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젊은 김종영을 만나다

 

 

모자상을 위한 스케치_종이에 펜_수채_33x17cm_연도미상

 

 

김종영미술관 제2, 3, 4전시장

 

2010. 4. 9(금) ▶ 2010. 6. 17(목)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453-2 | T.02-3217-6484

www.kimchongyung.com

 

 

부인상(Wife)_대리석_16x20x24cm_1950년대

 

 

본 전시는 우성 김종영의 초기 조각 작풍이 지닌 미술사적 의미를 재조명할 계기로서 기획되었다. 식민지배하 일본이 서구로부터 수용하고 형성했던 근대미술에 의해 조성된 모호한 사실주의(혹은 단순히 자연주의)나 관학적인 형태를 배운 세대로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최초의 현대조각가로서 의미를 재평가하자는 것이다. 김복진,  김경승, 민복진, 윤효중, 윤승욱 등의 초창기 자연주의에 대비되는 김종영의 구상조각은 일본미술의, 특히 동경제국미술학교의 관학파적인 교육을 탈피하여 스스로 서구의 현대조각의 흐름과 경향을 파악하고 수용한 김종영 개인의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노력이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1936년 일본 유학전까지 김종영은 <조모상>이나 <소녀상> 등의 작품을 만들었으며, 일본 동경미술학교 재학당시에도 몇몇의 구상조각을 제작했었다. 여기까지 그의 조각은 여전히 전통적인 구상에 머물렀다. 그러나 유학시절 당시 그는 관학적인 작풍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고, 화집이나 도판을 통해 서구의 현대적인 조각들을 접했다. 김종영은 스스로 새로운 조형세계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구상조각은 한스 아르프(Hans Arp)나 콘스탄틴 브랑쿠시(Konstantin Brancusi) 그리고 헨리 무어(Henry Moor)를 조우함으로서 더욱 현대적인 성향을 띠어갔다. 그의 독창적인 구상조각은 1940년대 말부터 점차 가시화되었고, 50년대 초부터 완벽한 현대성을 이룩하였다. 1953년 런던 테이트 갤러리가 주최한 국제공모전에 출품했던 여성나신상을 비롯해서 그의 구상조각은 헨리 무어나 아르프 혹은 마이욜 등이 가진 모든 장점을 내포하면서도 물질의 본성을 극대화하는 조형예술의 현대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남아있는 김종영의 구상조각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하여 그가 이룩했던 현대적 구상성을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다. 김종영의 구상조각이 현재까지 그를 대표하는 추상조각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을 교정하고자 하는 의도로 본 전시는 기획되었다.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알려진 김종영을 다른 관점에서 평가할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현제명선생상_브론즈_80x74x35cm_1960

 

 

김종영의 구상조각에 담긴 조형의식

    

우성 김종영(1915-1982)의 ‘남다름’은 누차 강조되어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1950년대 초반에 일찍이 추상조각을 시도한 ‘최초의 모더니스트’라는 점은 ‘남다름’의 중요한 근거로 간주되고 있다. 김종영이 남보다 먼저 추상조각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최초’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내적 필연성’의 여부일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을 논의할 때, 작가들이 스스로 내적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서양의 추상미술을 형식적으로 모방했다는 비판이 종종 제기되었다. 김종영의 미술사적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즉, 일제강점기에 동경미술학교를 다니면서 당시 일본 관학파의 선도주자인 아사쿠라 후미오와 다테하다 타이무 같은 조각가들에게서 교육을 받았던 김종영이 어떻게 관학파적인 사실주의 인체조각에서 벗어나 추상조각으로 이행해 갔는지, 그 과정에서 단순히 서양의 추상조각을 추종한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문제를 짚어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사실적인 조각을 포기하고 추상적인 조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내적 필연성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김종영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국 현대조각의 형성과 전개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다. 이에 대한 답은 김종영이 초기의 사실적인 경향의 작품에서 구상적인 작품으로 변화해간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인두상_돌_14x25x35cm_1970

 

 

사실주의적 경향으로부터 전회(轉回)

현재는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조각가가 많지만, 우리나라에서 조각이 미술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김복진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다. 김종영은 1936년 4월에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1930년대에는 동경에서 공부한 미술가들이 적지 않았지만 조각 전공자는 여전히 드물었다. 김종영의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선배로는 김두일과 문석오가 있었지만 평양출신인 이들은 해방과 더불어 기억에서 사라졌고, 윤승욱과 김경승이 김종영과 함께 남한에서 활동했다. 후배로는 조규봉, 윤효중, 박승구가 있었으나, 이 중 조규봉과 박승구 역시 해방 이후 월북하고 말았다. 게다가 윤승욱마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되면서 한국의 조각계는 김경승, 김종영, 윤효중이 이끌어가는 상황이 되었다. 이들은 광복 이후 설립된 미술대학에서 후배를 양성하면서 조각이라는 미술장르를 이끌어가게 되는데, 조형의식에서 이들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김경승은 동경미술학교에서 배운 조형언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작품세계를 펼쳐 나간 반면, 윤효중은 1950년대에 서구의 현대조각을 접한 이후 다양한 양식을 시도했다. 그러나 김종영은 이 둘 모두와 다른 길을 갔다.

