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진

 

‘사라진 아이들’ - The Ghost Slide

 

그네에 앉아 강을 바라보는 아이_80x60cm_Archival Inkjet Print_2007

 

 

갤러리 룩스

 

2010. 4. 28(수) ▶ 2010. 5. 4(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5 인덕빌딩 3F | 02-720-8488

www.gallerylux.net

 

 

기념비에 올라 앉은 아이_80x60cm_Archival Inkjet Print_2008

 

 

‘사라진 아이들’ : The Ghost Slide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소년, 소녀들이 과거와는 다르게 점차 놀이 없는 삶으로 성장해 가고 있음을 의식한다. 산업화 물결의 병리현상으로 열성(劣性)은 도태되고 우성(優性)만이 대접받는 듯, 점차 강조되어가는 우열의 경쟁은 이 사회의 냉엄한 체제를 더욱 부추기는 듯 하다.

물적 풍요만이 우리 시대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인지 탐욕을 향한 무한 경쟁의 시류에 놓여있는 유년의 환경에 연민을 느낀다.

‘사라진 아이들’은 우리 시대에 풍미(風靡)되는 물질적 탐욕(기의) 현상의 흔적으로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의 모습(기표)을 의도화한 작업이다. 사진은 아이들만의 사유지에서 발견된 정물적 오브제(놀이터)와 주체의 부재(아이들)로 인해 외롭게 남겨져 있는 놀이터를 현상화시켜 냉엄한 분위기로 표현하고자 구름 가득한 기후와 인적 없는 장소만을 탐색했다.

작업은 지금 존재하는 현재형의 피사체, 즉 낡고 오래된 놀이 시설부터 초현대적인 놀이 기구들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와 공간들이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연작에 있어 반복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지금의 유년 환경이 우리가 보내온 과거와는 다르게 어떤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가?"와 “아동 환경이 발전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향유할 수 있는 여가의 부족은 서로 역행하고 있다.’ 라는 산업화의 역리현상을 메시지로 전하고자 하는데 있다.

1957년 보건사회부에서 제정된 어린이 헌장에는 11가지 공표가 등장한다. 그 중 세 번째 공언에는 '어린이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라는 대목이 있지만 오늘날 자유 경제 원칙에 의해 유소년을 비롯한 청소년들은 원하는 만큼 공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껏 놀 수도 없는 것이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이다.

그 원인은 산업화의 불균형이 빚어놓은 탐욕적 경쟁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양상은 근대 이후 현대화 과정에서 비롯된 개발 성장주의의 파편 중 하나 일 것이다.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는 인본주의가 결여된 배금주의적 현실이 성인을 비롯해 자아의 고민 조차 시작하지 못한 유년들에게까지 주입되어가는 불안한 사회 현상의 파편들이다.

남보다 먼저 앞서가야 사후 경쟁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소위 출세 지상주의의 맥은 경제력, 지위(사회적 계층)의 우열로만 인간의 속성을 구분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이 후 인본주의의 소멸과 함께 이 사회는 더욱 개인화되고 우열화되어 갈 것이다.

인본주의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는 사상이다. 근대 철학에서는 인간다움이란 문명인으로써의 추상적인 우아함만을 상징했지만 현대에 이른 인문, 인본주의는 자기중심주의에 있지 않은 자신, 즉 인간적 공생을 상징하는 의미로 변화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인문주의 철학의 강조는 바로 이 세계가 인간성이 결여된 탐욕의 체제로 흘러가고 있음을 경계하는 목소리일 것이다.

이렇듯 시대적 산업화의 시류에 의해 점차 놀이가 비워져 가는 유년의 현실이 앞서 살아온 우리에게 미래의 문제 의식으로 작용되고 함께 고민 되었으면 한다.

 

 

소라껍질 속에 숨은 아이_80x60cm_Archival Inkjet Print_2008

 

 

구름 낀 날들의 놀이터, 유년의 놀이가 비워진 삶

                                                                                                           글 강수미 (미학, 미술비평)

 

