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노 서거20주기 특별展

 

- Non-Painting -

 

이응노_문자추상,313-263,태피스트리

 

 

대전이응노미술관

 

2009. 11. 26(목) ▶ 2010. 3. 31(수)

대전시 서구 만년동 396번지 | 042-602-3270

 

ungnolee-museum.daejeon.kr

 

 

이응노_문자추상,269-316,태피스트리

 

 

상형(常形)을 넘어 상리(常理)의 세계로

 

이응노미술관 학예연구사 공광식

고암 이응노 서거 20주기 특별展은 渡佛(1958년)이후 파리에 정착하여 새롭게 정립된 고암의 예술관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고암은 1958년 渡佛을 감행하고 1989년 서거에 이르기까지 30년간에 걸친 파리시기를 지내게 된다. 고암의 파리시기는 조형적 변모에 따라, 대략 세 번 정도의 변화곡선을 그려 볼 수 있다. 첫 번째 파리시기는 渡佛 전후에 나타나는 과도기적 시기로 보이고, 두 번째 파리시기는 스스로 자신의 조형세계를 확고하게 정립하여 보편적 미감을 성취함으로써 세계미술의 관심을 모으던 시기이며, 세 번째 파리시기는 새로운 군상시대가 예견되는 시기로써 대략 하여 언급할 수 있다.

Non-Painting전은  두 번째 고암의 파리시기를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渡佛직후 동양적 감수성을 간직한 한국의 작가 고암의 출발은 몇 년간의 과도기적인 작업 기간을 보내고, 비로소 한 지역적 작가관을 극복하고 세계인을 향한 보편적 미감을 찾아내어 스스로의 조형세계를 확고히 구축한 기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가 주로 70년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기간에 해당하며, 서구적이고 강렬한 시각적 형식미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다. 이제 동·서의 만남에서 세계로 확장되는 고암의 미의식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환되는 조형세계를 이끌어내고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장르적 개념은 일찌감치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규정되는 회화적 개념을 벗어나 이미 조형적 자유를 성취하고 있다.

 

 

이응노_문자추상,26-26,마에먹,1976년

 

 

渡佛이후 몇 년간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 고암의 작업은 꼴라주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로 이어지고 생성된다. 물감이 아닌 버려진 잡지책으로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고암에게 필연적인 작업방식의 전환은 또 다른 畵界를 여는 맥락으로 이어지고 어느덧 고암은 화단에서 개척자로서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60~70년대는 세계적으로 미술계가 추상화의 경향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수용하던 분위기였다. 고암의 작업 역시 구상에서 추상의 흐름으로 변모하고 있었지만 그의 경우, 극히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작업환경 가운데 새로운 장르를 형성해 낸, 즉 형식을 통한 내용의 변화였던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고암 이응노의 작품세계는 渡佛이전과 渡佛이후 시기를 획으로 크게 변모되어 드러나고 있으며, 그것이 전통화법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구상작업에서 渡佛이후 추상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적 추이 속에 중요하게 지적될 조형적 특징임은 확실하다. 종이나 천을 이용한 꼴라주, 그리고 초기에 문자적 흔적을 보이며 점차로 나타나는 추상화작업은 67년도의 한국방문, 그리고 다시 파리로 귀환하는 69년 까지 계속 이어진다. 그 뒤 70년대의 작업은 보다 확고해지는데, 파리의 초기시대에서 보이던 꼴라주와 문자추상시대에 보이고 있었던 동양적 감성의 흔적들이 서구적인 시각적 형식미 속에 녹아들어, 정련된 세련미와 강렬한 형식미 그리고 평면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정형화된 이미지들 가운데 더 이상 문자로 읽혀질 수 없는 장식성을 띠고 표현된다는 점이다. 이 시기야말로 고암에게는 파리시절의 최 정점에 달한 시기이며 고암 이응노를 전 세계가 주목하게 한 시기로써 언급해도 과언은 아니라 생각된다. 작가로서 식을 줄 몰랐던 고암의 실험정신은 동양도 서양도 아닌 보편적 미의식에 다다르게 했으며 가장 동양적인 내용조차 가장 서양적인 화법으로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 것이다. 가장 동양적인 작품은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감성으로 평가될 수 없다. 가장 극단에 서 있는 미감은 신비주의로 비추어질지는 모르겠으나 보편적 감성으로 호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점이 고암 이응노가 한 지역의 작가적 위치를 넘어 국제적 작가로써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응노_문자추상,71-69,천위에채색(조각보),1975년

 

 

전시구성은  1958년 渡佛이후 동양적 美感에서 출발하여 서구적 형식미의 절정에 올랐던 대표적 작품들이 주로 선보이고 있다. 조형적 특징은 정형화된 평면 구성이 돋보이고, 형태적 완결미에 더해지는 심미적 장식성은 관람자들에게 시각적 강렬함을 선사해 주며, 프랑스 고블랭 타피스트리 국립제작소에서 제작되어진 문자추상 2점은 고암 이응노의 국제적인 명성과 함께 동·서문화를 통한다름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60년대 초기 꼴라주와 문자추상 작업들에서 일견되듯이 동양적 미감에 기초하는 서구적 조형성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다채로운 시도 속에서도 보편적 원리를 향하는 고암의 힘이 느껴진다. 종이를 통한 꼴라주, 먹선 으로 일필휘지하고 있는 문자추상, 추상적 화면 분할 등에서 고암은 상형(常形)을 넘어 상리(常理)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응노_문자추상,110-175,한지에꼴라쥬,1981년

 

 

고암의 작업세계는 언제나 진행 중이다. 동양의 작가로서 머물지 않았듯이 하나의 화법 안에 갇힐 수 없었듯이 자신의 확고한 예술세계를 어느 곳에도 두지 않고 고암은 다시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길을 나선다. 고암은 군상시대를 예견케 하는 사람의 형상들이 작품들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한다.

동양적 미감이나 서구적 미감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구체적인 장르와 재료적 형식의 경계도 고려치 않는 ,가장 회화적이면서도 회화적 문법을 파괴하며 생성되고 있는 고암의 예술정신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 보편적 미감을 확립하고 있었던 시기의 작품들을 통해 고암이 걸었을 세계적, 보편적 예술의 길에 함께 내딛어 보길 바라며......

 

 

이응노_문자추상,148-127,천위에채색,1975년

 

 

이응노_문자추상,190-200,천위에채색,1973년

 

 

이응노_문자추상,184-198,천위에채색,1971년

 

 

이응노_문자추상,206-134,한지에꼴라쥬,1981년

 
 

 

 

 
 

vol. 20091126-고암 이응노 서거20주기 특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