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우 展

 

- 도장으로 표상된 시간의 지층 -

 

 

Condensation_165x132cm_Korean Stamp & Mixed Media_2010

 

 

인사아트센터 2층

 

 

2010. 5. 26(수) ▶ 2010. 6. 1(화)

Opening Reception : 2010. 5. 26(수) PM 6: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 02-736-1020

 

www.insaartcenter.com

 

 

Condensation_180x180cm_Korean Stamp & Mixed Media_2010

 

 

  도장으로 표상된 존재의, 시간의 지층

                                   

 

일전에 수몰지구에 가본 적이 있다. 수몰이 예정된 마을 전체가 텅 비어있었는데, 골동품 수집상들이 벌써 수차례 들른 듯 마을에는 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고, 인간의 흔적은 재빠르게 자연에 의해 지워지고 있었다. 사람이 버리고 간 문명의 흔적들, 이를테면 하이타이 봉지 같은 것이 엄습해오는 자연과 어우러져서 묘한 부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폐가에는 골무 같은 것이 용케도 남아 있었지만, 대개는 빗물로 얼룩진 낡은 사진첩과 빛바랜 흑백사진, 그리고 그런 제호의 잡지가 있었나 싶은 이름마저도 아리송한 잡지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이 흔적들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는데, 부재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아니 엄밀하게는 한때 존재했었을 존재의 흔적을 증명하는 기억의 화신 내지는 시간의 화신 같다고나 할까. 빛바랜 흑백사진이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손때 묻은 잡지들이 불현듯 물신으로서 다가왔다. 익명의 누군가가 겪었을 욕망과 상처, 삶과 혼의 한 자락이 서려있는.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재밌는 일화를 들려준다. 사람들에게 초상사진에 찍혀있는 누군가의 눈을 바늘로 찔러보라고 주문하면 열에 아홉은 주저한다고 한다. 실제와 이미지를 동일시하는 것인데, 그것은 미신도 무지도 아닌, 차라리 신비에 가깝고 마술에 가깝다. 이런 마술이 아니라면 예술은 결코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가 없다. 부재가 존재를 환기시키고, 존재가 부재에게 자신의 한 자락을 분유하는 것은 신비스럽다. 어쩌면 예술은 이런 부재를 통해서, 흔적을 통해서 존재를 주지시키고 환기시키고 증명하는 마술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 이관우는 도장에서 그 계기를 찾는다. 우연히 폐가에서 발견한 도장에 서려있는(각인되어져 있는) 누군가의 이름에, 그리고 그 이름이 환기시켜주는 존재의 초상에 불현듯 사유가 멈추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후 작가의 작업은 도장을 매개로 그 사유를 심화시키고 다변화하는 과정과 행보를 보여준다. 존재의 혼이 서려있는 도장, 물신으로서의 도장, 개인의 아이덴티티(이를테면 존재의 증명과 같은)와 시대적 패러다임(이를테면 인정과 불인정을 분배하는 권력과 같은)의 아이콘으로서의 도장이 갖는 표상성에 투신한 것이다.

도장은 존재의 증명이라고 했다. 인간의 신체에는 이렇듯 존재를 증명하는 계기들이 있다. 이를테면 지문과 홍채 같은 계기들이 그러한데, 이를 생물학적 존재증명이라고 명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생물학적 존재증명이 생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문화적이고 관습적인, 특히 제도적인 존재증명이 있는데, 도장이 그렇고 숫자가 그렇다. 도장 중에서도 개인적인 경우보다는 관료적인 체계를 대표하는 도장들이 그렇고, 특히 제도가 개인에게 부과해준 숫자는 더욱이 그렇다. 이를테면 감옥과 군대와 같이 제도적인 사회일수록 개인은 이름보다는 숫자로 호명되고, 우리 모두는 이처럼 제도에 의해 호명되는 고유의 넘버를 소지하고 있다. 주민등록증에 생물학적 존재증명인 지문과 제도적 존재증명인 고유번호가 함께 등재되는 것은 존재증명이, 특히 제도적인 존재증명이 개별주체와 제도와의 권력관계에 연유한 것임을 말해준다. 사회가 제도화될수록 개인은 이름 대신 숫자로 호명된다고 했다. 덜 제도화된 사회에선 이름마저도 자연에 가깝다. 이를테면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여우처럼 꾀바른, 독수리처럼 날쌘, 등등의 이름으로 호명된다.

결국 이름은 문명의 소산이며, 더욱이 숫자는 권력관계를 그 이면에 숨겨놓고 있다. 이처럼 도장은 그 표면에 새겨진 개인의 이름으로 인해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문명이 간여된 혐의를 말해주고, 특히 개별주체와 제도와의 관계를 말해준다. 그러고 보면 도장과 그 표면에 새겨진 나의 이름은 나를 대리하는 잉여주체며, 분신이며, 아바타의 원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일련의 사실들, 이를테면 개인의 정체성이나, 개인과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특히 개인과 제도와의 관계 등의 문제의식 그대로 작가의 도장작업이 전개해 보이는 문제의식의 지평에 연이어진다. 때로는 표면에 드러나 보이면서, 그리고 더러는 잠재적이고 암시적인 방법으로.