1957년 5월 5일 처음 선포되었고, 이후 보건복지부가 내용을 개정하여 1988년 제66회 어린이날 다시 공포한 ‘대한민국 어린이헌장’ 의 마지막은, 어린이가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는 선언으로 끝난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글에서 논할 전형진의 「사라진 아이들」 연작 사진은 “놀이터에 없는 아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라는, 작가의 사소해 보이지만 의식적인 관찰에서 유래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한다. 관련성이 별로 없거나 커다란 간극이 있어 보이는 이 둘, 즉 ‘어린이헌장’ 이라는 공적 선언의 마지막 문장과 ‘놀이하는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를 찍은 작가의 사적 이미지를 억지로라도 엮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의 요즘 어린이들은 모두 나라의 앞날을 짊어지고,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한국인이자 세계인(global Korean)으로 자라야 하므로 더 이상 놀이터에서 놀 수 없다고, 쓸데없는 놀이로 금쪽같은 유년의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되므로 그 곳에서 사라졌다고 말이다. 해서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지금 여기 어린이는 예의 어린이헌장 중 다섯 번째 항목, 즉 정확히 인용하자면 “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공간을 제공받아야 한다.”는 권리의 주체이지만, 정작 그 ‘놀이와 오락’의 권리를 행사할 여력이 없다. 대신 ‘글로벌 코리언’이 목표인 지금 아이들은 예컨대 영어마을로, 사교육 시장으로 시간을 쪼개 달음질쳐, 영어와 조기 교육에 매진할 때만, ‘대한민국 어린이’로 대우받는다.

물론 이와 같은 독해는 한국식 육아와 교육에 보내는 냉소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줄뿐 이곳의 정책 당국자든 부모든 당사자인 어린이든, 어느 누구 에게도 도움 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헌장으로까지 명문화된 대한민국 ‘어린이의 유희할 권리’가 시설과 공간만 남긴 채 유명무실화된 상황의 기이함, 일종의 역설을 냉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 기이함과 역설이 다만 현상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 그리고 다음 세대의 현존을 체계화하고 구조화하는 데까지 뻗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작가의 사진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전형진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소년, 소녀들이 어떤 현실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유로 부모의 순종체로서 성장해가고 있는지에 대해 역설적인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하고자” 연작「사라진 아이들」을 제작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그 사진들이 ‘역설적인 이미지’인가? 아마도 그 말의 의미는 인간의 온기가 빠져나가 기괴해진 놀이터가 미적 피사체, 즉 아름다운 풍경사진으로 현상됐다는 뜻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사진은 현실 비판적인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작가의 의도를 배반이라도 하듯이 ‘무언(無言)의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시리즈에 포함된 20여 점의 놀이터 사진은 대부분 정면 구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프레임 또한 수평과 수직의 적절한 비율로 잡혀 있다. 원근법적 깊이 대신 정면성을 취함으로써 사진 밖의 버려진 놀이동산은 어지러운 풍경이 아니라 균형 잡힌 디자인 이미지로 변화했고, 우스꽝스런 사자모양 놀이기구는 격자형 프레임에 조화롭게 들어맞는 유기적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시각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작가는 사진을 보는 우리 감상자가 쾌적한 상태로, 대상을 정적이며 동화적인 정물처럼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의자에 누워있는 아이_80x60cm_Archival Inkjet Print_2009

 

 