광복 이전에 김종영이 제작한 조각 작품으로는 3점이 알려져 있다. 1936년에 제작한 <조모상>과 <소녀상>은 대상을 파악하는 능력과 모델링 솜씨를 짐작케 한다. 입학 당시에 이 정도의 기량을 발휘했다면, 김종영은 이미 휘문고보 시절부터 소조기법의 조각 공부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당시에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본인과 똑같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광복 이전의 조각 작품이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김종영의 두 작품은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하다. 나머지 한 작품은 1941년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인 <나체>로, 이는 동경미술학교의 조각교육을 충실히 반영한 관학파적인 사실주의 작품이다. 현재는 사진으로만 남아 있어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여성의 인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되 서양식 미감의 인체비례를 지닌 이상화된 여성 누드상으로서 근대기 한국조각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김종영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약 2년간 연구과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기간에 어떤 작품을 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진 바가 없다.

 한국미술계에서 김종영이라는 조각가를 주목하게 된 것은 1950년대에 들어와서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듯 서 있는 여성누드상인 <裸像>을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제작을 위한 세계적인 공모전에 출품하면서부터라고 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이름 없이 죽어간 정치수들을 기리는 뜻에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려는 계획을 했고, 런던 현대미술연구소 주관 하에 국제적인 조각공모전을 열었다. 1952년 1월에 공고하여 1년 이상 준비기간을 주었는데, 부상으로 상당한 상금이 걸려 있었기 때문인지 57개국에서 무려 3,500여 명이 응모했다. 실무를 담당한 런던 테이트갤러리 측은 이 모든 작품을 모아서 심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각 나라마다 자체 심사를 거쳐 대표작품을 선정해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런던에 보내진 작품은 총 146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경승, 김종영, 윤효중, 김세중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중에서 김종영의 작품, <裸像>이 한국의 대표작으로 선정되었다. 테이트갤러리에서는 146점 중에서 80점의 입상작(accepted entry)을 선정하여 각각 25파운드의 상금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장려상, 우수상, 최우수상을 단계적으로 가려낸 결과 그랑프리를 차지한 레그 버틀러는 무려 4,524파운드의 상금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당시에 발간된 도록과 관련 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록에는 김종영의 이름도 적혀 있는데, 상금액수가 표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80명의 입상자에는 들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종영의 수상 여부가 아니다. <나상>이라는 작품 자체, 그리고 이 국제공모전을 계기로 김종영의 미술세계가 변화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나상>은 고개를 왼쪽으로 갸우뚱하게 기울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여성누드상이다. 전체적으로 인물의 형상이 단순화되고 덩어리의 표현이 강조된 점으로 볼 때, 그가 동경미술학교에서 배운 관학파적인 사실주의와 미감에서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나상>에 대해 김종영은 “내가 여인의 裸像을 取材한 것은 표현을 위한 手段인 것뿐이다. 다행히 내 정신의 기억이 살아 있다면 이것을 정치수를 위해서 모조리 제공하고 싶은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니까 김종영은 이미 1950년대 초반부터 표면적인 소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소재를 단지 정신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생각에 잠긴 듯한 자세의 인물상을 반복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공모전은 그의 미술세계에서 매우 귀중한 전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각상_나무_12x15x25cm_1971

 

 

