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덕희 사진 展

 

< 바다, 나는 누구 인가 >

 

 

문을 연 바다_102x76cm_Archival pigment print_2006

 

 

갤러리 나우

 

2010. 8. 4(수) ▶ 2010. 8. 17(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2-13 성지빌딩 3F | 02-725-2930

 

www.gallery-now.com

 

 

오늘도 바람불고_102x76cm_Archival pigment print_2005

 

 

작가노트

갈매기 종일 울며 날고

그 위로 흩어지는 바다의 비린 내음들.

한가닥 사연도 없는 듯한 포구에

슬그머니 버린 짤막한 시간들이 모여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이 내려 앉자

보리밭을 밟고 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했다.

어두워질수록 바다는 가라앉았지만

잠들지 않았다.

어느새 보리밭가에 앉은 나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보리밭을 밟고 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했다.

바람이 때려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

보리밭 뒤에서 바람이 불고

바람후에는

나는 달 길을 걸어

그리운 것들을 만나러 가고 싶다.

먼 바다 끝만 바라보다

바다에 내려 앉은 별들을

눈에 담고 뜸벅뜸벅 돌아온다.

 

 

태풍 만나던 날_115x85cm_Archival pigment print_2006

 

 

잃어버린 시인의 바다를 찾아서

 

이경률 (사진 이론가)

 

사진에는 아주 작은 간격(hiatus)이 있다. 바로 이 간격은 인간의 어떠한 중재도 허락하지 않는 절대 순간이며 또한 이러한 순간 덕분으로 촬영자에게 그 어떤 매체도 실행할 수 없는 특별한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간격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느낌의 찰나(刹那)를 시각적인 흔적으로 드러내는 특별한 재현이 된다. 왜냐하면 이미지로 드러난 사진의 실질적인 메시지는 셔터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간격 바로 직전에 이미 생성된 촬영자의 의도에 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가 흔히 카메라로 대상을 찍을 때 “찰칵”하는 사진 행위를 단순한 복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사진 행위의 의도가 대상의 정확한 모방이나 소통을 위한 코드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행위 바로 직전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느낌이 선재(先在)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느낌을 시각적인 자국으로 드러내는 것이 사진적 행위(acte photographique)이다.

이럴 경우 응시자의 입장에서 이미지로 드러난 사진을 이해하는데 있어 다소 특별한 개종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이미지가 보여주는 상황은 더 이상 의미로 해석하는 분석 대상이 아니라 응시자 각자의 경우로 재구성하는 유추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사진은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행위 밖에서 그리고 이미지를 있게 하는 것 밖에서”(필립 뒤봐) 사진을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촬영 행위 그 자체와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있게 한 행위의 원인 즉 그 행위에 앞서 일어난 어떤 비밀스런 무엇(생성 genese)으로 촬영자 자신도 정확히 인지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나 직감 혹은 대상과의 강렬한 교감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이미지로 나타난 사진은 다른 재현 매체와는 달리 크게 두 가지 기능적인 특징을 가진다. 한편으로 비록 이차원적인 재현 매체이지만 근본적으로 개념적인 행위로서 연극적 특징을 가진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사진 이미지는 특별한 지시대상을 가지는 연극적인 지시-행위로서 사진-인덱스(photo-index)가 된다. 그래서 사진-인덱스는 연극에서 어떤 메시지가 연출자의 의도와 관객의 수용에 의해 장치되고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동자의 의도와 응시자의 수용에 의해 드러나고 읽혀진다.

또 한편으로 이와 같이 연극으로 위장된 이미지는 심리학적 측면 특히 프로이드의 무의식적 심리기능인 이전(移轉)으로 설명된다. 예를 들어 이전 혹은 전이 메커니즘에서 볼 때 우리가 의식에서 무심코 하는 실수 행위, 어린아이와 같은 유아적 행동, 미친 이의 이상한 짓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행위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무의식의 욕구로부터 전이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재현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작가 자신의 주관적 의식이 대상에 투영되어 드러나는 전이물(轉移物)을 말하는데, 엄밀히 말해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이미지로 이동한 것을 말한다. 결국 사진으로 나타난 이미지는 대부분의 경우 그 이미지를 생기게 한 최초 촬영자 자신의 어떤 원인적인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허리 굽은 바람_76x51cm_Archival pigment print_2006

 

 