 

 

Condensation_150x150cm_Korean Stamp & Mixed Media_2009

 

 

작가는 도장을 오브제처럼 사용한다. 각종 인장에서부터 일상적인 막도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종다양한 형태의 도장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빼곡히 집적돼 있다. 마치 일상에서 일면식도 없는 타자들이 서로를 낯설어하면서 폭력적인 대면을 감수해야하는 이질적인 어떤 공간을 보는 것 같고, 그러면서도 종래에는 서로 어우러져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시키는 사회적 공간을 보는 것 같다. 그 자체 그대로 도장에 새겨진 이름들로 유비되는 삶의 축소판이나 메타포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업은 크게 도장 오브제 작업과 프린트 작업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도장 오브제 작업은 다시 불투명 소재 작업과 투명 소재 작업으로 구분되고, 프린트 작업은 재차 도장 찍기 작업과 탁본 떠내기 작업으로 나뉜다. 처음에 작가는 막도장들을 채집해서 소재로 사용하다가, 이후 점차 도장을 직접 새기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전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석고판에다가 원하는 각을 새겨 일종의 주형을 만들고, 수입재료인 레진을 소재로 주형 그대로를 떠내 도장을 만들고 전각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장이나 전각은 원형과 타원형, 그리고 정사각형의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게 되고, 그 형태를 단위원소(최소한의 입자 혹은 모나드) 삼아 화면에 집적시킨다. 그 과정을 보면 화면의 각진 프레임 속에 낱낱의 도장들을 세워서 집적시키는데, 그 형국이 영락없는 모심기 같고 파종하기 같다. 실제로 작가의 작업 중엔 크랙이 여실한 흙 판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도장을 심은 경우조차 있다. 화판에 도장을 심으면서 작가는 아마도 세상이라는 모판에 익명의 주체들이 저마다의 포지션을 차지한 채(심겨진 채)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의 풍경을 떠올렸을 것이다.

 

 

Condensation_130x163cm_Korean Stamp & Mixed Media_2009

 

 

도장이나 전각이 각양각색인 탓에 형식적인 면에서 평면이면서도 입체인 일종의 저부조 형식의 작업으로 범주화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 높낮이가 크고 작은 도장들이 집적되어져서 화면에 미세요철효과를 연출하고, 높낮이의 차이가 표면에 길고 짧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미세한 음영 효과마저 가능케 한다. 형식적인 면에서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뤄내는가 하면, 내용적인 면에서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나, 특히 익명의 주체들이 모여 거대한 사회 공동체를 형성시키는 꽤나 스펙터클한 비전(이를테면 군집한 군중을 떠올리게 하는)을 일궈낸다. 하나의 단위원소를 병렬시켜 전체 화면을 이루는 포맷이 하나의 단위원소로부터 파생된 세계형성의, 세계기원의 메타포를 떠올리게도 한다.

부분들이 모여 일궈내는 전체적인 형상은 때로 구릉이나 웅덩이 같은 풍경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언덕의 높낮이를 횡축으로 자른 절편 형태를 중첩시켜놓은 등고선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무슨 거대한 지문 형상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감으로 내려다본 거대도시의 정경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건 그 자체 결정적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열려진, 임시적인 경우로 보인다. 아마도 세상살이의 천변만화의 풍경과 정경을 이런 식의 열려진 형식으로 표상한 것일 것이다. 이렇듯 암시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더 뚜렷한 구체적 실체를 다룬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그릇과 같은 용기가, 부처형상과 사람형상이 그렇다. 여기서 그릇은 말할 것도 없이 존재의 그릇이며, 이로써 세상과 우주의 메타포로서 차용된 것이다. 특히 익명의 주체들, 혹은 타자들의 도장을 집적시켜 만든 초상작업에서는 주체란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는, 혹은 타자와의 상호영향사적인 관계의 소산이며 결과라는 인식이 읽혀진다.

 

 

Condensation_130x163cm_Korean Stamp & Mixed Media_2009

 

 