본질의 탐색과 단순성에 대한 지향

1950년대는 한국 현대조각의 모색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종영이 위치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술가들은 유학이나 여행, 미술도서 등을 통해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서구의 현대조각을 접하면서 말 그대로 ‘새로운 조각’을 모색해 나갔다. 당시 김종영은 이미 대학 교수였고,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원로’ 작가였다. 나이는 아직 40대였지만 선배보다는 후배와 제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실적으로는 ‘원로’ 작가였지만, 그는 기존의 작품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고 다양한 조각을 모색하는 데 앞장섰다. 1950년대에는 환원적인 추상은 물론 비구상적인 추상, 더 나아가 용접 같은 완전히 새로운 기법까지 시도했다. 이러한 진취적인 태도는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한국현대미술에서 조각이 회화에 비해 빠르게 추상화(抽象化)로 진입할 수 있었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각가로서의 김종영에 대한 평가는 진취적인 태도보다는 그의 조형 태도에 대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950년대에는 <전설>과 같은 추상 용접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그는 용접조각을 지속하지 않았다. 용접 기법의 특성, 즉 불꽃이나 소음의 강렬함, 그리고 즉흥성이 그의 성격이나 미감에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운 기법을 시도해서 제자들에게는 영향을 미쳤지만, 그는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기법을 포기하고 점차 자신의 철학이나 미의식에 부합하는 표현기법과 양식을 추구해 나갔다. 그는 나무나 돌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조금씩 제거하면서 신중하게 작품을 완성해가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덩어리의 느낌을 강조했다. 그는 이를 ‘괴(塊)’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는 자연대상의 사실적인 세부를 제거하고 덩어리감을 강조하는 조형의식으로, 1953년의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의 안(案)으로 제출한 <나상>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현대조각사에서 김종영이라는 작가와 <나상>이라는 작품에 미술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김종영의 덩어리에 대한 관심은 <나상>과 같은 구상적인 작품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차 추상적인 작품으로 이동해 가면서 본격화된다. 1950년대에는 구성주의적인 추상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그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순차적이고 논리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950년대의 작품들 중에서 인체를 단순화시키는 과정의 조각상과 스케치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1959년 8회 국전에 출품했던 <여인입상>, 그리고 장우성과의 <二人展>에 출품했던 <청년>이라는 제목의 두상과 <여인입상>은 해방 이전에 제작한 두상이나 여성누드상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1950년대의 인물상들은 실제적인 인체비례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세부 표현도 생략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작가가 평생 동안 조형원리로 삼았던 요소가 이미 1950년대에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에 제작한 <부인상>에서 느껴지는 단아함과 간결함은 1970년대 추상작품의 특징을 선취하고 있다.

 김종영의 조형세계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사물의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한 간결한 표현양식은 그가 1950년대부터 의식하고 있었다. 1955년에 '서울신문'에 기고한 <조형예술의 변모-조각의 공간미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김종영은 “자연의 모방성에서 벗어난 표현,” 그리고 “세부를 버리고... 선과 면의 대범한 균형, 명확한 형태 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미 지적된 바대로, 이러한 조형의식은 서양의 브랑쿠시, 아르프, 헨리 무어의 조형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이 서양조각가들 역시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그로부터 가장 본질적인 요소를 끄집어내는 조형원리 하에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이것이 현대조각의 중요한 흐름으로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다시금 김종영의 조각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표현양식의 현대성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태도와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리고 추상작품에 대한 작가의 내적 필연성의 여부 문제다. 대상의 본질적인 요소를 드러내기 위해서 군더더기를 제거한 김종영의 추상작품은 외관상으로 앞서 언급한 서양 현대조각가들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실제로도 김종영은 그들의 조각작품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종영이 그들을 단순히 양식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나는 복잡하고 정교한 기법을 싫어한다. 그 이유는 나의 예술 활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표현과 기법은 단순하기를 바란다.”라는 말은 그의 미술세계와 예술의 지향점을 함축하고 있다. 자연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나 “선과 면의 대범한 균형, 명확한 형태 파악”에 치중했고, 자연을 표현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자연의 외형이 아니라 “자연현상에서 구조의 원리와 공간의 미”를 조각에 표현하고자 했다. 즉 그는 자연(인체, 식물, 산)을 대상으로 삼되 그 형태가 아니라 구조의 원리를 발견하려고 했으며, 자연(사물)의 순수성을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선비적 정신성의 계승

김종영이 일생동안 추구한 조형의식을 살펴보면, 양식적으로 구상이냐 추상이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핵심은 작가 자신의 지향점이다. 예를 들어, 1971년 목조작품 <자각상>에는 작가 얼굴의 조형적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누가 보더라도 이는 김종영의 얼굴이다. 그는 나무라는 재료의 특성, 즉 나뭇결을 효과적으로 살려 작가 자신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포착했다. 이러한 작품은 양식으로 분류하자면 구상이지만, 이 시기에 김종영은 추상조각을 주로 제작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양식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인물이었음을 의미한다. 겸재 정선과 같은 조선시대 사대부 화가들이 사생과 사의를 넘나들며 사생적 형상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듯이, 김종영 역시 작품의 표현양식 자체가 주된 관심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사실성 보다는 주관적 사의성, 정신성을 강조했고, 담백하고 강직한 미감을 구현했다. 김종영이 작품의 진정한 관중을 “자기 자신”으로 보았던 것도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던 옛 선비들의 자의식과 일치한다. 이와 같은 의식은 이미 1950년대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이번 구상조각 작품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이순(미술사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부교수)

 
 

 

 
 

vol.20100409-봄날... 젊은 김종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