여기 보이는 작가 원덕희의 사진들은 바로 이러한 지시-행위로서 연극적인 문맥을 주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사진들은 단순한 대상의 진술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전이된 침전물로서 무언가를 지시하는 일종의 연극적인 독백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황량한 바다와 모래, 사구 언덕에 춤추는 강아지풀, 멀리 공장이 보이는 음산한 바다, 덩그러니 서있는 나무 한 그루, 어두운 바다의 일몰, 방파제 빨랫줄에 걸려있는 생선, 비 내리는 포구, 하얀 포말에 떠 있는 바윗돌, 이름 모를 철새들의 힘찬 비상 등은 더 이상 시각적인 진술이 아니라 이미지로 출현한 어떤 감정의 흔적들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진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사진의 진행 과정에서 작가의 사진 행위는 셔터가 움직이기 이전에 이미 형성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나 충동 혹은 알 수 없는 내면의 욕구로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땅이 아니면 담을 수 없는 풍경들, 이곳이 아니면 다가오지 않을 바다 내음, 이 모든 것들을 내 방식대로 정리하는 기쁨 ... 그래서 암실에서 인화된 사진을 볼 때 나는 진정 행복을 느낀다. (...) 비록 가난하지만 나만의 것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행복을 서랍 속에 놔두고 불행만 느끼며 사는 이가 얼마나 많을까?”라고 자신의 노트에 적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보여주는 바다는 결코 자기만족을 통한 삶의 예찬이 아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기억의 흐린 단편들이 위장하는 현실의 피난처일 뿐이다. 바다는 작가의 고향이 아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가 삶의 굴곡과 물질의 유혹을 지나 홀연히 찾은 곳, 삶의 육중한 갑옷을 던져 버리고 영원히 지우지 못할 죽음과 생의 진실을 찾아 떠난 곳 그리고 어두운 암실에서 스스로의 만족과 희열을 발견한 곳, 바로 그곳이 바다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바다는 삶의 여정에서 침전된 일종의 감정의 잔여물로서 작가 자신이 직접 경험담을 쓰듯이 적어도 삶의 회한과 아쉬움이 투영된 삶의 잔영(殘影)이나 자화상적인 무언극이 된다. 왜냐하면 사진 메시지는 작가 고유의 내부적 경험으로 소급되어 올라가는 특별한 이미지 읽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 자신이 반-미학적인 사진가로 자처하면서 흔히 전통적인 소통 개념에서 “아름다운 사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상 작가의 사진에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특별한 사건이나 특이한 형상이 전혀 없다. 어딜 봐도 푼크툼(punctum) 하나 없는 무광의 현실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바다와 구름 그리고 아무렇게나 핀 하찮은 풀과 나무만 보여 줄 뿐이다. 이러한 밋밋한 이미지들은 사건-사고의 장면에 익숙한 의미의 눈으로 볼 때 적어도 응시자의 입장에서 사실상 해석 불가능한 수수께끼로 나타난다.

 

 

홀로 간다는 것_76x51cm_Archival pigment print_2005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백의 톤으로 은은히 드러나는 바다는 갑자기 우리로 하여금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를 달지 않듯이, 혹은 시를 읽을 때 그 시를 구성하는 단어의 조합으로만 읽지 않듯이, 우리는 사진 이미지 내면에서 발산되는 순수 그 자체에 어떠한 논리적 근거를 달지 않는다. 게다가 어딜 봐도 사람이 출현하지 않는 황량한 장면들은 이상하게도 그 누가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낯설지 않는 익숙한 장소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장면은 관객 자신의 경우로 재구성하는 연극과 같이 슬며시 응시자 각자에게 불현듯 잊혀 진 기억을 호출하는 일종의 자극-신호(stimuli-signaux)가 된다.

출현은 곧 부재의 신호이며 부재는 곧 또 다른 조짐을 잉태한다. 출현과 부재의 이미지 속에서 은밀히 발산되는 것, 그것은 응시자에게 어떤 조짐으로 나타나는 허무와 멜랑콜리 그리고 의식에 부유하는 알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망각된 모든 기억들은 우리의 의식 심층에 내재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회상은 마들렌 과자향기, 달리는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 문 열리는 종소리, 우글거리는 군중의 소음 등이 야기하는 프루스트의 무의식적 기억처럼, 불쑥 이미지가 재생하는 있음직한 현실의 인상(impression)을 호출한다.

결국 작가의 렌즈를 통해 은밀히 드러나는 것은 진술을 위한 재현이 아니라 삶의 편린에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존재의 진실 예컨대 인적 없는 거리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비닐봉지, 누군가의 죽음을 위해 땅을 파다 버려진 곡괭이,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보는 할머니의 무표정한 얼굴과 같이 출현과 부재 그리고 존재와 허무 근처에서 맴도는 삶의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이럴 경우 작가의 바다는 사진으로 전이된 신호의 순수 서정시임과 동시에 어느 음유시인의 노래와 같이 잃어버린 우리 모두의 피안(彼岸)의 장소로서 위대한 바다가 된다.

 

 

 

 

■ 원덕희 (Won, Deok Hee | 元 德 禧)

 

개인전  | 2010  바다, 나는 누구 인가, 갤러리 나우(서울) | 2009  오래된 만남. 바다로부터, 갤러리 소헌, 소헌 컨템포러리(대구) | 2009  이 바다의 그리움, 갤러리 마다가스카르(서울) | 2007  원덕희 개인전, 갤러리,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서울) | 2006  함께한 날 들의 단상, 김영섭사진화랑(서울) | 2005  라이프 스토리-바다와 풍경전, 김영섭사진화랑(서울)

 

단체전  | 2010  W.I.T.H, 갤러리 나우(서울) | 서울포토페어 2010, 코엑스(서울) |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 갤러리 타블로(서울),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일본) | 2009  상해 국제 아트페스티발, 상해(중국) | 오륙도, 내 마음의 풍경, SK VIEW(부산) | 서울포토페어 2009, 코엑스(서울) | 2008  서울포토페어 2008 Pre, 코엑스(서울) | 낯설게 보이기 전, 갤러리 와(양평) | 포항 국제 아트페스티발, 포항 문화 예술회관(포항) | 2007  서울국제사진영상기자재전, 디지탈영상전, 코엑스(서울) | 포항 국제 아트페스티발, 포항 문화 예술회관(포항) | 2006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관훈갤러리(서울) | 포항 아트페스티발, 포항 문화 예술회관(포항) | 책이 있는 풍경 전, 국립 중앙 도서관(서울) | 2005  광복60주년 기념, 한국 사진의 과거와현재, 세종 문화 회관(서울) | 포항 아트페스티발, 포항 문화 예술회관(포항) | 2004  풍경 사진 소품전, 대백 갤러리 (대구) | 젊은 사진가전-At first sight-, 동구문화체육회관, 고토 갤러리(대구) | 포항 아트페스티발, 포항 문화 예술회관(포항) | 2003  사진, 세가지 풍경전, 고토 갤러리, 환 갤러리(대구)

 

저서(출판물)  | 2006  포항 문학 - 한국문학 속의 포항

 

소장  | 국립 중앙 도서관

 

 

vol.20100804-원덕희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