통을 부인함으로써 모색한 새로운 표현들 가운데 차용한 조형언어들은 위기의 (한국)미술사가 미학원리로서의 자기 전통을'현재형'(현재적 감수성)으로 회복하고자 했던 과정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처럼 전통의 회복과 전통의 부정이라는 양 각도에서조명해보는 선 (線)의 의미는 매재나 형식의 구분 없이 20세기라는 '큰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이응노作_용_69x68cm_한지에 묵_1984

 

 

우리는 서양이라는 짐 - 그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 한국작가들이 느낀 갈등과 절규를 이해하지 않고는 오늘에 까지 이른 작가들의 행보를 바로 알 수 없을 것이다.

흔히 동양화, 서양화 또는 구상, 비구상으로 구분되었던 우리 화단의 현실은 사실 지금까지 어떤 재료로 무엇을 그리는가 하는 것이 어떤 정신으로 그리는가 하는 문제보다 앞섰던 것이 사실이었다. 20세기 한국화가에게 ‘현대’라는 말은 서양이라는 말과 동의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는 원동력은 미학원리로서의 전통을 현재적 맥락에 자기체험으로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응노외,서화조도(합작도)_수묵담채_연세대박물관소장_1948

 

 

이 전시에는 1918년 서화협회를 결성했던 김응원, 김규진의 '서화'書畵에서부터 2010년 현재 막 30대에 이른 전윤정, 이영민의 설치에 이르기까지 60점의 작품이 동원되었다. 감히 20세기를 아우르는 시간을 놓고 선정에 임했으나 작품을 구해오기 불가능 했던 작가들도 있음을 밝혀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전시가 의도했던 전통과 현재에 대한 공명(共鳴,resonance) 이다. 선 (線)은 여기에서 묵이라는 매재와 결부된 일필의 정신이기도 하지만 또 절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화면의 실재 - 우리의 현실과 상관없는 화면에 무엇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하는 절망이자 수긍이다. 이는 새로 인지된 공간의 미술사와 화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미술사 너머에 있던 선은 섬약한 모시의 올, 여자의 몸이 뿜어내는 한이자 즐거움이면서 나무의 결이나 달항아리, 사과껍질처럼 베어낸 강철의 부드러운 질감 같은 것이지 않았던가. 거미가 하염없이 뽑아내는 실처럼 알고 알지 못하면서 형체를 얻고자 하는 시간의 속성, 또는 빛의 인상이었다.

 

 

 

이종상作_초의선사도_26x41cm_화선지에수묵담채_1983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기억이다.

예전에 우리에게 글씨와 그림과 시가 하나였던 것처럼 이 기억들은 작가들의 내면에 학습되고 인화된 정신, 오늘에 연속되는 경험의 전형이다.   

형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추상화는 이미 여기 있었다. 우리는 20세기 새로운 미술의 창조에 추상과 구상의 구별이 무색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김규진의 대나무 그림 옆에 장욱진의 유화가 자리하고 최만린의 브론즈 조각 한편으로 서화조도가 있는가 하면 이응노의 글씨가 송진화의 발칙한 형상과 함께하는 이 전시는 서양화 동양화 조각과 드로잉 그리고 옛것과 오늘의 것을 구별 지어 보아왔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요구한다. 그렇다면/그것은 오랜동안 정신으로서의 선, 그 힘이 우리 현대성의 원천이었음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탓이다.

 

 

장우성作_無極 (무극)_59x64㎝_한지에 수묵_연도미상

 

 

최만린作_Owork o_32x22x29cm_브론즈_1999

 

 
 

 

 
 

vol.20101105-정신으로서의 선-그 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