사라진 아이들」 연작은 2008년부터 현재까지 작가가 서울, 경기, 심지어 제주도의 곳곳에 위치한 다양한 놀이터를 포착한 사진이다. 그 다양성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세운 소학교 운동장에 놓여 있었을 법한 깔끔하고 검소한 인상을 풍기는 흰색 미끄럼틀과 철봉에서 부터, 오늘 우리가 주상복합아파트 단지 내에서 흔히 마주치는, 형태는 중세 성곽이요 재질은 사이버네틱한 외국산 복합 놀이기구까지, 시대와 스타일과 경제력의 변화를 아우른다. 가히 ‘놀이터의 유형학적 사진’ 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사진들에는 한결같이 사람이 없다. 낭랑하게 뛰어 노는 아이들은 고사하고, 개미조차 얼씬한 흔적이 없어 보인다. 왜,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일까? 이미지에 대한 어떤 환상도 거둬내고 기술적으로 답해보자면, 놀이터 사진에 인간이 부재한 이유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인적이 없는 새벽이나 아침 시간대 만을 골라 찍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사진을 사진 찍는 이의 형식적 의도나 세부 기교에 맞춰서 보는 것만은 아니므로, 감상자의 입장에서 「사라진 아이들」의 ‘가시적 사라짐’ 혹은 ‘드러난 부재’의 원인을 발견해보도록 하자. 사진에 담긴 어떤 놀이터는 칠이 벗겨져나간 낡은 놀이기구와 배경의 황량한 풍경(뒹구는 낙엽, 쇠락해진 숲, 웃자란 잡초 따위로 가늠할 수 있는)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진을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놀이터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말하자면 ‘낡고 황량하기 때문에 이 놀이터를 찾는 이가 없는 것’ 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유추는 한계가 있는데, 만약 사정이 그와 같다면 상대적으로 세련되고 첨단의 외양을 갖추었으며 접근성도 뛰어난 아파트 놀이터를 찍은 사진에도 마찬가지로 왜 사람이, 아이들이 소거돼 있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형진의 놀이터 사진이 품은 숨은 의도, 즉 사진 찍기의 방법론을 넘어선 인간학적 의미의 개입이 있어 보인다. 낡고 황량한 놀이터는, 낡고 황량하기 때문에 거기서 노는 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시설을 이용하는 이, 다시 말해서 그 하드웨어를 생활의 차원에서 즐기고 누릴 문화 주체가 부재해온 이유로 지금과 같이 낡고 황량해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눈앞에 밝은 색깔과 멋진 구조로 빛나는 신식 놀이터 또한 현재 작가의 사진에서 보듯이 그 공간에서 놀이하는 이가 없다면, 머잖아 빛이 바랠 것이고 형태가 무너질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목적 지향적으로 물질들을 구축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적 세계를 육체와 정신으로 활성화하고, 유지시켜가는 일련의 의식적 활동 속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텅 빈 놀이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우리 현실에서 이 후자의 활동이 결여됐거나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놀이터만 남겨놓고 사라진 아이들의 소재’가 궁금했던 작가가 자신의 사진으로 전하고자 한 보다 큰 차원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타이어 위에서 뛰는 아이_80x60cm_Archival Inkjet Print_2008

 

 

그런데 이 지점에서 작가가 인적을 피하고, 구름 낀 기상상태를 골라, 디자인과 조형적 감각을 발휘해 촬영한 덕분에 사진에 부여된 고유한 분위기(미적 아우라), 바로 그 분위기 때문에 「사라진 아이들」을 두고 우리가 앞서 벌였던 비판적 논점이 일순간 ‘소음’으로 격하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분홍색, 노란색, 파랑색이 층층으로 칠해진 정글집이 그 자체로 과묵한 인간의 초상처럼 현존의 공기를 내뿜는 제주도의 한 놀이터 사진에서, 복도식 서민아파트의 수직, 수평을 배경으로 구식 미끄럼틀이 완벽한 사선의 대칭적 미를 구현하고 있는 사진에서, 우리의 마음을 더 끄는 것은 그 사진의 조형성이지 그 배후에 깔린 작가의 성찰적 메시지가 아닌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현장에서, 생활의 귀퉁이에서 그 정글집이나 미끄럼틀을 맞닥뜨렸다면, 그렇게 외지고 허름한 공간을 대면한다면, 우리는 결코 작가의 사진을 감상하듯이 그것들을 심미적으로 향유할 수 없다. 놀이기구의 형광 페인트칠은 늙은 여인의 피부 위에 덮인 그것처럼 들떠 보일 것이고, 구조와 재질을 두고서는 안전과 위생 문제를 따질 것이며, 무엇보다 그 방치된 것들이 풍기는 몰락의 정서에 불편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역설이 아닌가? 어린이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마련한 놀이터가 정작 ‘집단 광기’에 버금가는 조기 교육 열풍과 무한 경쟁 구도의 악무한(惡無限) 속에 빠진 아이들의 알리바이(부재 증명)라는 역설에 더해, 그 역설을 메시지화하고자 문제의 놀이터에 카메라를 들이댄 작가의 사진이 정작 동시대 유년기 삶의 부재를 미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역설! 그것 말이다.

