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회  신영진 작품展

 

그리움001_72.7x60.6cm_oil on canvas_2009

 

 

록갤러리

 

2009. 10. 21(수) ▶ 2009. 10. 27(화)

서울 종로구 인사동11 록갤러리 | 02-738-2398

 

 

 

백목단001_45.5x33.4cm_oil on canvas_2009

 

 

시각적 한계를 이탈한 지각으로의 전개

- 작가 신영진 근작에 대한 소론

 

글|홍경한(미술평론가,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1. 필자의 경우 많은 작품들, 예를 들어 미디어 영상 설치라든가 개념미술 등을 비롯해 각종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작품들을 수 없이 접한다. 그러나 그 목소리 큰 작품들이 반드시 좋다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잠시 충격은 줄 수 있으나 시각적 인지성이 높은 구상작품들에 비해 잔잔한 감동을 느끼기엔 비교적 까탈스럽고, 보편적 접근을 쉽게 허용치 않아 부담스러움마저 갖게 한다. 그런 류의 작품들 중 많은 수가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확률이 높으며 소모적(消耗的)인 성격을 갖기 십상이라는 점, 현대미술이라는 미명(美名)아래 난해(難解)함만을 가중(加重)시키는 문제도 안고 있어 단순한 호불호에 대한 명확함은 명징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것이 비록 호불호에 대한 뚜렷함을 상정하지 못할지라도 급변하는 동시대미술에 있어 구상미술이 지닌 느릿한 여운, 진부함과 동의어로 반복되고 있는 구상미술의 현주소를 목도하는 현실적 난감함에 비할 바는 아니다. 외피(外皮)에 머무는 시각, 재현성에 대한 탐닉이 과연 어떤 식으로 현대미술의 발전과 보폭을 같이 할 수 있는지, 나아가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인 이유에서다.

 

 

백목단002_45.5x33.4cm_oil on canvas_2009

 

 

단언컨대 작금의 많은 작가들은 구상회화에 흥미(興味)와 열정(熱情)을 쏟지 않는다. 20세기 초 서구 미술이 도입된 이후 80년대까지만 해도 구상미술은 한국 화단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미술계를 회전시키는 거대한 축이었다. 물론 현재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요, 발군의 재능으로 동시대 화단을 쥐락펴락하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음 또한 아니다. 허나 이는 엄밀히 말해 대중적 취향과 기호가 고려된(짜 맞춘) 시장성에 충실한 작품을 생산해내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에서 예전과는 거리감을 둔다. 어떤 기법 아니면 소재를 찾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割愛)하며 과거 수십 년 전에 유행했던 장르를 우려먹거나 재탕, 삼탕 되새김질하곤 한다. 현대미술의 가장 큰 장점이랄 수 있는 실험성과 전위성은 고사하고 창작의 가치를 담보할 수 없는 획일성을 띤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적잖이 부유한다.

더구나 다매체 실현구조가 만연한 오늘날에도 구상미술은 대체로 습속성을 이탈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많이 다루는 방식인 하이브리드 하다는, 소위 ‘신구상’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관념이든 실경이든 기존 산수 형식에 팝아트와 초현실주의적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섞어 놓거나 서구에선 이미 한물 간 극사실을 새로운 것처럼 내놓지만 미술적 가치에 대한 고민 따윈 별로 없는, 새털처럼 가벼운 여운만 진동할 뿐이다. 그나마 어디선가, 누군가 인기를 얻으면(그것마저도 시장의 대중성에 부합하는 상품으로서의 인기다) 이내 아류작들이 범람한다. 습속의 복습이요, 창작의 지독한 빈곤을 나타내는 증좌이다. 따라서 구상미술에서 체감할 수 있는 느림의 미학, 시지각적 담론은 본질에서가 아니라 형식에서부터 심도 있는 고찰을 요구받는 건 지나치지 않을 만큼 당연하다.

 

 

사랑그리고달콤한사과001_53.0x40.9cm_oil on canvas_2009

 

 

2. 필자가 작가 신영진의 작품세계를 언급하기에 앞서 구상미술과 미디어아트 등과 같은 다장르 혼합예술을 비교 언급하는 이유는 그의 경우 작금 우리나라 구상미술이 처한 환경을 숙지하고 스스로 변화하려는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구상미술의 존재성에 관한 자문을 당당하게 열어젖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묻는다. 왜 구상은 진부하며 지루하다고 인식되어야만 하는가, 화려함이라든가 반전(反轉)이 주는 충격은 없으나 반면 은은하게 물결치는 미감이 있으며 공감할 수 있는 정서적으로 동일한 주파수(周波數)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외면 받는가에 대해 되짚곤 한다. 이뿐 아니라 관람자와 작가 간 무언의 소통(疏通)이라든가 하나의 작품을 매개(媒介)로 한 존재적 가치로의 회귀나 회상만큼은 물질적, 개념적으로 매우 거대하게 느껴지는 작품들보다 아무래도 진득할진대 어떤 이유로 동시대는 구상미술의 한계를 언급하는가에 관해 질문한다. 그리곤 그 해답을 자신의 근작들을 통해 찾아가고 있다.