한편으로 작가는 투명 소재 작업에서 이렇듯 보다 구체적인 실체를 다룬다. 이를테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같은 가족 초상화를, 그리고 반 고흐의 초상화와 같은 명화 이미지를 차용한다. 전사된 이미지를 이면에 포치한 후, 그 위에 투명한 뿔도장을 빼곡하게 심었는데, 이번에는 소재가 투명한 탓에 예기치 못한, 흥미진진한 효과를 연출한다. 투명한 도장이 이미지를 굴절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화면에 낱낱의 도장을 심을 때 그 기울기에 변화를 주면, 빛이 투명한 도장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미묘한 차이를 갖는 음영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내고, 그 이면의 이미지를 굴절시켜 상대적으로 더 암시적이고 내면적인, 다양한 표정연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더욱이 기울기의 차이가 그림에서의 터치(빛의 터치)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로써 이 일련의 작업들은 불투명 소재 작업과는 사뭇 다른 감각적 지점을 건드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린트 작업은 도장 찍기와 탁본 떠내기로 구분되는데, 그 구분이 생각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도장 찍기가 도장을 찍는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형상을 찾아나가는 경우라면, 탁본은 이미 축조된 형상을 전제로 한 것인 만큼 형상에 임의적으로 접근하기가 그 만큼 어렵지 않나 싶다. 그리고 도장 찍기(도장을 찍어나가는 행위와 과정)가 탁본에 비해 주체 혹은 정체성의 표상으로서의 도장이 갖는 상징적 의미(나아가 실천적 의미)에도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탁본 역시 집적된 도장들을 전제로 한 것이란 점에서 전혀 다른 층위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두 과정이 서로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경우로, 상호내포적인 경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이관우는 도장을 소재로 하여 저부조 형식의 평면작업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프린트를 만든다. 저마다의 존재들이 겪었을 삶의 질곡이 낱낱의 도장들 속에 때로는 이름으로 각인되고, 더러는 형상으로 아로새겨진다. 그 이름 그대로, 그 형상 그대로 개체가 모여 집단을 이루는 인간관계를 표상한다. 존재의 기호(이름)가 기억을 환기시켜주고, 존재의 흔적이 해묵은 시간의 지층을 떠올려준다. 폐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손때 묻은 도장 하나로부터 갈래진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게 하고, 발굴된 이름들, 박제된 형상들, 부재하는 존재들, 화석화된 시간 앞에 서게 만든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어린 시절 이사를 가고 남겨진 집이나 폐허로 변한 집에서 발견되는 물건들 중  버려진 도장들은 나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도장은 생명력과 직결된 존재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도장으로써의 사람의 이름은 영원성을 갖으며, 또한 그 이름들의 집적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표출하여 작업 속에 투영해 보고자 도장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도장이라는 사물은 인간성을 내포하며, 도장은 사물이면서 사람을 상징하는 아주 작은 그림이다. 이전의 작업에서 내가 얘기 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은 사회적인 관계성, 이름으로 기억되는 영원성이었으며 지금의 작업은 문자 전각, 도자기 전각들을 사용하지만 사실은 도장으로 이미 이야기 했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전각으로 표현한 지문의 형상과 찍어서 하는 그릇의 형상을 통해 한사람의 정체성을 더욱 확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재료(도장)들은 역사의 스토리-그것을 제작한 나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나의 재료와 내가 주객일체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와 내가 사용하는 도장, 전각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서 우리의 전통.자연.삶의 표정들을 담아내고자 한다. 때문에 내 그림은 혼자가 아닌 삶의 역사와 자취들을 공동작업자로 참여 시켜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공존시킴으로써 작업의 축으로 삼고자 한다.

 

이관우

 

 

 

 

■ 이 관 우 (李 寬 雨 , Lee Kwan-woo)

 

1969  과천 출생 | 관동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 제 1회 개인전 (종로갤러리) | 제 2회 개인전 (한전플라자-기획초대전) | 제 3회 개인전 (관훈갤러리) | 제 4회 개인전 (현대예술관갤러리-초대전, 울산) | 제 5회 개인전 (인사아트센터) | 제 6회 개인전 (갤러리수) | 제 7회 개인전 (인사아트센터)

 

2인전  | 1994  정석도, 이관우 전 (강릉새안예사랑) | 2009  추인엽, 이관우 전 (정구찬갤러리)

 

아트페어  | 2009  청담미술제 (갤러리 고동) | KIAF (코엑스, 오스갤러리) | 2008  Salon des Artistes INDEPENDANTS (Paris, Grand Palais) | 남송국제아트페어 (성남아트센터) | 2007  강원아트페어 (치악예술관, 원주) | 2006  용인국제아트페어 (용인문화예술원, 용인) | 2005  북경아트페어 (박영덕화랑, 북경) | 2004  KCAF 한국현대미술제 (예술의 전당)

 

단체전  | 2010 경기도의 힘 (경기도미술관) | 신르네상스전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 | 굿모닝전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 | 2009  조각심포지움 (과천, 중앙공원) | 현대미술 3인전 (가가갤러리) | 물질로서의 은유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 | 서울옥션 커팅엣지 (서울옥션스페이스) | 한.일.라틴 미술전 (동덕미술관) | 새로운 시작전 (예화랑) | 해학과 풍자전 (알바로시자홀, 안양) | 서울의 새아침전 (공평아트센터) | 신년초대전 (갤러리 수) | 아름다운 사제동행전 (하나로갤러리) | 2008  개관기념전 (가가갤러리) | 국제초대작가전 (강릉미술관) 및 110여회

 

작품 소장처  | 2009  과천 중앙공원 조각설치 | 2008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 남송미술관 | 2004  울산 현대예술관

 

 

vol.20100526-이관우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