역설적이지만 전형진의 놀이터 사진이 ‘조형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공간에 아이들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기계장치를 이용한 조형의 차원에서 자칫하면 ‘얼룩’으로 현상될 수도 있는,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가 어려운 타인의 존재를 회피했기 때문에 얻어진 ‘탈 인간적’(여기서 ‘인간적/탈 인간적’을 인격, 인권과 같은 휴머니즘의 언어로 이해하지 않아야 하는데) 아름다움이다. 흥미롭게도 작가 자신 또한 이 점을 인지하고 작업에 임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낡고 오래된 놀이 시설, 초현대적 놀이 기구들”이 렌즈를 통과하면서 “발견된 정물적 형태의 오브제로 구성”되고, 그 결과 자신의 사진은 “냉담한 이미지의 공간”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음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변형과 변질의 과정은 어찌 보면 사진의 존재론적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요컨대 사진은 시공간의 운동 속에서 특정한 한 순간만을 ‘포착’하므로, 그 운동이 어떤 사건이고,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삶에 어떤 작용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지와 상관없이, ‘찰칵’하는 셔터 스피드 속에서 모든 것을 정물로, 오브제로 발견(발명이 아니라)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바로 사진의 이 속성 때문에, 「두 개의 부적절한 서술체계 속의 바워리가」라는, 45점의 사진과 텍스트가 결합된 작품으로 뉴욕 맨해튼의 ‘바워리 거리’(19세기부터 ‘알코올 중독자의 거리’로 기록된)를 조명한 마사 로즐러( Martha Rosler)가 다음과 같이 다큐멘터리 사진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보자.

 

 

폐교에 놀러 온 아이_80x60cm_Archival Inkjet Print_2008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그 동기에 따라 두 가지의 확립된 패러다임이 있음 (중략) [두 번째 패러다임은] 전통적인 미적, 역사적 관점으로는 그 역역이 쉽게 확정되지 않지만, 이미지의 미적 정밀성이나 미적 형태에 의한 유기적 즐거움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 (중략) 이 두 번째 동기는, 사진이 찍혀질 때의 뚜렷한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역사적 사실과의 연계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비역사적이다. 이런 감상법은 정치적 의미와 형태적 의미의 변증법적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론 : 그 속에서, 그 주변에서, 그리고 그 후에」)

 

물론 여기 놀이터 사진이 로즐러가 말하는 두 번째 다큐멘터리 사진의 동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제까지 살폈듯이, 작가는 한국 사회의 어린이 양육에서 발견하는 기이한 역설과 자신의 놀이터 사진을 꽤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연계 상태에 두려 노력한다. 그러나 난점은 정치적으로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작가의 목소리와 사진의 표면에서 배어나오는 시각적 쾌, 이 양자의 거리가 다소 멀게 느껴진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사라진 아이들」에도 로즐러가 그런 것처럼, 텍스트를 부여하는 것이 해법일까? 어쩌면 그것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경우 대체로 감상자는 관에 입각해 사진을 보려 하므로, 전형진 사진에서 놀이터의 정면이 주는 낯섦의 경험, 격자 프레임 속 직선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기계적 미학을 놓칠 염려가 있다. 그것들 또한 미적으로만 관조될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미약하게 나마 한국사회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와 경직된 내면을 읽는 데 기여하는 요소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고백컨대, 이 글을 쓰는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난 사진가가 아니고, 내게 작가처럼 이미지적 감수성과 지각으로 세계를 사고하는 교육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감수성과 지각은 개념적 언어와 논리적 학습을 벗어난 곳에서 형성되며, 그렇게 형성된 감각과 정신이 텍스트와 이미지의 이분법적 질서를 넘어선 질서를 찾아낸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한 장의 사진으로도 미적 경험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일궈낼 수 있는 방법론은 원천적으로 유년기부터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유년의 놀이 가운데 형성된 “마법적 경험이 과학이 된다.”고 썼다. 자신의 신체로 물질 세계를 모방하고, 보잘 것 없는 사물들 속에서 유희의 즐거움을 생산하는 가운데, 아이는 세계를 탈 마법화할 힘을 습득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이제 다시 지금 현실의 우리에게 떨어진 과제는 이것이다. 어떻게 놀이하는 아이들로 가득한 놀이터를 만들 것인가?

 

 

 
 

■ 전 형 진 (全亨珍 Jeon, Hyung-Jin)

1974  강원 출생 | 2007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 전공

전시-  2010. 4. 28~5. 4  갤러리룩스, 서울 | 2007  Turn On Award, 노암갤러리, 서울 | 2008  Post Photo, 토포하우스, 서울 | 2009  아시아프 아시아 대학생 청년작가 미술축제, 구 기무사, 서울 | 2009  Art & Design Festival, 홍익대 현대미술관, 서울 | 2009  Post Photo, 토포하우스, 홍익대 현대미술관, 서울

수상-  2009  아시아프 아시아 대학생 청년작가 미술축제, 문화관광부/조선일보 올해의 작품 (ASYAAF PRIZE )

수록-  2009  D-PLUS Magazine Vol.4, ‘디플러스의 눈’, 한국디자인문화재단

 
 

vol.20100428-전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