과거 지극히 사실적인 형상성의 완연한 획득에 치중했던 그의 작품들은 근래 들어 다소 복잡한 변화를 거치고 있다.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궤도에 오른 기법이나 테크닉을 맑은 고딕으로 사진 보다 사진 같은 ‘대상의 재구성’에 정열을 다했다면 근작들은 의미론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는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 일예로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유지되던 정적이고 서술적인 화면 구성은 동적으로, 보다 함축된 언어로 변모했다. <여심> 연작을 비롯해 풍경화인 <일과 사랑> 시리즈, 묘사의 정점을 드러낸 여러 초상화들, 극사실적 누드 등이 일부분 존치되고 있으나 조형성에선 전반적으로 일관된 시점이나 통일성을 역 지향하는 것으로 탈바꿈했다. 오래전부터 다뤄지던 대상은 그저 작가의 내레이션이 화면 밖으로 확산(擴散)되는 촉매 역할, 다시 말해 화자와 관자의 지각을 연결하는 매개의 상징이자 작품의 중심으로써 신영진의 의중을 대신하는 메타포(metaphor)라 할 수 있을 뿐 그것 자체가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니게 되었다.

그가 전적으로 삼았던 화풍인 리얼리티에서의 이탈, 그 흔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본격적으로 되밟아나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개인전에서부터이다. 신영진은 그 당시 캔버스에 화선지를 두텁게 올려 먹을 새로운 재료로 활용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작품제목도 다분히 설명적인 것에서 벗어나 기호화 했다. 작품에 상징과 기호적 체계들이 들어섰다는 것은 그의 화력에 비춰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형식의 전환을 논하기에 앞서 기존 리얼리티 한 경향에 대한 새로운 정립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부여가 가능하다.

 

 

야화001_90.9x60.6cm_oil on canvas_2009

 

 

2005년 이후 그의 그림들은 서서히 현재와 같은 양식으로 접근한다. <누드>, <울릉도>와 <백두산> 연작들,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낭만적인 그림들이 종적을 감춘 것은 아니었지만 이때부턴 보임이 전부가 아닌, 절제된 화면 너머에 놓인 이슈, 메시지가 담긴 서사를 이입하여 차별화를 꾀했다. 그리곤 해를 거듭할수록 메시지에 더욱 치중하는 양상을 보였다. 즉 이전부터 이룩해온 고유한 작업 성향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실험적 자세를 견지해 왔다는 것이다. 더불어 현재에 이르러선 특별한 해독이 불가능한 활자들과 어우러진 무언성과 '지각에 대한 탐구'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움001>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3. 그의 이전 그림들은 관람자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특유의 공감대를 갖고 있는 것이었고,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린 어느 순간 그의 놀랍도록 근사하게 묘사된 작품에 흠뻑 동화(同化)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화폭(畵幅) 속에 담겨진 구상미는 화자(畵子)의 시각과 피화자(彼畵子)의 시각을 하나로 응축시켜 놓는 야릇한 매력을 담지하고 있었음은 물론 단순한 대상의 재생산을 넘어 관아적 개념이 그것을 감싸고 있음을 체감토록 했다. 그러고 보면 이것만으로도 예술적으로 완숙한 단계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은 채 근작들을 통해 시간의 등선을 전복하려는 움직임을 엿보였다. 스스로에게 궤도 수정을 종용했다. 표현의 한계를 스펙트럼화 된 회화성으로 치환해 정해진 룰에 움직이는 듯한 구상의 획일성을 떨쳐내려고 했다. 이어 작금의 그는 현대미술이 요구하는 공통(共通)의 메시지(message)를 자연스럽게 끌어안은 채 집적(集積)시켜 놓은 화두(畵頭)를 놓지 않으면서도 새로움에 대한 갈망의 그림자를 내보이는 중이다.   

 

 

적목단001_45.5x33.4cm_oil on canvas_2009

 

 

4. 이제 신영진의 그림들은 과거와 달리 화면을 구성하는 부차적(副次的)인 소재들(활자들을 포함한 하나의 화면에서 동일한 형상을 재차 반복하는 등의)을 부각시켜 주제의식의 틀을 견고하면서 동시에 표현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인식을 규정하는 단어(문자)들을 우연적으로 흩뜨림으로써 시각적 단정을 개념 전반으로 치환하고, 일반적인 구상에서 쉽게 읽히던 인지적 한계를 탈피해 사유를 덧씌우려하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외적으론 다분히 상호 충돌을 유발하나 일견 브르통이 말했던 “대립, 모순되는 것들이 융합하는 현실의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해도 그르지 않은 변화랄 수 있다.

허나 필자는 고정적이던 표현방식의 달라짐이 그의 작품을 올곧이 해석하는 것이라 판단하지 않는다. 필자는 신영진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으로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의지'를 꼽는다. 다양한 방법론을 갖춘 채 범람(汎濫)하는 다매체 다장르 속에서 한때 주요 구상단체의 전령을 맡아왔던 작가로써 자신의 회화세계에 충실한 의문을 품어 왔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테크닉과 기법의 완연함, 구상미술의 세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편하게 안주할 수 있음에도 되레 환골탈퇴하려는 작가적 고집에 높은 점수를 준다. 특히 자신의 작품이 차후 어떠한 방향으로 조타를 맞춰야할지를 영속적으로 고민하는 뚝심, 교육자적 자존심으로 지나온 날을 반추하고 나아가 묵묵히 자신 만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내면의 모습을 진정한 가치로 여긴다. 비록 이번 전시가 본인의 기준에 준하는 완성을 향한 중간 단계일 지도 모르나 그런 이유로 차년도 작품전을 기대토록 한다면 성공적이지 못할 까닭이 없어 보인다. 보다 달라진, 예술적 가치라는 틈을 넓힌 그의 작품들을 접할 수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6개의 사과-기쁨001_oil on canvas_2009

 

 

누드2009_oil on canvas_2009

 

 

 

 
 

신영진

2008 아시아프 기획위원 역임 | 2004~2006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감사 역임  | 2001~2004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이사 역임 | 2001~2004 사단법인 목우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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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 한남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미술대학 교수협의회 운영위원

 
 

vol.20091014 - 신영진展